《孫子兵法》 『第一篇 兵者』4
오사(五事)의 네 번째인 장(將)을 보자.
將者, 智.信.仁.勇.嚴也. 장자, 지.신.인.용.엄야.
장(將)이라고 함은 지식과 믿음과 인자함과 용기와 엄격함이옵니다.
'장(將)'이란 지휘와 통수의 본질이다. 손자는 제네랄쉽(Genaral ship)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자가 여기에 열거한 다섯 가지 요소를 장수가 구비해야 할 자질로 해석하는 책들이 많은데, 오사(五事) 전체의 성격으로 볼 때 이것은 지휘관의 자질이 아니라 지휘도의 본질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오히려 지휘관의 자질로서 다섯 가지를 설명한 것은 《오자병법(吳子兵法)》의 『논장(論將)』 편이 더 적합하다. 오자는 장수의 자질을 이(理 ; 군사지식), 비(備 ; 준비성), 과(果 ; 결단력), 계(戒 : 절제력, 자기통제력), 약(約 : 간소화, 단순화)의 다섯 가지로 설명하였다.
손자는 지휘도의 본질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면서 그 첫 번째 항목으로 지(智)를 꼽고 있다. 이것은 군사지식을 비롯한 지휘관의 인문소양 전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전문직업적 능력이다. 손자는 지휘도라는 것을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덕목을 앞세워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 극히 지적인 연구와 지식의 사용에 속하는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智)를 가장 앞에 세운 것이다. 손자의 병가를 제외하고는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의 어느 문파나 철학, 학문에도 지(智)를 으뜸 가치로 꼽는 것은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지(智)는 가장 하위 덕목이다. 그러나 병학에 있어서 만큼은 이 지(智)가 제일 먼저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손자는 군사와 전쟁을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과학이나 수학의 영역으로 보고있다는 반증이다. 기계적인 법칙의 적용이 가능한 분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전쟁의 지휘나 장수의 직무 수행에 어떤 원칙과 법칙이 세워질 수 없는 것이었다면 손자는 지(智)를 제일 앞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의 지휘는 정확한 법칙을 숙지하고 원칙을 통찰한 기계적 원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손자의 사상이 여기에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군사와 전쟁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덕목이 전문지식과 능력을 결코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만약에 군주가 군사에 대한 지(智)가 부족할 때는 반드시 군사(軍師)가 있어야 했다. 오늘날로 보면 참모이다.
평생동안 전쟁터를 누빈 카에사르는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람이었다. 어떠한 학문적 소양과 정치적 재능과 언변과 도덕적 수양과 성격적인 강점도 전쟁터에서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대신해줄 수가 없다는 점에 대해 그는 착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를 다른 모든 면에서 뛰어나게 출중한 재목으로 알아보고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군사에 대한 지(智)가 없으며, 군대 경력을 갖고있지 못함도 간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카에사르는 생전에 자신의 후계자를 위하여 탁월한 참모를 준비해 두었다, 그가 바로 아그립파이다. 아그립파가 있어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에서 쳐부수고 로마를 통일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그는 전쟁에 관해서는 아그립파의 조언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로마를 통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군의 지휘관으로는 이류였다. 한고조 유방이나 삼국지의 유비도 이런 유형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옥타비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유방에게는 한신, 유비에게는 공명이라는 뛰어난 군사들이 그들의 부족한 군사적 지(智)를 보완해 주었던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 정가에는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모 정치인의 어록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군사에 있어서 최고 통수자는 지(智)를 빌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손무와 한신, 공명과 같은 군사(軍師)이고, 현대에 와서는 참모들이다. 그러나 남에게서 빌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을 손자는 건강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손자가 두 번째로 장(將)의 덕목으로 말하는 신(信)이다. 어쩌면 손자는 이 논문을 합려에게 바치면서 '지(智)는 자기에게서 빌려가고, 당신은 나에게 신(信)을 보여 주십사' 하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대목을 읽으면 왜 손자가 오나라 왕 합려에게 면접을 보는 날 애꿎은 궁녀를 두 사람이나 죽였는지 짐작이 된다.
손자가 오왕 합려를 처음 만나 상견례를 했던 날의 이야기는 《사기(史記)》의 『손자오기열전』이나 《오월춘추(吳越春秋)》와 같은 사서에 실려서 전하는데, 은작산에서 발견된 죽간본 속에 이 상황에 대한 더욱 상세한 기록이 있다. 제목을 『견오왕(見吳王)』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손자가 오왕을 만나 면접을 본 날의 기록이다. 이 『견오왕』의 첫 구절은 합려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십삼편(十三篇) 소(所) 명도언공야(明道言功也)". 해석을 하면 "(네가 지어 올린)병서 13편을 읽어보니, 그 속에는 (네가) 도를 밝혀놓았고, 공을 말해 놓았더라." 이 말로 미루어 합려는 손자의 병서를 읽어보고 흡족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어서 한번 실제로 보여줄 수 있겠느냐 하니, 손자가 '그거야 별 어려울 게 없다'고 대답한다.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것이어서 다소 진부한 감이 있지만 손자의 장(將)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일화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므로 소개하기로 한다.
합려가 시범을 보기를 원하자 손자는 합려의 궁녀들을 뜰에 집합해서 즉석에서 조련을 시켜서 훌륭한 군대로 만들어 보이겠다고 장담을 한다. 합려는 호기심반, 기대반으로 해보라고 승낙을 했겠고, 궁녀들의 군사 훈련이라는 전대미문의 일이 오나라 궁성의 뜰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당연히 잘 될 리가 없었겠다. 뜰에 불려나온 궁녀들은 키득거리고 손에 든 병장기로 장난치고 웃기 바빴다. 그녀들은 장난인 줄 알았지 이게 정말 실전 같은 훈련일 줄은 생각을 못한 것이다. 손자가 그녀들에게 가르치려고 한 것은 간단한 제식훈련이었다. 북을 치면 줄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오고, 뒤로 들어가고, 오른쪽으로 도는 정도의 초보적인 훈련이었는데, 아무리 북을 치고, 구령을 해도 궁녀들은 반장난이었고 그저 킬킬거리기만 할뿐이었다. 손자는 아주 간단한 구령을 세 번 반복해서 들려주고 다섯 번을 암송시킨 후에 하게 했고, 잘 되지 않자 다시 세 번 들려주고 다섯 번 암송하는 것을 세 번을 되풀이 해주었다. 그래도 제대로 하지 않자 손자는 지휘관으로 임명한 궁녀 둘을 끌어내어 목을 베었다. 그 궁녀 둘은 오나라왕 합려가 가장 총애하는 여자들이었다. '준비가 되거든 다시 부르시게' 하고 멀찍이 가 있던 합려가 보아하니 손자가 자기 궁녀를 둘이나 죽이려 하는지라 급히 뛰어와서 만류하자 손자가 말하기를 "저는 왕에게서 임명된 장수요, 지금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장수가 전쟁터에 있을 때는 왕의 명령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고는 사정없이 두 궁녀의 목을 베어버렸다. 겁에 질린 궁녀들이 그 뒤부터는 구령 하나에 착착 맞아서 돌아갔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 바다. 원래 그렇게 어려운 동작들이 아니었을테니까. 그러나 반재미삼아 한번 보자고 했다가 자기가 가장 아끼던 궁녀 둘을 눈앞에서 잃은 합려는 그 훈련이 그다지 재밌지 않았던 모양이었고, 내심 많이 불쾌했던 모양이다. 대충 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손자를 물러가게 한 후에 한동안 다시 부르지를 않았다고 한다. 오자서가 열심히 변명을 하고 합려의 마음을 위로한 탓인지, 아니면 원래 합려가 그 정도 그릇이 큰 군주였던 탓인지, 면접장에서 황당한 살육극을 저지르고도 손자는 결국 오나라 군대의 지휘자로 등용이 되었다.
이 사건을 찬찬히 살펴보면, 손자는 자기가 말한 장(將)의 다섯 가지 조건을 이 사건을 통하여 합려에게 전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선 손자가 궁녀들을 뜰에 불러모은 후, 대열을 갖추고, 행진을 하고,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도록 설명하는 것들을 포함하여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방법과 요령 자체가 바로 장(將)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자격인 지(智)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장수로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병사들을 모아놓고도 당장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니, 나머지 자질들을 언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손자가 궁녀들을 훈련시킬 때, 같은 구령과 명령을 하는데 있어서 몇 번을 되풀이하더라도 결코 처음과 달라지지 않는 것은 바로 장수의 신(信)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궁녀들이 웃고 키득거리면서 몇 번이나 명령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았지만 화를 내지 않고 되풀이 설명하고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장수의 인(仁)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도 궁녀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 때, 군주가 만류를 하는데도 총애하는 궁녀를 처형하는 것이 바로 장수의 용(勇)이며, 처형 후에 제대로 된 시범을 끝내 보여준 것이 바로 장수의 엄(嚴)이라 할 수 있다. 손자는 글로 적어 올린 내용과 이론을 정확하게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면접 날, 손자가 합려에게 보여준 것은 '대저 장수란 첫째로 군사의 실무에 밝아야 하고, 다음은 신뢰할 수 있어야 하며, 다음은 인자함이 구비되어야 하고, 그 다음은 용기가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엄격함을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손자는 합려에게 통수자로서의 신(信)이 있는 사람인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오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은 왕인 합려이기 때문에 신(信)은 합려에게도 요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장수로서 권한을 준 이상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 바로 군주가 장수에게 보여주어야 할 신(信)이었다. 손자가 두 궁녀의 목을 베고도 그 시범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것은 합려의 도량과 신(信)이 부족했다면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합려는 손자와 같은 훌륭한 군사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오나라가 패자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사(五事)의 마지막은 법(法)이다.
法者, 曲制.官道.主用也. 법자, 곡제.관도.주용야.
법이라는 것은 군대의 편성과 명령체계, 그리고 보급체계의 규정을 말합니다.
《손자병법》에 대한 주해서를 남긴 사람 중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조조(曹操)가 있다. 조조는 이 세 가지를 해석하기를, "곡제(曲制)란 부대의 조직과 편제단위인 부곡(部曲), 정보의 소통수단으로서 깃발인 기치(旗幟)와 쇠와 가죽악기인 금고(金鼓)의 운영규정이다. 관도(官道)는 조정의 벼슬 체계와 식량의 수송로를 말한다. 주용(主用)은 주력부대인 주군(主軍)의 보급물자이다"라고 하였다. 조조 이래로 학자들은 이 단어들을 해석하기를, 곡제(曲制)는 오늘날의 편제(編制)와 같은 개념으로, 관도를 명령과 지휘계통인 군령(軍令)으로, 주용(主用)은 식량을 비롯한 군수품으로 해왔다. 손자가 여기 말하는 법(法)은 오늘날로 보면 군조직법(軍組織法)에 대한 설명이다. 이것에 대해 각론으로 들어가면 조조가 주해한 것처럼, 군대를 지휘하는 각종의 명령전달수단인 깃발들과 북, 징의 사용법과 군호의 용례 등이 정리되어질 것이다. 손자가 군조직법(法)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면서 군수물자의 조달을 넣어놓은 것은 그만큼 당시에 군을 움직일 때에 그에 수반되는 식량과 마초를 비롯한 각종 군수품의 징발과 조달에 세세한 법령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손자 당대에는 군역은 사(士) 이상의 신분에게만 지워졌고, 피지배층은 군대로 징발되지 않았다.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각종 군장 역시 출전하는 사람 각자가 갖추어서 나갔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후대에 가서 전국시대에 접어들면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가 일반화되어 평민들도 강제로 군인으로 징발되었고, 이들에게 필요한 군장과 무기는 국가가 지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자 당대까지는 귀족군이 일반적이어서 봉건제도의 계급에 따라 각 신분에 맞게 할당된 병사와 무구를 각자의 경제력으로 갖추어서 자신의 상관인 영주의 소집에 응하였다. 식량과 마초 등의 군수물자도 각자가 할당된 양을 책임져야 했다. 그리스나 훗날의 로마군도 자기의 갑주와 방패, 창과 칼은 시민 개인이 책임지고 갖추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시민은 자신의 무장을 스스로 갖추고 군인으로서 복무에 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손자가 말하는 주용(主用)이라는 말은 단순한 군수품에 대한 법령이라기보다는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전시동원에 관한 법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동원체계를 잘 확립해서 국가 총력전으로서 전쟁을 수행한 첫 번째 고대국가가 바로 오나라이다. 물론 그러한 법제는 손자가 세운 것이고, 그것에 힘입어 신흥국가인 오나라가 전통적인 중원의 강국인 초나라를 멸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나중에 상세하게 그 경과를 살펴보겠지만 오초전쟁은 먼 훗날의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과 유사하다. 근대적인 법체계와 군대조직을 갖춘 신흥 일본이 동서양의 대표적인 전통적 강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은 고대에 오나라가 초나라를 패망시킨 것과 비견될 수 있다. 손무가 병(兵)의 책임자로 발탁된 후의 오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평민출신의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보병을 양성하고 그것으로 전차를 탄 귀족군을 무찔렀다. 그 승리는 손자가 세운 법(法)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잘 정비된 법이야말로 국력의 요체이자 군사력의 기초임을 실증해서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 손자이며, 이 사상은 훗날 상앙이 법을 정비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에서 다시 한번 입증된다.
손자는 오사(五事)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 말하고 있다.
凡此五者, 將莫不聞, 知之者勝, 不知者不勝. 범차오자, 장막불문, 지지자승, 부지자부승.
무릇 이 다섯 가지(오사)는 장수된 자가 (귀담아)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아는 자는 이길 것이고, 알지 못하는 자는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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