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서당(書堂)에서 3년만에 (뫼산山) 한 자 겨우 배운 학동과 (정자관程子冠)의 유례

浩 根 書 堂 2010. 4. 6. 22:16

 

 

서당(書堂)에서 3년만에

(뫼산山) 한 자 겨우 배운 학동과 (정자관程子冠)의 유례

 

(사계절四季節)치고 어느 계절인 듯 풍류를 즐기지 못할 계절이 어디있겠냐만 그래도 이왕이면 (만산홍엽滿山紅葉)이 곱게 물든 가을계절이라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맛이난다. 그런데 배우자 (서당書堂)에서는 만산홍엽이 두 번이나 돌아와도 (뫼산山)한 자를 때지 못하는 학동이 있었으니 훈장선생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학동 이름은 (이재주李才周). 재주 부모는 재주이름 석자와 부모이름 여섯자만 가르쳐주시면 평생 잊지 않고 은인으로 모시겠다며 어려운 형편에도 글세는 꼬박꼬박 내면서 아들하나 있는 것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며 키우는 걸 보니 훈장선생도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벌써 다른 학동들은 천자문, 명심보감, 동몽선습, 격몽요결을 통달해가는데 훈장선생은 잠이 오질 않았다.

 

어떻게하면 딱 한자만이라도 가르칠까, 재주부모는 9자 이름만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는데 아홉자는커녕 한일자도 모르고 뫼산자도 모르니 대책이 없었다. 훈장선생은 재주를 가르칠 방법을 연구하였다. 제일먼저 머리에 모자를 써서 모자위에 (뫼산山)자를 써서 머리에 쓰고 앞을 쳐다볼때마다 이 모자에 쓴 글자가 무슨 글자냐, 물어도 동문서답을 한다.

 

또 모자가 비를 젖거나 종이로 만들어서 금방 찢어지고 학동들이 훔쳐다가 연꼬리를 만들고 밑찡개를 하느라 자주 없어졌다. 그래서 훈장선생은 아예 (뫼산山)자를 삼베로 만들어 모자로 쓰고 재주를 가르치니 매일보는 앞산에 있는 산과 똑같으니 재주는 머리에 쓴 (뫼산山)모자를 가르키며 뫼산자라고 대답을 한다. 이제 삼년 공부가 다 끝나는 가을 마지막 서당에서 가을소풍을 뒷산 넘어로 가는데 앞서가던 어느 노인이 이산저산을 두루 살피며 보행을 한다.

 

그 노인은 귀가 들리지 않아 눈으로 확인하기전에는 뒤에 어떤 물체가 다가와도 모른다. 마침 재주가 골짜기를 돌아 양지바른 곳에 훈장님 모자와 똑같은 (뫼산山)자가 앞산에 있었다. 재주는 앞산 (뫼산山)자를 가르치며 야.. 뫼산자다.. 훈장님 모자와 똑같은 (뫼산山)자다.. 듣지 못하는 노인은 재주가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곳을 보니 양지 바르고 산새가 온화한 것을 보고 ‘야.. (명당明堂)자리다’ 입모양을 보고 알아차리고 노인은 뒷짐에 찬 돌삽으로 산소자리를 파내려간다. 노인께서는 아버지가 작고하시어 侍墓살이를 하기 위해 양지바르고 산새가 (온화溫和)한 장소를 찾던 중이었다.

 

노인께서는 산소자리를 다 파고 시묘살이할 여막지을데를 터를 고르고 땅속을 두뼘정도 파내야 겨울에는 덜 춥기 때문에 파내려갔다. 한뼘반이나 팠을까.. 갑자기 햇빛에 반사되는 돌덩이들이 돌삽에 찍혀나오고 눈이 부실정도다. 노인은 가만히 살펴보니 돌덩이가 아니고 황금이었다.

 

노인은 우선 몇덩이를 집어들고 집으로 가서 부인에게, 자식들에게 금덩이를 보여주니 진짜 금이라는 답이 나왔다. 3형제를 둔 노인은 맏상주 한명만 조문을 받게하고 산소로 와서 여막을 지으며 금을 캐내기 시작했다. 바지게로 세바가지나 금덩이가 나왔으니 벼락부자가 되었다. 효심깊은 자식이기에 산을 넘어 좋은 자리에 모실려고 (풍찬로숙風粲路宿)한 보람이 있었다.

 

한편 아침에 소풍을 갔던 배우자 서당 학동들은 저녁때가 다 되어 돌아오는데 아까 상복입은 그 노인이 무언가를 한 보따리 들고 있었다. 노인은 재주에게 금덩이를 주면서 명당자리를 잡아줘서 고맙다고 한다. 훈장님께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재주가 손가락으로 가르친 방향은 정확히 (뫼산山)자이다. 훈장도 보람이 있었다.

 

최선을 다해서 삼년동안 (뫼산山)자 한자를 모자까지 만들어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모자까지 만들어서 가르쳤다는 말을 듣고 그 노인은 훈장이 쓰는 모자이름을 (정자관程子冠)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임금님이 쓰는 어떤 모자도 모자에 (아들子)자가 들어가는 모자는 없다. 명당자리를 잡아주고 재주네도 노인도 가난한 형편에 큰 부자가 됐으니 비록 멍청한 아들일 망정 얼마나 귀한 자식인가..

 

그래서 노인은 (아들子)자를 넣어서 훈장이 쓰는 (뫼산山)자 모자를 정자관으로 이름을 지어서 지금도 훈장 선생님이 학동들을 (훈봉訓捧)할때는 반듯이 뫼산자로된 정자관을 쓴다. 삼년만에 겨우 뫼산자 한자만 알고있는 재주가 초서4학을 통달한 똑똑한 학생보다 부자가 되기는 먼저 됐으니 같이 있던 똑똑한 학동들이 이광경을 보고 훈장님께 이의를 달기 시작했다. “훈장님, 재주가 아침에 가르킨 산은 뫼산자가 정확하게는 아니잖습니까.” 반발을 한다. 그렇다.

 

정확한 (뫼산山)자가 아니고 한쪽이 약간 낮은 뫼산자였다. “훈장선생님, 저희들 가르칠때는 분명 뚫을곤자 양옆에 7부 능선까지 양쪽 날개가 올라와야 뫼산자라고 했는데 왜 뫼산자로 인정해주십니까. 저희들도 뫼산자를 한쪽이 낮아도 뫼산자로 인정한다면 저희들도 (뫼산山)자라고 외쳤을 겁니다.” 훈장선생님께서는 난처한 입장이 됐다. 어떠한 성인 군자도 물질 앞에는 초연해질수가 어려운 일이니 금덩이를 뫼산자 한자로 부자가 된 멍청이 재주를 보니 똑똑한 학동들이 난리가 났다. 이래서 알아야 면장이라도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지혜로운 훈장 선생님은 “이놈들아, 저 (뫼산山)자를 터를하고 있는 산은 너희들이 태어나기전에 산불이 나서 얕은쪽에 나무가 모두 죽어서 얕을 뿐이지 너희들이 어른이 되는 세월이 지나면 저 나무가 양지쪽에 자라고 있으니 북쪽 산자락 날개와 똑같을 것이다.” 똑똑한 학동들은 훈장선생님 말이 옳다며 옛날에 불이 났던 것도 사실이고 북쪽방향 나무보다는 남쪽에 있는 소나무가 빨리 자랄것이니 몇 년만 있으면 정확한 (뫼산山)자가 되기 때문이다. ※(입산금호,이,개구고인,난 入山擒虎,易,開口告人,難) 산으로 들어가 호랑이는 잡기 쉬워도 입으로 사람을 가르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 지금도 수많은 선생님들이 백년대계를 위하여 불천주야 헌신하고 있으니 학부형들은 가정에서의 예절교육을 잘 가르쳐 선생님이 학문을 가르치는데 전념하도록 해야하고 선생님들 또한 (촌지寸志)를 받지 말고 학생과 부형에게 말꼬리가잡힐만한 교육자로서의 행실은 하지 말아야한다. 모두가 본인에 책무를 다할 때 백년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촌지를 받지않는 청렴한 선생님도 많다.

 

세상에 알려지는 촌지문제로 부각된 선생들 얘기다. 조선조 500년사에 (청백리淸白吏) 인물표를 보면 280명이다. 청백리로 등재되려면 여러단계 심사를 거쳐 청백리가 되는 것이다.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고 재물에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은 가문에 영광이요, 대대손손 앞길이 열려있는 길이자 나라를 부강케하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 것이다.

 

조선 태조부터 순조 왕권까지 청백리280명 중 (시호諡號)를 임금에게 받은 사람은 99명이다. 그중에서 35명이 (글월문文)자로 시호를 받은 사람이 있다. 청백리에 등재되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물론이요, 가문에 영광인데 죽어서까지 임금에게 시호를 받는 것은 가히 어진 성군보다 나은 사람이다.

 

시호를 받은 99명중 35명이 글월문자를 넣어서 시호를 임금이 제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학문이 중요,필요했기 때문이다. 학문으로 깨우치지 않고는 어떤일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학문열기로 펄펄 끓는 것이다. 죽어서까지 시호를 받는 것은 (출천지효出天之孝) 하늘이 내린 효자들이 아니면 감히 받을 수 없다.

 

명종시절 유언겸은 아버지,어머니 시묘살이 6년상을 모셨고 청백리로 세상을 밝게하는 선행자로 효충을 다하자 시묘살이 할 때 호랑이 두 마리가 여막을 지켜줬다는 천안 영성지에 기록되있다. (유헌柳軒 1462~1506년)(중종中宗)시대 본관(전주全州)역시 부모님 시묘살이 6년상을 마치고 청백리로 세상을 맑게 정화하는데 1등공신이다. (전주全州)본관을 가진 청백리는 (유훈柳塤)(성종成宗)임금때, (유경창柳慶昌1593~1662) (숙종肅宗)임금. 이렇게 3명이 청백리와 시묘살이 6년상을 모시고 같은 종파, 문화, 진주, 전주 유가 들은 청백리에 11명이 등재됐다. 단 한명도 청백리에 들지 못한 성씨들도 많다. 청주한씨들이 왕비로써는 제일 많이 규모로 모셨는데 청백리에 등재된 사람은 딱 두사람이다. 왕가이면서도 청백리가 많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높은 관직에 있으면 재물에 초연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인천에 (하우명河友明)1413~1493. 문효공 하연의 3남으로 부모님 6년 시묘살이 상을 마치고 세조대왕이 두 번씩한  효행을 인정하여 관직을 수여하였으나 초야에서 후학을 가르치겠노라고 고사하여 효자정각을 세조가 지어준 일이있다.

 

이처럼 시묘살이는 부모님 (사후死後)에 자식된 도리로는 최고의 보은하는 것이다. 시묘살이를 해봐야 부모님께서 3살까지 키워주신 그 은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효심깊은 노인 때문에 가난한 두집이 부자가 되고 시묘살이 하는데 아버지를 상을 넉넉한 마음으로 모실 수 있었고 훈장선생님 또한 정자관을 이름을 짖게 되어 세계최초로 아들子가 들어간 정자관이 생겼다.

 

이러하듯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때 마지막 불씨라고 생각하여 학문을 지펴야하고 마지막 물 한방울이라도 생각하며 귀하게 여겨 내자식이상 보다듬어주어 백년대계를 이뤄 찬란한 인류의 꽃을 피워줘야 할 피어가야 할 선구자가 되야 할 것이다.

 

경제대국 10위안팍, 국민소득 2.3만불, 지하자원하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나라에서 참으로 자랑스런 일이다. 허나 국민성은 세계 꼴지다. 이것은 교육자와 부모들이 그리고 법을 다루는 관리들이 정도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 주위와 도로에 담배꽁초 쓰레기가 한 시간만 주우면 한말씩 줍는다.

 

일본을 비롯하여 우리보다 못하는 나라도 거리에 쓰레기, 담배꽁초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못사는 나라가 꼴지가 되도 국민성이 1등이 되야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효실천孝實遷) 교육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자관 (程子冠)

 

조선 중기 서당의 훈장들이나 양반들이 평상시 집에서 쓰던 관(冠)으로, 평상복 착용시에 사용한다. 망건 위에 탕건을 쓴 다음 그 위에 덧쓰는 것이다. 원래는 당건(唐巾)이라 하는 중국제 관모 중의 하나였다.

 

중 국 북송의 대유학자인 정자(程子:공자의 손자)가 처음 쓰기 시작하여 정자관 혹은 정자건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국에서 는 조선 중종(中宗)·명종(明宗) 때부터 구한말까지 양반들 사이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주자관(朱子冠)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관제(冠制)에는 정 자관 외에도 동파관(東坡冠)·충정관(沖正冠) 등이 있는데,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개성에 맞는 관을 선택하여 즐겨 썼 다. 그중에서 후세에까지 널리 착용된 것은 위엄 있어 보이 는 정자관이었다.

 

사대부들은 예의상 평상시에도 갓을 쓰고 다른 사람을 대해 야 했기 때문에 매우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갓 대신 이 정 자관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형태는 안에 사각형의 높은 내관(內冠)이 있고 바깥에 다 시 '산(山)' 자형을 2단 혹은 3단으로 덧붙여 처리하였기 때 문에 2층 정자관, 3층 정자관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위의 세 봉우리는 터져 있는데, 대체로 지위가 높을수록 층 이 많은 것을 썼다. 재료로는 보통 말총을 사용한다. 관의 제일 하단부에는 검은 면포(綿布)로 3㎜ 정도의 테두리를 두르고, 관의 앞·뒤 중심 과 각 층의 가장자리는 여러 개의 말총을 대어 징금수로 마무 리한다.


 

 
유물상세정보
유물명칭 정자관(程子冠)
국적/시대 한국(韓國)조선(朝鮮)
재질 피모(皮毛) 말총(말총)
크기 높이 : 19 cm / 너비 : 29 cm
용도기능 의(衣) 관모(冠帽) 관(冠) 정자관(程子冠)
소장기관 국립2(國立2) / 민속(民俗) / 민속(민속)
유물번호 민속 2288

  

 

 

http://cafe.daum.net/jeonyewon 정자관(程子冠)

 

조선시대 사대부와 유생들 사이에 유행한 관모의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정자건이라고 하는데, 북송의 대유학자인 정호(程顥 : 1032∼1085)·정이(程 : 1033∼1085)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명종(明宗)조 이제신(李濟臣)의 청강쇄어(淸江 語)에 "벼슬아치들이 평상시에 갓 대신 관을 쓰기를 좋아하였다. 그 관의 제도는 程子式·朱子式·東坡式· 正式·方巾 등이 있어 종류가 매우 많았다 한다." 이들 관은 모두 유가(儒家)의 관으로 유생들은 각자 개성에 맞는 관을 선택하여 즐겨 썼다. 정자관은 사각형의 높은 내관에 밖에 다시 '산(山)' 자형을 2단 혹은 3단으로 덧붙여 처리하였기 때문에 2층 정자관, 3층 정자관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애초에 망건을 쓰고 다시 탕건을 쓰고 그 위에 덧쓰는 것으로 재료는 말총을 사용하고 있다. 대개 사대부들은 평상시에도 갓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 것을 예의로 삼았기 때문에 이것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면서 갓 대신 맨 상투바람을 면하는 것에 충당하게 된 것이 이 관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집안에서만 착용하도록 되어 있던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관모(영남대학교 신라가야 문화연구소, 1972) 인물화로 보는 조선시대 우리옷(현암사, 1998) 한국민속대사전(민족문화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문연)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1975) <사진자료> 정자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문연) 20권, 14쪽) (조선시대의 관모(온양민속박물관), 20쪽) (복식류 명품도록(고려대학교 박물관), 134쪽) (인물화로 보는 조선시대 우리옷(현암사), 94∼95쪽) <유사·관련 용어> 2층정자관, 3층정자관

 
                                                                                                                                   
 
갓. 程子冠 . 망건 定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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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부모가 물려준 자신의 신체를 돌보고 지키는것이 부모에 대한 공경의 출발이고,유교적 가치와 믿음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절대 자르지않았다.

특히 성인 남성들은 머리에 상투를 틀어 올리는 방식을 취했다.

한국의 전통 모자라 할수있는 갓은 조선시대 남성들이 한복과 함께 착용 했든것이다.

주로 말총을 정교하게 엮어만든 갓은 아래쪽으로 갈수록  점점 엷어지는 원통형의 관과 단정하고 정제된 선이 돋보이는 넓은 챙으로 이루어져 있다.

챙 부분은 쪼갠 대나무 살을 고운살과 함께엮어 옻칠을 해 마무리한다.

전체가 검고 비단결 같은 윤기가 나는 갓은 턱밑을 묶는 갓끈외 별다른 장식이 없다.

머리위에 갓을 쓰면 그 안의 상투와 망건의 실루엣이 비치게 된다.

예전 사람들은 계절과 날씨에 관계없이 갓을 착용했는데,이는 근본적으로 절제와 중용의 표현이며,점차 양반 계층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발전 하였다.

각종 전례때 쓰는관은 투구와는 달리 그리 크거나 부담스럽지 않는 독특한 특징은 그 가벼움에 있다.

언제나 부드러우며 꽂꽂하고 곧은 모양세를 유지 한다.

 [정자관]:갓이 공적인 성격을 지닌다면정자관은 대개 집안에서 생활할때 쓰든것이다.

말총을 공기가 통할만큼 매우 성기게 씨줄과 날줄 형태로 짜 만든다.

조선시대 사대부와 유생들사이에 유행한 冠帽의 하나로써, 중국에서는 程子冠이라 하는데 북송의 대유학자 정호.정이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명종조[ 이제신]의 청강제어에 "벼슬아치들이 평상시 갓대신 정자관을 쓰기를 좋아하였다".

그관의 제도는 정자식.주자식등이 있어 종류가 대단히 많았다.

이들관은 모두 유가의 관으로 유생들은 각자 개성에 맞는 관을 선택하여 썼다.

정자관은 사각형의 높은 내관에 밖에 다시 [山]형을 2단 혹은 3단으로 덧붙여 처리 하였기때문에  2층정자관 ,3층정자관 이라 명칭하기도 한다.

애초에 망건을 쓰고 다시 탕건을 쓰고 그위에 덧쓰는것으로 재료는 말총을 사용하고 있다.

대개 사대부들은 평민시 갓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것을 예의로 삼았기때문에 이것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면서 갓대신 맨 상투바람을 면하는것에 충당하게 된것이 이 관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이정자관은 집안에서만 착용하도록 되어 있다.

 

[망건];남성들이 갓밑에 두르든 일종의 머리띠로 상투를 튼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상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와 유생들 사이에 유행한 冠帽의 형태를 서술해 봤는데,지금도 향교 석준제 행사며,입향조 향사및 기제사시에도 상기한 관모가 쓰이고 있음을 종종 대하게 되는데,각 그定義에 관해서 눈여겨 볼 대목이다.                      끝.


출처 : 사단법인)한국전례원 - 社團法人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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