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人遺弓 人得之

浩 根 書 堂 2010. 12. 10. 15:54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楚王遺弓 楚人得之'(楚人得弓)이란 성어(成語)

춘추전국시대의 초(楚共王이 出獵)나라 공왕이 사냥터에 나갔다가

(而遺其弓) 그만 자신의 좋은 활을 뇌두고 와서

그 잃음에 대해 잠시동안 안타까와 했다고 한다. 그랬다가 결국에 가서는 그 활을 누가 줍겠느냐에 이르러 '초나라 왕이 잃은 활을 초나라 사람이 주울 것'이라는 결론을 얻고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자위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활이 멀리 다른나라로 가지않고 자신이 통치하는 초나라 안에 있게된다는 공왕의 자위는 주머니돈이 쌈지돈에 진밴가 없기에 그런대로 미소로운 얘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초왕유궁 초인득지'의 이 고사는 (楚王遺弓 楚人得之)라 해서 '楚王'을 '楚人'으로 바꿔 전해오기도 하는데, 이를 좀더 자상하게 출전(出典)에 따라 옮겨보면 대충 다음과 같기도 하다.

―孔子가 출생했을 무렵 중국은 진(晋)나라를 맹주(盟主)로 하는 북방제후(北方諸侯) 동맹국과 초(楚)나라를 맹주로 하는 남방제후동맹국의 二大 세력으로 나눠져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초나라가 막강한 맹주국이 되게 만든 것은 춘추시대 오패(五覇)의 하나로 꼽혔던 초나라 장왕(莊王)(BC 613∼591)의 힘이 컷는데, 이 장왕을 뒤이은 이가 그의 아들 공왕(共王, 이름은 審, BC590∼560)이었다.

어느날 공왕은 사냥을 나갔다가 자신의 활을 깊은 산 속 어딘가에 놓아둔 채 돌아왔다. 걱정 끝에 근시(近侍)들이 활을 찾아오겠다 하자 공왕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초나라 사람이 잃어버린 활을 초나라 사람이 주을 뿐…… 괜찮지 않은가."
이 이야기는 너그러운 공왕의 왕다운 마음씨를 기리는 뜻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공왕이 한참 나이에 죽은 뒤 8년이 지나 노(魯)나라에서 출생한 孔子도 이 고사를 듣게 되었다. 이에 孔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거 참 배짱이 작은 이야기로구나. 사람이 잃어버린 활을 사람이 주울 따름이 아닌가. 하필이면 '楚'에 한정지울 건 무언가."
그래서 '楚王遺弓 楚人得之'는 '人遺弓 人得之'란 말로 전이(轉移)됐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 고사는 전한(前漢)의 劉向이 쓴 설화(說話)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런데 <설화>를 읽은 후세의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군가는 다시 이렇게 말하면서 이 고사를 거듭 수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老子가 살아계셨다면 孔子의 말씀도 가당치 않을 것이다. '人遺弓 人得之'가 아니라 '遺得無也'가 아니겠는가."

잃은 것도 얻는 것도 따로 없다고 하는 이 결언(結言)은 "어느 時空의 原點에서 내가 간다"고 하는 '얽매임에서의 초월의 心象'을 正名에서 無名한 자연사상으로까지 달통케 해준다 할 것이다.

출처 : 도서관과 사회마당
글쓴이 : 한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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