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Re:중용(中庸 )이란?

浩 根 書 堂 2010. 6. 26. 07:39

중용이란

중용이란 ‘치우침이 없는 것’을 말하며 예를 들어,‘정의’와 ‘자비’가 조화를 이루었을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동양에서는 선과 악을 초월했을 때의 경지를 도(道, Tao)라고 말하며, 이 도(道)가 바로 진리(Truth)요 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는 음과 양의 중간에 놓여있으되 음과 양을 모두 포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초월하되 세상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도(道)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묘한 것이 바로 도(道)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말로서 설명할 수 없고 말로서 설명하면 도의 위상이 추락한다고 도덕경 서문에 서술하고 있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한마디로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으나 자연과 같이 살라는 가르침으로 압축해 볼 수 있습니다. 물과 같이 바람과 같이 살다 가라는 것이 노자의 자연적 세계관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무심하고도 청정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무위자재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항상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등의 8가지 가르침을 제시했습니다. 노자는 도덕경을 통해서 인간이 자연을 벗삼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도덕경의 구절들 중에는 도(道)란 자꾸 덜어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붓다의 가르침과 비슷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때를 벗기고 탐, 진, 치를 버리면 집착에서 벗어나고 그렇게 되면 자연과 같은 순수한 마음을 얻게 됩니다. 이렇듯 노자는 자꾸 자신의 것을 벗어내고 덜어내어 무소유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데 도(道)의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생각도 덜어내고 가진 것도 덜어내어 아무것도 없을 때 마음에는 평화가 가득하고 이것이 바로 도(道)의 실재요 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온하고 안정된 마음을 도(道)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도(道)는 자연과 같아 어디에 치우치거나 어디에 물들게 되면 즉시 도(道)가 깨치게 됩니다. 따라서, 중용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연을 초탈하고 세속에 초연한 다소간 고답(高踏)적인 무위적 행위가 바로 노자의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이렇게 무심하고 무위적인 행위가 세상에 영향을 주지 않고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상태로 멈추느냐는 결코 아닙니다. 예수께서 설파하신대로 왼손이 하는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과 비슷합니다. 도(道)를 얻어 마음이 맑고 평화로우면 그에 상응하는 중생들의 마음들이 평화를 얻게 됩니다.

 

 노자의 인생지혜는 바로 숨어살되 자연과 세상의 이치를 공부함으로써 아무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정신계에 반향을 일으켜 집단무의식의 진화를 이루고 사람들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한 명의 도인이 나타나면 많은 사람의 영혼이 정화되듯이, 노자와 같이 세속을 버리고 숨어살아도 노자의 지혜는 인류의 정신계를 타고 흘러나가 인류의 마음에 평온과 지혜 그리고 신성을 느끼도록 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인생지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mesotes라고 하는 개념인데..이는 단순히 기하학적인 질서 속의

중용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덕과 지적인 덕을 구분하였습니다. 지적인 덕 중 하나는 유명한

실천지(Phronesis)가 있구요.. 실천지는 사량적인 것, 즉 계산 가능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

스 윤리학은 직관적 이성을 바탕으로 한, 의무론적 윤리가 아닙니다. 소위 행복주의 윤리라고

불리며, 사하키안 윤리학에서는 자아 실현의 윤리에 포함되어 있죠.

 중용이라는 개념은 지적인 덕, 즉 프로네시스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덕

에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관후나 절제, 용기 같은 도덕적인 덕들을 아리스토레스틑 니코마코스

윤리학 후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중용이라는 것은 양 극단의 도덕적 품성들 사이의

중간을 의미합니다. 즉 이는 보편적인 행동의 기준이 아니라, 그렇기에 특정한 공식이나 법칙이

없죠. 귀납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도덕적 감성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개별판단의 도덕적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떤이나 동일하게 중용의 능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도덕

적이라는 것은 습관화된 품성, 즉 도덕적 덕이 배양되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중용을

파악하는 능력도 도덕적 덕이 습관화 되어 있는 사람이 유리하지요.

 

불교에서는   중도 사상, 즉 중관사상이라는 것은 용수, 인도어로는 나가르쥬나의 사상입니다.

 반야경을 중심으로 해서, 초월적인 불교사상을 정립하는 과정입니다. 공을 중심으로 하죠..초기 불교는 본래 경험적인 것이었습니다. 석가는 형이상학적인 우주적 질서, 혹은 그러한존재를 상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현실적 감각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질서를 포착하려 하죠. 물론 이것이 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중도라는 것은 불상견과 손익견 사이의 중간자를 취함입니다. 용수에게 있어 네 가지 인과관계의 개념을 다루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실체론과,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질서 속에 존재한다는관념론 모두를 반박하기 위함입니다.

 용수의 개념화가 초월적이라는 것은 그가 비경험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를 논하는 것이 목표여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유일한 실재를 나타내는 변증법적인 개념적 장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현실의 경험계, 즉 관습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인과관계는 존재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그러나 진리의 입장, 형이상학적인 실재에서 보자면 인관관계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이처럼 현실적인 입장과, 형이상학적인 입장 모두를 취하는 관점이 바로 나가르쥬나(용수)의

중도 사상입니다.

 

 만물의 원인은 인과적으로 얽혀있되 그것은 인과적인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상대적,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죠. 고로 이것이 의타기성이라는 것입니다.

 

 

=====> 사서 중 중용을 참조하세요, 모종삼 교수의 중국철학사도 좋습니다. 풍우란도 물론이구요.

 마지막으로 사서 중의 중용은 誠 개념을 다루고 있습니다. 만물의 근본은 이법을 따르고 이 이법은

 성이라는 원리에 지배됩니다. 성하면 모든 것을 투지하는 통관하는 원리가 세워지는 것이죠.

 중용은 일반적으로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의미는 불확실합니다.

 선진 불교의 우주론적인 체계를 잘 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논어 맹자가 인간심성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구체적 덕목들의 예화를 보여준다면, 중용,

 그리고 대학 같은 유교경전은 우주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우주 질서를 잘 보여주고 있죠.

 中 이라는 것은 만물이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본체의 상태를 말함이요, 庸 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그 쓰임과 본래의 가능적인 상황을 잘 구현하고 있는 탄력성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중용은 아까 언급한 誠 개념을 따라 해석된다고 많은 이들이 봅니다. 주자나 한국의

 이이  같은 이들도 그렇게 보구요...

                                                                                                                                        

 

예전의 어떤 정승이

 

싸우던 두 하인의 억울함을 듣고는

한하인에게  네 말이 맞다 하고는

 

다른 하인에게 네 말도 옳다,,,

 

이렇게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자신을 이끌어 감을

 

""중용""이라하였다는데~~~

 

 

 ."히말라야 5000천 고지에 사는 사람들은 5000이 넘는산도 마운틴이라고 하지않고 "힐"이라고 한다. 라구~ 근데 우린 1000만 넘어도 고산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잘난척을 하죠...이게 다 중생이라 그럴거예요..

 

중용은 증자의 제자이자, 공자의 손자인 자사에 의해 쓰여진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 중용이란 텍스트가 완성이 된 것은 전국 말기와 진한 시대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는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종전의 개인 윤리와 사회 질서가 크게 흔들려 있었고, 민간의 생활은 피폐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중용은 다른 경서들이 그러하듯 그 시대상을 반영하게 됩니다. 즉 꽉막혀있어 소통이 되지 않는 개인간 사회간의 중층적인 정체를 중용 사상으로 꿰뚫고자 하였습니다. 개인의 마음과 행동을 소통시키고, 개인과 개인을 소통시키고, 개인과 사회를 소통시키고, 사회와 사회를 소통시키고, 개인과 하늘을 소통시키고자 중용이란 글을 쓴 것입니다. 중용은 형이상적인 천과 개인의 심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지만 실제 목적은 현실의 부조리 타파와 상하좌우내외표리전후의 소통에 있었던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궁극적인 중용의 목적이라면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것입니다.

 

중용이란게

어느 한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꼭 알맞은 것이 중(中)이며, 언제나 변함없이 일정하고 바른 것이 용(庸)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중'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올바른 도이고 '용'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지켜야만 할 일정한 원리인 것이다. 또한 이때의 '중용'이란 단순히 중간이란 뜻이 아니라 어떤 경우이건 그때그때 각 개인마다 가장 알맞고 모든 일에 가장 적절한 도리, 그것이 '중용'인 것이다. 얼핏 판단하기에 '중용'의 도는 가장 쉬운 길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상당한 덕(德)의 수양이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매우 힘든 도인 것이다.

출처 : 사단법인)한국전례원 - 社團法人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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