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응와 이원조- 명심보감 서문, 인흥서원현판 글씨. 부조묘 봉안문 등

浩 根 書 堂 2011. 3. 1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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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書, 皆古人格言 茶飯裘葛이니 多於行處用力而曰明心은 何也오? 心爲一身主宰니 不明乎心이면 行不著 習不察이니 此書之所以名也니라. 心體本明而物交則昏하니 故로 晦翁詩取媲於鑑이니 塘之淸 鑑之空이 在我方寸이니 反省而磨治焉 則書中所載, 無非明心之要也니라.

이 책은 모두 옛 사람의 밥 먹고 물 마시며 옷 입는 일에 대한 격언이니,  행동 거처에 관한 일상적인 일이 많은데 ‘마음을 밝힌다’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마음은 이 한 몸의 주재자이니, 마음을 밝히지 않으면 행동이 드러나지 않고 습관이 성찰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책의 이름을 지은 까닭이다. 마음의 본체는 본래 밝은 것이나 사물에 노출되면 어두워진다. 그러므로 주자의 시에서도 거울에다 비유하는 것을 취하였으니, 연못의 맑음과 거울의 텅 빈 것이 나의 마음속에도 있는 것이라, 돌이켜 살펴보고 갈고 다스린다면 곧 책 안에 실려있는 것이 마음을 밝히는 요체 아님이 없는 것이다.

 

秋文憲公이 當麗代荒厖之辰하야 能自明於心하야 以心爲師하야 于以刱賢館而崇儒敎하고 述而不作以遺後人하니 其視寄耳目而騰口舌者니 不其賢歟아?

추 문헌공이 고려대의 황폐한 때를 당하여 능히 스스로 마음을 밝혀서, 마음으로써 스승을 삼아 양현관(養賢館)을 건립하여 유교를 숭상하고 성현을 조술하고 스스로 창작하지는 않음으로써 후학들에게 남겨 주었으니, 그 이목에 붙여서 구설에 올림을 보는 분이니, 현인이 아니겠는가?  

  

其裔孫이 將登諸梓하야 請余讎敎하니 余覽之하고 斂袵曰 言行一致而今人尙言하고 古人尙行이어늘 此書之有補於世, 不尠이리라. 遂略敍數語于後하노라. 篇目類例는 有許性齋序하니 不復贅하노라.

그 후손이 장차 출판을 하고자하여 나에게 교정의 가르침을 청하길래 내가 그 책을 살펴보고 옷깃을 여미고 말하기를, “언행은 일치하여야 하는 것인데 요새 사람들은 말을 앞세우나 옛 사람들은 실천을 숭상하였다. 이 책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몇 마디 말을 서술하여 그 뒤에 붙인다. 편목과 유례는 허성재의 서문에 있으니 다시 덧붙이지 않는다.

崇禎後 五戊申 仲春에 晩歸山人 凝窩 李源祚는 謹書하노라.

숭정 기원1) 후 다섯째 무신(서기 1848)년 2월에 만귀산인 응와 이원조2)는 서문을 쓴다.


1) 숭정 기원(崇禎紀元) : 명(明)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장렬제(莊烈帝)의 연호(年號). 그 즉위년인 1628년이 숭정 1년이다. 의종은 1644년 반란군인 이자성(李自成)의 군대가 북경(北京)을 함락하고 자금성(紫禁城)을 침범해 들어오자 자금성 북문 밖에서 황후와 자녀들을 죽이고 그 북쪽에 있는 경산(景山)에 올라가 목을 메어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명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었다. 그 뒤 이자성의 군대도 오삼계(吳三桂)와 청(淸)나라 연합군에 의해 토멸되고 중원은 완전히 청나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명나라에 대해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이 있다고 해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숭정 연호를 계속 사용해 내려온 관습이 있었다.


 

2) 이원조(李源祚:1792~1871):조선 철종, 고종 때의 성리학자.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시호는 정헌(定憲),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배워 주자(朱子)와 퇴계(退溪)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의 학문은 조카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에게 전수되어 퇴계의 적통(嫡統)으로 영남학맥(嶺南學脈)의 영수가 되었다. 고종 때 공조판서를 지내고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여 만귀정(晩歸亭)을 짓고 후학 양성과 존심수양에 전력하였다. 이 서문을 쓴 해가 무신년(1848년)으로 되어 있으나 착오가 있는 것 같고, 허성재의 서문을 본 것으로 보아 고종 무진년(1868년)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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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묘를 봉안할 때 고유한 제문


 동방에 왕기가 비침에 부상(符祥)이 먼저 나타나도다. 웅장한 저 연화도(蓮花島)에서 그 후손을 우리나라에

보내었으니 거룩하신 노당 문헌공이시여! 도를 갖추고 함께 동방에 오셨도다.

 

도초가 다시 새로워지듯 우리 회헌 문성공과 같이 하시고 큰 띠를 두른 선비들이 모여들며 성학(聖學)

이 때를 맞이하도다. 세상은 바야흐로 난세였을 때 독히 사문(斯文)을 천명하였도다. 전해온 명심보감

한권의 글은 온 솥 안의 맛을 알려준 한 점의 고기와 같고 용천(龍川)에 사당이 있는 때부터 난폭한 풍습이

바꾸어지도다.

 

후손이 탁월하고 준수하니 섬나라 적을 물리치고 공을 세웠도다. 위에서 대를 잇고 아래로 후손에 전하니

그 조상에 그 자손이라. 사실은 나타나고 숨겨짐이 있으니 그 이치는 마침내 면할 수가 없도다.

이미 사당을 짓고 제향을 모심은 사사로운 일이 아니요 공적 행사이며 먼 후손에게 그 덕택이 미치는 것을

하여금 어찌 잊으리요.

 

의기를 발하고 부조묘를 세움은 여론이 다 같이 함께 한 바라. 수 십평 둘레의 담 안에서 세덕(世德)을

이에 이어가니 묘소는 가까운 봉우리에 계시고 영혼도 충만히 임하시리니 행사를 처음 시작하면서 감히

향기로운 제를 올리나이다.

 

판서 이 원 조(李源祚)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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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추씨카페
글쓴이 : 보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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