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종시일관[에세이]
浩 根 書 堂
2010. 6. 19. 13:17
글 :: 홍순석 :: 강남대 인문과학연구소장
종시일관(終始一貫)
일본 교토에 고류지(廣隆寺)라는 고찰이 있다. 일본에서 추앙되고 있는 쇼오토쿠(聖德) 태자의 발원으로 창건된 사찰이라고 한다. 천년 고찰답게 웅장하고, 고색이 창연했다. 본당 처마에 여러 현판이 매달려 있는데, '일심(一心)'이라는 문구의 현판이 많았다. 사찰에 이런 현판이 봉납되어 있음도 우리와는 구별된다. 그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종시일관(終始一貫)'이라는 현판이었다. 우리 같으면 '시종일관'이라 했을 것이다. 이들은 왜 '처음과 끝'이라는 말을 굳이 '끝과 처음'이라고 썼을까?
그들의 관습과 문화를 이해하자면 화두처럼 제기된 이 말의 뜻을 풀어야 할 것이다. 처음을 중시하든, 끝을 중시하든 그것은 각국의 관습이요, 문화이니 우열을 따질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따져서 본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고치는 것이 또한 발전이 아니겠는가.
한·중·일의 문화를 함께 접할 때마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중간에 있음을 절감한다. 기질이나 관습도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한국과 일본만 대조해 보면 상반되는 점이 많다. 가령 우리의 전통 의상은 앞쪽이 화려한 데 반해, 일본은 뒤쪽이 더 화려하다. 접대할 때 우리는 손님을 먼저 방에 들게 하는 데 반해, 일본은 주인이 먼저 들어가서 맞이한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일본인들은 시작보다는 끝을 중시하는 것 같다. 여러 측면에서 그들은 관습적으로 '끝내기'에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1호 관광버스가 맨 뒤에서 운행하는 이유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공공 시설을 혼자 이용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공 시설을 이용할 정도면 제법 그 나라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뒤늦게 발견한 사실이 있었다. 차량 한 대로 여행을 할 때는 별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차량이 여러 대이고 보니 상황이 달라졌다.
1호 차를 타고 있던 나는 그 차가 맨 앞에서 운행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오히려 1호 차는 항상 맨 뒤에 있었다. 이유를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운전기사는 "맨 뒷번호의 차가 앞에서 운행해야 몇 대의 차량이 단체로 이동하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주 단순한 발상이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안내양이 공공 버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일본의 공공 버스는 뒤에서 타고 앞으로 내린다. 뒷문으로 타면서 차표를 뽑는다. 내릴 때 앞쪽으로 와서 차표를 정산하는 기계에 넣으면 요금이 계산된다. 내리는 손님과 운전기사는 항상 정겨운 인사를 나눈다. 내릴 때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다음에 또 그 차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든다. 탈 때 차표를 확인하고 내릴 때는 얼굴조차 확인할 수 없는 우리의 차량 문화와는 차이가 있다.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를 깨끗이 하는 일본인
공원 벤치나 휴게실 탁자와 같은 공공 시설을 이용할 때도 관습의 차이가 드러난다. 우리는 사용하기 전에 먼저 수건이나 휴지를 꺼내서 닦아 낸다. 그러면서 앞서 사용한 사람들을 교양이 없다고 욕한다. 치울 수 없을 정도로 더럽혀진 시설물은 아예 방치되어 있다. 내가 지켜본 일본 사람들은 정반대였다. 어느 곳에서든지 그냥 와서 앉았다가 일어날 때는 휴지를 꺼내 말끔히 정리해 놓고 떠난다.
애완견을 데리고 아침 산보를 즐기는 일본인들은 항상 봉투를 가지고 다닌다. 개가 무례한 짓을 저지르면 곧바로 처리하기 위해서다. 단지 주워 담는 정도가 아니라 걸레로 닦아 내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대부분의 공원에 노숙자가 숙박하고 있지만, 아침이 되면 그들은 언제 그곳에 천막을 치고 숙박했었는가 할 정도로 말끔히 정돈한다. 그러니 이용하는 자는 불편이 없다. 청소를 하면서도 누구를 욕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더럽힌 것을 정리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요, 기분 나쁠 까닭이 없다. 다른 사람이 더럽혀 놓은 것을 불평하며 치우는 우리의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처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우리는 왜 불평해야 하는가.
화장실의 슬리퍼
일본을 몇 차례 여행하고 돌아와 우리 집의 관습을 바꾼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화장실 문화다. 반평생을 살면서 화장실 안쪽에 놓인 슬리퍼가 어떻게 놓였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지내 왔었다. 크게 불편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 머물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숙소의 화장실에 놓인 슬리퍼는 항상 이용하는 사람에게 편리하도록 안쪽을 향해 있었다. 물론 가지런하게. 반대쪽을 향하고 있는 하나는 내가 앞서 이용했던 슬리퍼였다. 습관처럼 벗어 던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미안한 감이 들어 돌려 놓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화장실을 이용한 뒤에는 뭐 그리 바쁠 것도 없는데 내팽개치듯 벗어 놓고 왔을까? 다음날 일본 사람들을 살펴보니 나올 때 아주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서서 슬리퍼를 벗어 놓았다. 내가 그리 하자니 처음엔 무척 어색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뒤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귀국해서 집의 화장실을 살펴보았다. 아이 것, 어른 것이 뒤엉켜 엉망이었다. 아마 몹시 급한 상황이 된다면 슬리퍼를 신을 겨를이 없을지도 모른다. 맨발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왔을 테고. 거의 두 달 이상을 감시하고 꾸짖은 다음에야 가족들 모두 동조하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 집 화장실의 슬리퍼는 항상 가지런하게 안쪽을 향해 있다. 내가 집안에서 이루어 놓은 혁혁한 공(?)이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이 일은 아주 작은 일이지만 정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곳에서든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음식점의 신발 가운데, 나올 때를 생각해서 벗어 놓은 신발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것이다.
종시일관(終始一貫)
일본 교토에 고류지(廣隆寺)라는 고찰이 있다. 일본에서 추앙되고 있는 쇼오토쿠(聖德) 태자의 발원으로 창건된 사찰이라고 한다. 천년 고찰답게 웅장하고, 고색이 창연했다. 본당 처마에 여러 현판이 매달려 있는데, '일심(一心)'이라는 문구의 현판이 많았다. 사찰에 이런 현판이 봉납되어 있음도 우리와는 구별된다. 그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종시일관(終始一貫)'이라는 현판이었다. 우리 같으면 '시종일관'이라 했을 것이다. 이들은 왜 '처음과 끝'이라는 말을 굳이 '끝과 처음'이라고 썼을까?
그들의 관습과 문화를 이해하자면 화두처럼 제기된 이 말의 뜻을 풀어야 할 것이다. 처음을 중시하든, 끝을 중시하든 그것은 각국의 관습이요, 문화이니 우열을 따질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따져서 본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고치는 것이 또한 발전이 아니겠는가.
한·중·일의 문화를 함께 접할 때마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중간에 있음을 절감한다. 기질이나 관습도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한국과 일본만 대조해 보면 상반되는 점이 많다. 가령 우리의 전통 의상은 앞쪽이 화려한 데 반해, 일본은 뒤쪽이 더 화려하다. 접대할 때 우리는 손님을 먼저 방에 들게 하는 데 반해, 일본은 주인이 먼저 들어가서 맞이한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일본인들은 시작보다는 끝을 중시하는 것 같다. 여러 측면에서 그들은 관습적으로 '끝내기'에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1호 관광버스가 맨 뒤에서 운행하는 이유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공공 시설을 혼자 이용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공 시설을 이용할 정도면 제법 그 나라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뒤늦게 발견한 사실이 있었다. 차량 한 대로 여행을 할 때는 별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차량이 여러 대이고 보니 상황이 달라졌다.
1호 차를 타고 있던 나는 그 차가 맨 앞에서 운행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오히려 1호 차는 항상 맨 뒤에 있었다. 이유를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운전기사는 "맨 뒷번호의 차가 앞에서 운행해야 몇 대의 차량이 단체로 이동하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주 단순한 발상이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안내양이 공공 버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일본의 공공 버스는 뒤에서 타고 앞으로 내린다. 뒷문으로 타면서 차표를 뽑는다. 내릴 때 앞쪽으로 와서 차표를 정산하는 기계에 넣으면 요금이 계산된다. 내리는 손님과 운전기사는 항상 정겨운 인사를 나눈다. 내릴 때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다음에 또 그 차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든다. 탈 때 차표를 확인하고 내릴 때는 얼굴조차 확인할 수 없는 우리의 차량 문화와는 차이가 있다.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를 깨끗이 하는 일본인
공원 벤치나 휴게실 탁자와 같은 공공 시설을 이용할 때도 관습의 차이가 드러난다. 우리는 사용하기 전에 먼저 수건이나 휴지를 꺼내서 닦아 낸다. 그러면서 앞서 사용한 사람들을 교양이 없다고 욕한다. 치울 수 없을 정도로 더럽혀진 시설물은 아예 방치되어 있다. 내가 지켜본 일본 사람들은 정반대였다. 어느 곳에서든지 그냥 와서 앉았다가 일어날 때는 휴지를 꺼내 말끔히 정리해 놓고 떠난다.
애완견을 데리고 아침 산보를 즐기는 일본인들은 항상 봉투를 가지고 다닌다. 개가 무례한 짓을 저지르면 곧바로 처리하기 위해서다. 단지 주워 담는 정도가 아니라 걸레로 닦아 내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대부분의 공원에 노숙자가 숙박하고 있지만, 아침이 되면 그들은 언제 그곳에 천막을 치고 숙박했었는가 할 정도로 말끔히 정돈한다. 그러니 이용하는 자는 불편이 없다. 청소를 하면서도 누구를 욕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더럽힌 것을 정리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요, 기분 나쁠 까닭이 없다. 다른 사람이 더럽혀 놓은 것을 불평하며 치우는 우리의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처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우리는 왜 불평해야 하는가.
화장실의 슬리퍼
일본을 몇 차례 여행하고 돌아와 우리 집의 관습을 바꾼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화장실 문화다. 반평생을 살면서 화장실 안쪽에 놓인 슬리퍼가 어떻게 놓였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지내 왔었다. 크게 불편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 머물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숙소의 화장실에 놓인 슬리퍼는 항상 이용하는 사람에게 편리하도록 안쪽을 향해 있었다. 물론 가지런하게. 반대쪽을 향하고 있는 하나는 내가 앞서 이용했던 슬리퍼였다. 습관처럼 벗어 던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미안한 감이 들어 돌려 놓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화장실을 이용한 뒤에는 뭐 그리 바쁠 것도 없는데 내팽개치듯 벗어 놓고 왔을까? 다음날 일본 사람들을 살펴보니 나올 때 아주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서서 슬리퍼를 벗어 놓았다. 내가 그리 하자니 처음엔 무척 어색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뒤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귀국해서 집의 화장실을 살펴보았다. 아이 것, 어른 것이 뒤엉켜 엉망이었다. 아마 몹시 급한 상황이 된다면 슬리퍼를 신을 겨를이 없을지도 모른다. 맨발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왔을 테고. 거의 두 달 이상을 감시하고 꾸짖은 다음에야 가족들 모두 동조하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 집 화장실의 슬리퍼는 항상 가지런하게 안쪽을 향해 있다. 내가 집안에서 이루어 놓은 혁혁한 공(?)이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이 일은 아주 작은 일이지만 정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곳에서든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음식점의 신발 가운데, 나올 때를 생각해서 벗어 놓은 신발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것이다.
출처 : 한문과 인생
글쓴이 : 나경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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