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智仁勇, 知仁勇
智仁勇, 知仁勇
이름 안의현 (조회수:41) 이메일 lltnt@naver.com (2008-10-22 09:45:04)
지난 8월 19일 등록번호 2346번으로 문의한 내용인데요, 답을 보면 : 둘 다 비슷한 뜻이라는 것으로 이해되는데요, 인터넷 등에서 찾아보니까 지인용은 논어 헌문 편 "지자불혹 인자불우 용자불구"에서 나왔다고 하는데요, 원래 논어 헌문 편에도 "지"자를 "알지" 또는 "지혜지"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 논란이 있는데요, 어느 것이 맞는지요?
질문1). 논어 헌문 편에 있는 글자는 어느 글자가 맞는지요?
질문2). 헌문 편에서 나온 말이면 헌문 편에 있는 글자로 사용해야 옳지 않은지요? 아니면 바꿔 써도 관계가 없는지?
질문3). 육사 교정에 있는 智仁勇 은 논어 헌문 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말인가요?
질문4). 그럼 가훈을 쓸 때는 어느 것으로 사용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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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庵 (2008-10-22 11:42:26) X
질문1); 논어 헌문 편에 있는 글자는 어느 글자가 맞는지요?
答; 論語大全이나 아래와 같이 朱夫子의 註書나 戴氏 註書 등을 살펴보건대 知가 맞는 것 같습니다.
질문2); 헌문 편에서 나온 말이면 헌문 편에 있는 글자로 사용해야 옳지 않은지요? 아니면 바꿔 서도 관계가 없는지?
答; 논어 헌문 편에 쓰인 글자로 씀이 옳을 것 같습니다.
질문3) 육사 교정에 있는 智仁勇 은 논어 헌문 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말인가요?
答; 智와 知는 슬기를 뜻함에는 同字이니 그 필자가 택함의 진의를 알지 못하여 가부를 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질문4) 그럼 가훈을 쓸 때는 어느 것으로 사용해야 하나요?
答; 憲問篇의 뜻을 택함이라면 知仁勇으로 씀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論語憲問篇子曰君子道者三我無能焉仁者不憂知(朱註知去聲自責以勉人也)者不惑勇者不懼子貢曰夫子自道也朱註道言也自道猶言謙辭○尹氏曰成德以仁爲先進學以知爲先故夫子之言其序有不同者以此○戴氏註子貢謂君子之道皆夫子身備有之道特自謙無能爾頰谷之會齊矦作侏儒之樂欲以執定公孔子曰匹夫而熒惑於諸矦者誅於是誅侏儒齊矦大懼曲節從敎此仁者必兼知勇也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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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골선비 (2008-10-22 12:06:45) X
질문1); 논어 헌문 편에 있는 글자는 어느 글자가 맞는지요?
답: 지인용(知仁勇)을 3자를 직접 거론한 책은 중용(中庸)과 예기(禮記)입니다. 논어에는 子曰 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라는 문
장과 子曰 君子道者三, 我無能焉: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질문2); 헌문 편에서 나온 말이면 헌문 편에 있는 글자로 사용해야 옳지 않은지요? 아니면 바꾸어 써도 관계가 없는지?
답: 통용되는 글자이므로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일전에도 구체적인 언급은 못했는데 조선 중후기 학자 중에는 지(知)와 지(智)를 구
별하여 딕테일하게 논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귀하와 같은 고민을 하시고, 나름대로 정리하여 결론을 낸 분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노사 기정진 선생님으로 기억합니다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질문3); 육사 교정에 있는 智仁勇 은 논어 헌문 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말인가요?
답: 당연히 관련이 있는 글이겠지요.
질문4); 그럼 가훈을 쓸 때는 어느 것으로 사용해야 하나요?
답: 지(知)에는 지(智)의 뜻도 포함되어있습니다. 한자의 형성과정을 유추해 볼 때, 후대로 내려올수록 글자가 많아지고 의미 및 구
분도 확대되며 생성되는 것입니다. 어느 쪽도 상관없겠으나 세분화된 한자의 의미로 볼 때 후대에서는 知는 지식의 의미로 국한
해서 사용하는 빈도수가 많았고, 智는 지혜의 의미로 사용하는 빈도수가 많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을 기다립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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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랑 (2008-10-22 16:04:05) X
[위에 밝힌 나름의 견해가 모두 합리성이 있습니다. 竊念입니다.]
<1>. 智仁勇, 知仁勇의 當否를 논하기는 어렵습니다.[부질없는 논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 만약 이것이 문제가 되어 법정다툼(?)을 한다면‘智仁勇’이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3>. 五常을‘仁義禮智信’이라 표기하고,‘仁義禮知信’이라 하지 않습니다.
<4>. 그 이유는 五常에 따라 지어진 서울의 四大門(五方)의 이름이 東門<興仁(之)門>, 西門<敦義門>, 南門<崇禮門>, 北門<弘智門>,
中央<普信閣>입니다.
<5>. 우리 五方色(색동)도 東<仁=靑>, 西<義=白>, 南<禮=朱>, 北<智=玄>, 中央<信=黃>이며, 東=木, 西=金, 南=火, 北=水, 中央=土
입니다.
<6>. 그러므로‘智’는 北이고 水이며, 仁者樂山, 智者樂水이므로‘智仁勇’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물론‘知者樂水’라고 한
문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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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庵 (2008-10-22 20:26:41) X
아래와 같이 살펴보건대 知仁勇의 知자의 뜻은 슬기롭다 보다는 알다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특히(二)항의 말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듯합니다.
●中庸第二十章(朱夫子著中庸或問)
(一), 天下之達道五所以行之者三曰君臣也父子也夫婦也昆弟也朋友之交也五者天下之達道也知仁勇三者天下之達德也所以行之者一也註達道者天下古今所共由之路卽書所謂五典孟子所謂父子有親君臣有義夫婦有別長幼有序朋友有信是也知所以知此也仁所以體此也勇所以强此也謂之達德者天下古今所同得之理也一則誠而已矣達道雖人所共由然無是三德則無以行之達德雖人所同得然一有不誠則人欲間之而德非其德矣程子曰所謂誠者止是誠實此三者三者之外更別無誠
(二), 或生而知之或學而知之或困而知之及其知之一也或安而行之或利而行之或勉强而行之及其成功一也註知之者之所知行之者之所行謂達道也以其分而言則所以知者知也所以行者仁也所以至於知之成功而一者勇也以其等而言則生知安行者知也學知利行者仁也困知勉行者勇也盖人性雖無不善而氣稟有不同者故聞道有蚤莫行道有難易然能自强不息則其至一也呂氏曰所入之塗雖異而所至之域則同此所以爲中庸若乃企生知安行之資爲不可幾及輕困知勉行謂不能有成此道之所以不明不行也
(三), 子曰好學近乎知力行近乎仁知耻近乎勇註子曰二字衍文○此言未及乎達德而求以入德之事通上文三知爲知三行爲仁則此三近者勇之次也呂氏曰愚者自是而不求自私者徇人欲而忘返懦者甘爲人下而不辭故好學非知然足以破愚力行非仁然足以忘私知耻非勇然足以起懦
(四), 知斯三者則知所以修身知所以修身則知所以治人知所以治人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註斯三者指三近而言人者對已之稱天下國家則盡乎人矣言此以結上文脩身之意起下文九經之端也 [논쟁은 피하고 싶습니다. 다만 참고가 될성싶어 올려 놓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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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골선비 (2008-10-23 13:18:39) X
知와 智를 문제의식을 갖고 딕테일하게 연구하고 발표한 자료가 고문 중에 있습니다.
제가 본 기억이 있는데 정확치가 않은지라..... 오상은 智라는 글자의 개념 및 자리가 잡힌 상태에서 생긴 단어이니 당연히 지혜지자를 써야 되지요. 그리고...사대문에 홍지문은 아마 들어가지않을 것입니다. 사대문의 북쪽 정문은 숙정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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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랑 (2008-10-23 16:13:19) X
[愚見을 드립니다.]
<1>. 물론 서울의 北門은‘肅靖門’입니다. 그러나 원래 북문은 (여러 가지 사유로) 두지 않는 것입니다.
<2>. 다만, 四大門 중 북문을 두었을 때 그 문은‘弘智門’입니다. <홍지문은 漢北門이라고도 하는데 인왕산 뒤편 끝자락에 있는 탕
춘대의 성문이다.> 이는 역사가 고증하고 있습니다. 홍지문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3>. 내가 숙정문을 모르고, 답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사실은 문헌으로 고증을 했어야 합니다만 문헌이 (너무) 방대하여 예시하지
못하였으나, 명륜골선비는 알 만한 學者이니 직접 고증해 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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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홍지문(弘智門)
홍지문은 숙종 45년(1719)에 탕춘대 성을 축조하면서 건축한 탕춘대 성문이다. 현재 홍지동 산4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한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註]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았으므로 공식적인 명칭을 홍지문이라고 하였다.
홍지문은 숙종 45년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 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 년 간 그대로 방치되어 오다가 1977년 서울특별시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웅장하게 복원하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하였다. 한편 홍지문 북쪽으로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 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칸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