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태백’이 ‘삼포’로 가는 까닭
‘이태백’이 ‘삼포’로 가는 까닭
밤늦은 부산 남포동, 거리에 내놓은 곱창집 야외 테이블에서였다. 옆자리에는 앳된 두 젊은이가 마주 앉아 소주 ‘좋은데이’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가 자꾸 내 쪽으로 기울었고 왁살스러운 경상도 사투리에 액션 또한 컸다.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기술이 있거나, 하나는 잘해야 먹고살 수 있데이”, “기술 배울라꼬 전문대에 들어가 제빵 만드는 걸 배웠제”, “××, 한 주면 배워줄 거를 한 학기 내내 하는 기라”, “때리치아뿌다”, “아무리 찾아도 할 게 없는 기라. 그래가 군대 가는 기다”.
두 젊은이는 10분에 한 번꼴로 지나가는 또래들을 형님, 아우라 부르며 권커니 잣거니 했다. 시시껄렁하게 우리 앞을 지나갔던 그 많은 젊은이들, 자정의 남포동 거리를 배회하며 그들이 찾는 것은 무엇일까. 타로점, 사주풀이, 운명과 연애 취업 등을 상담해 주는 포장마차형 점집들이 즐비했던 그 밤거리에서 어떤 운명과 미래를 찾고 있었던 걸까. 받아 주는 곳이 군대 외에는 없다는 스무 살 남짓한 새파란 젊은이의 눈을 나는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서울의 젊은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시 공부를 하고 싶다던 젊은이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요양원 사업을 거들기로 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 젊은이는 최근 커피 로스팅을 배우는 중이다. 커피숍을 창업해 보겠단다. 임용고시에 실패하고 학원 강사나 학습지 방문교사가 된 젊은이, 방송작가의 보조작가를 하는 젊은이,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 한국어교원 자격증을 따 캄보디아로 떠난 젊은이, 다시 고향으로 귀농해 버섯농사를 짓는 젊은이… 불황과 경기 침체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는 제자들의 초상이다.
대학원 진학도 취업으로 간주
날로 늘어나는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들이 ‘삼포(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로 가는 까닭을 위정자들은 대학에서만 찾고 있나 보다. 취업률이 낮은 대학부터 구조조정을 하겠다며 칼날을 세우고 있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한 편법들도 성행한다. 사학재단 산하기관이나 교내외 인턴에 졸업생을 취업시키고 6개월 후에 자른다. 졸업생 취업률은 ‘해당연도 졸업생’ 가운데 ‘4대 보험’이 되는 직장만을 지표로 삼기에 행정상 하자 없이 매년 취업률로 잡힌다. 대학원 진학도 취업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온갖 혜택을 미끼로 대학원 유치에 열을 올리고, 4대 보험이 되는 곳이라면 ‘알바’ 수준임에도 해당 기관과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졸업생들을 파견한다. 이렇게 집계된 취업률은 부풀려지기 십상이고, 열악한 비정규직의 양산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취업률이 젊은이들의 미래를 준비시켜야 할 대학 사회의 중요한 명분인 것은 맞다. 대학이 너무 많고 부실대학 또한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학이나 전공의 특성을 불문하고 취업률을 들이대 학교교육을 구조조정하려는 정부의 대증적 교육정책은 취업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못 되며 동시에 삶과 직업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예컨대 예술가들은 언제 취직이 됐다 할 수 있을까? 미래의 정치가는 국회의원 봉급을 받기 전까진 무능한 실업자에 불과한가? 봉사를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나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마친 졸업생은 실업자인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21세기형 직종과 취업현황 속에서 ‘해당연도’와 ‘4대 보험’이라는 취업기준은 적합한가? 실업계고교나 전문대학과 구별되는 대학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부산 남포동에서 만났던 부초(浮草) 같던 젊은이들, 매년 쫓기듯 대학문을 나가는 제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스럽고, 그들에게 건네는 위로조차 사치스럽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대학(大學)’이어야 한다. ‘이태백’들이 ‘삼포’로 가는 시대일수록 대학에서 가르쳐야 할 것은 진정한 경제활동의 의미와 노동의 실존적 가치 그리고 그 안에 변함없이 견지되어야 할 인문정신이다. 생산과 분배의 균형이 깨진 사회일수록 대학에서 가르쳐야 할 것은 그 원칙과 비전, 새로운 기술과 직업을 생산해낼 수 있는 지식과 패러다임이다. ‘어떻게’ 생산하고 소비하고 또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고, 변화하는 세기에 맞는 새로운 인간 존재 기반을 모색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열악한 비정규직 양산 부추겨
젊은이들이 자기가 희망하는 삶을 살고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구조화된 사회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미래다. 그렇기에 숫자놀음에 불과한 취업률의 수치적 증가보다는, 부가 적절히 재분배되며 정당한 노동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적 구조와 시스템 창출에 주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실업 대란의 책임을 대학에만 전가하고 그 해결책을 대학의 취업률 제고에서만 찾으려는 것은 정부기관과 위정자들이 스스로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제도적인 입안과 그것이 잘 실행될 수 있도록 선도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전향적’인 차기정부의 경제 및 고용정책을 기대해 본다.
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