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命/ 己 / 學/ 知/ 道/ 聖/ 賢/ 士

浩 根 書 堂 2013. 1. 16. 12:59
 

唯一命唯一生, 우리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가지고, 오직 한번뿐인 인생을 산다. 세상에 생명을 둘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天上天下에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다. 온 천하를 다 주어도 내 생명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므로 釋迦는 외쳤다.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


천지만물 중에서 나의 생명이 가장 존귀하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唯人最貴(유인최귀)라고 하였다.

인간의 自覺의 第一條는 나의 생명의 소중함과 존귀함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나의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는 自重自愛(자중자애)하고 自敬自省(자경자성)한다. 나의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自暴自棄(자포자기)하고 自虐自侮(자학자모)한다. 人間敎育의 첫째는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자각시키는 것이다.


나의 생명만이 소중한 것은 아니다. 남의 생명도 똑같이 소중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대한 先覺者 島山은 우리에게 "愛己愛他(애기애타)"의 네 글자를 강조했다. "네 생명을 사랑하는 동시에 남의 생명을 사랑하여라."


論語 十卷 二十篇 五百개의 문장의 제일 마지막은 생명의 소중함을 力說하는데서 끝난다.

"不知命 無以爲君子也"(論語 堯曰篇) - 인간의 생명의 고귀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군자가 될 수 없다. 君子는 儒敎의 이상적 人間像이다. 學問과 德行, 知性과 人格을 겸비한 사람을 君子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최고의 인격인 君子가 될 수 있는가.


儒敎는 한마디로 말하면 君子學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健全한 人格體가 되려면 어떤 智慧와 德性을 갖추어야 하는가. 그 지혜를 우리에게 明快(명쾌)하게 가르쳐주는 것이 論語와 儒敎다. 人間敎育, 德性敎育을 망각한 현대의 不具的 畸形교육을 바로잡으려면 人間敎育의 바이블인 論語를 배워야 한다. 溫故知新이다. 옛것을 배워 새로운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우리의 목숨은 어떤 목숨인가. 우리는 생명에 관하여 세가지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


첫째는 一命이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만일 인간이 열 개나 스무개의 생명을 갖는다면 인간의 생명은 그렇게 소중하지도 않고 그렇게 尊貴하지도 않을 것이다. 永遠속에 오직 한번 주어진 목숨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이 한량없이 소중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날이 언제냐. 내 생명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날이 언제냐. 내 생명이 사망하는 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내가 내 생명을 완성하는 일이다.


나는 부모의 遺體다. 내 생명을 부모가 나에게 물려주신 것이다. 나의 몸 속에는 아버지의 靈이 깃들여 있다. 나의 뼈 속에는 어머니의 魂이 숨쉬고 있다. 나의 피 속에는 조상의 얼이 흐르고 있고, 나의 생명 속에는 민족의 숨결이 간직되어 있다. 나의 몸은 나 개인의 몸인 동시에 부모의 몸이요, 조상의 생명이요, 민족공동체의 分身이요, 역사의 소중한 一部다. 우리는 이런 생명체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둘째는 天命이다.

人命在天이라고 하였다. 나의 생명은 天地神明이 나에게 부여한 사랑의 恩寵이요, 커다란 축복이다. 나는 하늘의 이들이요, 땅의 자손이다. 하늘은 나에게 시원한 바람을 주고, 태양은 밝은 빛을 주고, 땅은 풍성한 五穀百果를 주고, 강은 맑은 물을 주고, 산은 푸른 숲을 주고, 꽃은 형형색색의 美를 주고, 별은 찬란한 꿈을 주고, 초원은 시원한 향기를 준다. 우리는 天地自然이 베푸는 풍성한 양식을 먹고 오늘의 내가 되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은혜와 도움으로 살아간다. 죽으면 모두 한 줌의 흙이 되어 大地의 품안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의 道理다.


동양의 先人들은 무엇이라고 말하였던가. 順天者는 興하고 逆天者는 亡한다고 하였다.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번영하고 하늘에 거역하는 자는 패망한다.


天이란 무엇이냐. 올바른 順理요, 정당한 秩序요, 우리가 지켜야할 原則이요, 明明白白한 道理다. 天助自助者(천조자조자)라고 古人은 갈파하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스스로 도울 때 하늘이 우리를 도와준다. 敬天思想은 동양인의 精神的 支柱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正正堂堂하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


끝으로 使命이다.

사명이란 무엇이냐. 심부름 받은 생명이란 말이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늘의 심부름을 받고 태어났다. 인간은 使命的 存在다. 인간은 자기의 使命을 自覺하고 자기의 使命을 완수해야 한다. 이러한 인생관을 使命的 人生觀이라고 일컫는다.

 

孔子는 五十에 知天命(지천명)하였다고 스스로 述懷(술회)했다. 나이 50이 되어 자기가 해야 할 使命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공자는 腐敗의 亂世를 바로잡아 仁과 禮의 秩序가 바로선 正義社會를 건설하는 것이 자기의 使命이라고 생각하고 周遊天下(주유천하)하면서 救國의 길에 나섰다. 스위스의 위대한 사상가 칼힐티는 이렇게 말했다. "人間生涯의 最高의 날은 자기의 使命을 自覺하는 날이다." 내 使命을 自覺하라. 이것처럼 인생에서 중요한 命題는 없다.


인간은 자기의 使命을 발견할 때,. 人格과 生活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부지런해지고 誠實해지고 眞摯(진지)해지고 용감해진다. 이 세상에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다고 하여도 자기의 使命을 自覺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나의 生命이 나의 使命을 自覺할 때 내 存在의 革命이 일어나고 내 行動에 大革新이 생긴다.


세상에 生命과 使命의 만남처럼 중요한 만남이 없다. 내 生命은 天下에 하나밖에 없는 生命이요, 하늘이 주신 고귀한 生命이요, 하늘의 심부름을 받고 태어난 生命이다. 우리는 이러한 自覺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는 누구냐. 나는 어떤 존재냐. 나는 천하의 唯一者요, 世界의 憺者다. 이 지구상의 오직 하나밖에 없는 固有名詞的 존재다.


自然은 大宇宙요, 나는 小宇宙다. 森羅萬象이 기라성처럼 빛나는 無邊 廣大한 대우주 속에 나는 홀로 우뚝 서 있다. 나는 獨立自尊의 人格體다.


一切衆生 悉有佛性.

나의 존재 속에는 無量光과 無量力을 지니는 놀라운 불성이 깃들인다. 나는 造主 하나님이 자기 形像대로 만든 尊嚴한 被造物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 속에는 神聖不滅의 빛과 힘이 潛在한다.


영국의 文豪 섹스피어는 不朽의 名作『함레트』의 2막2장에서 이렇게 인간을 예찬한다.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가. 이성은 얼마나 고귀하고 능력은 얼마나 無限한가. 그 形像과 動作은 얼마나 명확하고 훌륭한가. 행동은 마치 天使와 같고, 理解力은 神과 같다. 세계의 美요, 萬物의 靈長이다.

西歐 近代化의 人間肯定의 힘찬 메시지다.


"天地之間 萬物之衆 唯人最貴. 所貴乎人者, 以其有五倫也"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尊貴하다. 인간이 尊貴한 까닭은 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위대한 先哲의 인간 讚美의 문장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나"라고 하는 말이요, 나의 생명, 나의 가족, 나의 조국, 나의 행복.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번 나라는 말을 쓴다. 나라는 말은 말 중에서 頻度數가 가장 높다. 왜냐, 나라고 하는 존재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아이(I)라는 말은 언제나 大文字로 쓰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漢字에는 "나"를 표시하는 말이 여러 개가 있다. 吾, 我, 自, 己.  己는 몸 기 저 기다. 인간이 앉아 있는 모양을 그린 문자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인간이 일생동안 노력해야할 最大의 課題가 무엇이냐. 萬人이 平生을 두고 힘써야 할 根本事業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열심히 갈고 닦아 나의 自我를 完成하는 일이다.

자기완성이 인간의 최고의 목표다. 自己實現이 인간의 窮極의 목표다.

 

그러므로 智慧의 위대한 스승인 孔子는 이렇게 말했다.

修己以敬

修己以安人

論語 憲問篇에 나오는 공자의 名言이다. 이 말 속에 공자사상의 核心이 깃들인다. 공자의 根本思想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修己安人이다. 수기란 무엇이냐. 나를 갈고 닦는 것이다. 나의 自我를 硏磨하고 나의 人格을 修練하는 것이다. 어떤 태도도 나를 갈고 닦아야 하느냐. 誠實하고 恭敬스러운 마음으로 해야한다. 自我를 修養하여 德을 쌓은 다음에는 성실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사람을 對해야 한다. 이것이 修己以敬이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나를 갈고 닦는데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하라. 또 하나는 修己한 연후에는 對人接物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할 때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해야한다. 修己한 다음에는 널리 平安하게 하고 民生을 安定시켜야 한다. 이것이 修己安人이다.


후세의 학자들은 安人을 治人으로 바꾸었다. 儒敎는 修己治人學이다. 내가 나를 갈고 닦는 것이 먼저다. 修己한 사람이 治人을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修己는 天下萬民의 첫째의 實踐課題다. 먼저 너 자신을 다스려라. 나를 바로 다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후세의 학자들은 修己란 말 대신에 修身이란 말을 썼다. 修己나 修身이나 꼭 같은 뜻이다.

유교의 고전인 大學에 이런 말이 있다.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經一章)

위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님에서부터 밑으로는 일반 庶民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몸을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다. 무엇이 인생의 大本이냐. 修身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임금님에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자기 자신의 自我를 修練하고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인생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道義國家를 건설하려면 모든 국민이 健全人格이 되어야 한다. 信賴社會를 만들려면 모든 백성이 信義를 지켜야 한다.


썩은 재목으로 견고한 집을 지을 수 없다. 약한 벽돌로 튼튼한 가옥을 건설할 수 없다. 修身, 표현은 간단하지만 뜻은 깊다. 수신은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自己管理다. 내가 나의 인격을 어떻게 관리하고, 나의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고, 나의 感情을 어떻게 관리하고, 나의 경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 이것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다.


수신은 Self-management요, Self-control이다. 수신을 잘하는 사람이 인생의 成功者가 되고 사회의 勝利者가 되고, 역사의 大業을 성취할 수 있다.


수신을 잘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사회의 落伍者가 되고 역사의 沒落者로 전락한다. 현대인은 수신이란 말을 거의 잊어버리다시피 되었다. 우리는 이 말의 깊은 뜻을 다시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한다.


篤實한 修身人이 되어라.

孟子는 正己를 강조한다. 正己란 무엇이냐. 내가 나를 바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正己는 올바른 自我確立이다.


宋나라의 大儒 朱子가 편찬한 名著 「近思錄」에 이런 명언이 있다.

正己爲先

내가 나를 바로 일으켜 새우는 것을 인생의 첫째 目標로 삼아라. 인생의 모든 일에는 반드시 先後本末이 있다.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이 있고, 根本되는 일과 末端에 속하는 일이 있다.


제일 먼저 할 일,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正己다. 먼저 나의 自我를 올바로 建立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優先順位의 첫째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세 가지 義務와 責任을 갖는다. 첫째는 知己다. 내가 나를 바로 아는 것이다. 나의 설자리가 어디고, 나의 할 일이 무엇이고, 나의 나아갈 進路와 目標가 무엇이고, 나의 本能이 어느 程道고, 나의 使命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델포이市에 있는 아폴로 神殿의 하얀 대리석 벽에 󰡒너 자신을 알아라󰡓그리스말로 "그노티 세아우톨(Gnothi Seauton)"이라는 말을 아로새기고 인생의 座右銘으로 삼았다. 이것은 참으로 智慧로운 일이었다.


둘째는 修己다. 내가 나의 재주와 역량을 갈고 닦는 것이다. 내가 나의 인격을 연마하고, 나의 자아를 擴充하고, 나의 德性을 키우는 일이다. 구슬은 닦아야 빛이 난다. 사람은 百鍊千磨해야만 大器晩成, 큰그릇이 될 수 있다. 天才도 無爲徒食하면 鈍才로 전락한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虛送歲月하면 無用之物로 추락하고 만다.


셋째는 成己다.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不斷한 修練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大成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쉬지 않고 걷는 자만이 山의 頂上에 도달한다. 惡戰苦鬪, 刻苦勉勵하는 사람이 인생의 대업을 성취한다.

知己와 修己와 成己. 너 자신을 알아라. 너 자신을 갈고 닦아라. 너 자신을 完成하여라.

이것이 自己에 대한 三大義務요 책임이다.


 

生卽學.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배우면서 살고 살면서 배워야 한다. 漢文字 五萬餘字 중에서 제일 좋은 글자는 배울 學 字이다. 學자는 어린이( 子  )가 책상( 冖  )에서 두 손(  臼   )으로 무엇(   爻  )인가를 學習하는 모양을 象形한 글자다.(   學     )

 
日日學 日日新. 나의 서재의 벽에 이 여섯 글자가 걸려 있다. 날마다 배워야 날마다 새로워진다. 우리는 平生敎育으로 부단히 能力開發을 하는 독실한 好學人이 되어야 한다.

 

知德이 가장 出衆했던 栗谷은 그의 명저 『擊蒙要訣』의 서문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을 아니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人生斯世 非學問 無以爲人也)"

 
無學人은 無能人이요. 無能人은 無用人이요. 배우지 않는 사람은 능력이 없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쓸모가 없다. "쓸모가 없는 사람은 죽은 존재나 다름이 없다. "라고 詩人 괴테는 말했다.

東西古今에 數十億의 책이 있지만 첫 글자가 배울 學자로서 시작하는 책은 오직 論語밖에 없다. 논어 開卷 劈頭는 이렇게 시작한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열)乎"
배우고 때를 따라 복습을 하니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논어는 공부하는 기쁨을 禮讚한 글에서부터 시작한다. 세상에 배운다는 것처럼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 없다. 學卽悅이요, 學卽樂이다. 東西洋의 古典과 名著를 읽으면 예날의 훌륭한 哲人과 뛰어난 思想家와 탁월한 학자들을 수 없이 만날 수 있다.

 

『饗宴』을 읽으면 플라톤을 만날 수 있고,

『빵세』를 읽으면 빠스깔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禪家龜鑑』을 읽으면 西山大師의 말씀에 접할 수 있고,

『唐詩選』을 읽으면 孟浩然의 名詩를 볼 수 있다.

 

고인과 만나려면 부지런히 고전을 읽어야 한다.
孔子는 千秋萬代에 빛나는 위대한 學聖이다. 人類 歷史上 最初로 學園을 創設한 것은 孔子다. 孔子는 서양 最古의 大學을 만든 플라톤보다 百三十餘年 전에 孔子학원을 創立한다. 그는 學界의 最高의 存在다. 공자는 참으로 놀라운 篤學人이었다.

 

공자는 이렇게 말씀했다.
"三人行, 必有我師焉"(論語 述而篇)
세 사람이 같이 가면 그 中에 반드시 내가 배울만한 스승이 있다.

 

부지런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勤勉을 배우고, 성실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성실을 배우고, 겸손한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의 겸손을 배웠다. 謙虛한 마음으로 누구한데서나 배웠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萬人이 나의 스승이요, 모든 사람이 나의 선생이다. 배움의 정신은 謙遜의 정신이요, 向上의 意志요, 發展의 慾求다.

 
우리는 책에서 배우고 학교에서만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自然의 품안에서 배우고, 역사의 事件에서 배우고 社會의 교실에서 배우고 人間關係의 現場에서 배우고 생활의 實踐舞臺에서 배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고자 하는 적극적 意志요, 平生敎育의 성실한 姿勢다.

 
공자의 言行을 기록한 論語에는 배울 學자가 무려 63回가 나온다. 공자가 얼마나 學을 강조했는가를 알 수 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때 온 종일 먹지도 않고, 밤새껏 자지도 않고 골똘히 思索에 잠겼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 제일이다.(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공자는 젊은 시절에 人生의 중대한 고민 때문에 온 종일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深刻한 사색에 빠져보았지만 별로 얻는 바가 없었다고 述懷(술회)했다. 不如學. 공부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力說한다. 나는 不如學이란 말이 하도 좋아서 이 세 글자를 나무에 조각하여 나의 서재에 걸어놓았다.

 
공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不恥下問"(公冶長 篇)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을 下問(하문)이라고 한다.

年上의 사람이 자기보다 年下의 사람에게 묻고 가르침을 청하는 것을 사람들은 부끄럽게 생각하여 아랫사람에게는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자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 보다 손아래 사람에게 묻는 것을 羞恥로 생각하지 말라. 모르면 年下人에게도 물어야 한다. 그래야 학문이 발전하고 진보한다. 學問은 문자그대로 배우고 묻는 것이다.

 
우리는 旺盛한 質問意識을 가지고 모르는 것을 열심히 물어야 한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問題意識이 없다는 것이요,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은 眞理追求의 意識과 意志가 약하기 때문이다.

 
논어의 公冶長 篇 에는 공자의 好學精神을 강조한 유명한 문장이 있다.
"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丘는 공자의 이름이다. 家室 數가 十戶 정도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나만큼 誠實한 사람은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만큼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없이 겸손한 공자지만 好學精神에 관한 한 나를 능가할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공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學而不厭, 誨人不倦"(述而 篇)
배우는 데 厭症(염증)을 느끼지 말고, 가르치는데 倦怠(권태)를 느끼지 말라. 誨(회)는 가르칠 회로서 敎(교)와 같은 뜻이다. 우리는 배우고 가르치는데 염증과 권태를 느끼지 않아야 한다. 不厭不倦(불염불권)의 사세로 敎學에 刻苦勤勉(각고근면) 一心專念(일심전념)하는 사람이 大家가 되고 碩學이 된다.
孟子는 공자의 이 여덟 글자를 여섯 자로 요약했다.

 
"學不厭 敎不倦"맹자의 제3권(公孫丑 章句 上)에 나오는 말이다. 학불염 교불권, 이 여섯 글자는 學生과 先生을 위한 최고의 座右銘(좌우명)이요, 行動의 길잡이다. 학교에 가면 이 여섯 글자를 강당이나 복도에 걸려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나의 著書를 남에게 선물할 때 이 글을 자주 쓴다.

 
우리는 열심히 배우고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學과 敎,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不學, 不敎 배우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 다면 결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인간은 敎學의 産物이다. 교학이 인간을 만든다. 유교의 고전인 禮記에 이런 名言이 있다.

 
"敎學爲先"(學記 篇)
우리는 무엇을 제일 먼저 해야 하느냐. 인생의 最優先 課題가 무엇이냐. 인생의 교학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제일 먼저 해야 한다. 교학은 個人의 修養을 위해서도 제일 중요하다. 국가의 통치를 위해서도 제일 중용하다. 옛날에는 敎學이란 말을 많이 썼다. 그러나 孟子가 교학이란 말 대신에 敎育이란 말을 쓴 후부터 이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孟子 盡心 篇 上)
천하의 재주 있는 젊은이를 모아서 가르치는 일이 인생의 제일 즐거운 일이라고 맹자는 갈파했다. 인간이 一生동안 努力해야 할 가장 根本的 事業이 무엇이냐.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이 무엇이냐. 敎學이다.

 
學은 나라의 소중한 보배요, 세상의 으뜸가는 財産이요, 인생의 尊貴한 光明이요, 정신의 아름다운 眞理다. 우리는 진지한 求道者의 姿勢와 情熱을 가지고 열심히 學의 門을 두드려야 한다. 學 속에 빛이 있고 喜悅이 있고 보람이 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環境에 適應하는 것이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인생의 敗北者가 되고, 사회의 열등생이 되고, 역사의 敗殘兵으로 전락한다.

우리가 사는 환경은 어떤 환경이냐. 激變激動하는 환경이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상품, 새로운 思想이 쉴새없이 噴出한다. 우리는 知識産業의 洪水시대, 情報産業의 爆發세댕 살고 있다.

 


격동 격변하는 환경에 能動的 적응을 하려면 왕성한 精神力과 知識慾을 가지고 부단히 배워야 한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처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없다. 우리는 高度學習社會의 고도학습인이 되어야 한다. 나는 學生이라는 말을 무척 좋아한다. 학생이란 무엇이냐. 배우는 生命, 배우는 인생, 배우는 생활, 배우는 生涯란 뜻이다. 우리는 학생의 정신을 가지고 부단히 刻苦勉勵하고 奮鬪努力해야 한다.
왜 배우느냐. 學의 目的이 무엇이냐. 學의 目的은 知다. 우리는 알기 위해서 배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알고자 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名著 「形而上學」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知識慾은 모든 人間의 근본적 慾求다. 지식욕에서 好奇心과 探究精神과 眞理追求의 의지가 발동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지식은 사화발전의 원동력이요, 文化創造의 母胎다.

 


영국 근대 經驗論 철학의 始祖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Knowledge is power, Scientia est potentia"

"知識의 量은 힘의 양과 一致한다."라고 외쳤다. 知는 힘의 어머니요, 힘은 知의 아들이다. 多識은 多力이요, 少識은 少力이요, 無識은 無力이다. 지식과 힘은 서로 比例한다. 우리는 과학과 技術의 지식을 가지고 자동차를 만들고 전기를 발명하고, 컴퓨터를 제작하여 인간의 利用厚生의 편리한 도구로 이용한다.

 


孔子의 언행을 기록한 論語의 첫 文章은 學과 知에서부터 시작한다. 첫 문장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요 둘째 문장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다. 慍은 성낼 온 字다. 사람들이 나의 人格과 재능과 實力을 認定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불평을 하거나 憤怒를 느끼기 쉽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불평을 하지 않고, 너그럽고 평온한 마음으로 泰然自若하게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君子가 아니겠는가.

 


君子는 知德을 兼備한 훌륭한 인격이다. 군자는 儒敎의 理想的 人間像이다. 논어의 이 첫문장에는 乎자가 세 번 나온다. 그러므로 ‘三乎"라고 일컫는다.
논어의 제일 마지막 문장은 三知로 끝난다. 공자는 세가지의 知를 강조했다.

"子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자기의 尊嚴性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 자기 인생의 高貴한 使命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훌륭한 군자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는 知命人이 되어야 한다.

"不知禮, 無以立也"

禮를 알지 못하면 사회에서 존립할 수가 없다. 禮는 인간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등뼈와 같은 역할을 한다. 禮는 人間의 大本이요, 사회의 根幹이다.無禮한 인간은 사회에서 설 땅이 없다. 禮節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基本敎養에 속한다.

"不知言, 無以知人也"(堯曰篇)

그 사람을 바로 알지 못하면 그 사람과 좋은 人間關係를 맺을 수 없고, 그 사람을 바로 쓸 수도 없다. 그 사람을 바로 알려면 그 사람의 말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깊은 理解心이야말로 對人關係에서 가장 중요하다.
논어는 知에서 시작하여 知로 끝난다. 知는 논어의 알파인 동시에 오메가다. 논어에는 知라는 글자가 99回가 나온다. 공자가 얼마나 知를 강조했는가를 알 수 있다.
공자는 세가지의 德을 갖추어야 한다. 知와 仁과 勇의 三德을 겸비할 때 군자라고 할 수 있다. 智仁勇은 人格을 구성하는 三大 核心原理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子曰 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子罕篇)

知者不惑. 지자는 惑이 없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智慧가 있는 사람은 인생의 道理를 바로 알므로 언제 어디서 어떤 문제에 부닥쳐도 당황하거나 흔들리거나 迷惑하지 않는다.


知는 인생의 광명이요, 無知는 인생의 暗黑이다. 나의 할 일이 무엇이고, 해서는 안될 일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 지혜다. 지혜는 슬기롭고 聰明한 것이다. 事物의 大小輕重과 先後本末과 善惡正邪와 是非曲直을 바로 분별하는 밝은 事理 判斷力이다. 지혜는 참과 거짓을 분간하는 능력이다.


仁者不憂. 인자는 근심 걱정이 없다. 어질고 仁慈한 사람은 私利私慾을 버리고 天道와 天理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없다. 仁은 따뜻한 마음이요, 넓은 包容力이요, 사람을 感化시키는 힘이다. 그러므로 孟子는 "仁者無敵"이라고 말했다. 인자에게는 敵이 없다.


勇者不懼.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용기 있는 사람은 의지력이 강하고 決斷力이 있기 때문에 마음 속에 무서운 것이 없다. 용기는 果敢한 斷行力이요, 鞏固(공고)한 實踐力이다.


"見義不爲, 無勇也"라고 공자는 갈파했다.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옳은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의 利益에 사로잡혀서, 또는 자기 一身의 保身策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용기는 決斷하는 意志力이다. 智仁勇의 三德을 兼備하는 자가 가장 바람직한 인간이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爲政篇)

지지위지지, 불지위불지, 시지야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정말 아는 것이다. 공자의 名言이다.

 

아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왕왕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정말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또 모르면서도 體面上 안다고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知的 正直性은 대단히 중요하다.



"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季氏篇)

인간의 天性과 能力에는 差等이 있다. 모두가 같을 수가 없다. 공자는 學과 知를 基準으로 인간을 네가지의 段階로 나누었다. 첫째는 태어나면서부터 道德을아는 사람이다. 이것이 最上級이다. 生而知之者다. 聖人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배워서 아는 사람이다. 이것이 學而知之者이다. 셋째는 처음에는 배우려고 하지 않다가 나중에 困境에 빠져서 배우는 사람이 있다. 넷째는 곤경에 빠졌는데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最下位다. 공자의 이 유명한 문장에서 生知人, 學知人, 困學困知人 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인간의 知에는 善惡과 高下의 차별이 있다. 知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나쁜 知가 얼마나 많은가. 奸智(奸邪스러운 知), 狡知(狡猾한 知), 邪知(邪惡한 知)는 모두 악한 知다. 高等知能犯은 이 부류에 속한다. 그것은 病든 知요, 타락한 知요, 惡魔의 知다.

 


우리는 善한 知, 높은 知, 깊은 知를 추구해야 한다. 英知(英敏한 지혜), 上知(뛰어난 지혜), 明智(총명한 지혜), 孟子가 강조한 良知(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탁월한 지혜), 叡智(道理를 洞察하는 슬기로운 지혜), 靈知(神靈한 지혜), 全知(완전무결한 지혜)는 가장 으뜸가는 知다. 우리는 이러한 知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愛知人,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知의 세계는 바다와 같이 넓다. 그러므로 學海라고 한다. 산과 같이 깊다. 그래서 學林이라고 한다.

 


우리는 敬虔한 마음과 謙遜한 정신을 가지고 學과 知의 세계를 꾸준히 탐구해야 한다.
이것이 學問하는 者의 姿勢다.

 

 

 

 

生卽道(생즉도).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이다. 吾行吾道(오행오도). 나는 나의 길을 가고. 汝行汝道(여행여도). 너는 너의 길을 가야 한다. 道는 東洋思想의 中心槪念의 하나다. 인간의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形而下學的(형이하학적)인 길이요, 또 하나는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인 길이다.


전자는 우리가 날마다 걸어 다니는 物理的인 길이다. 서울로 가는 길, 고향으로 가는 길 이것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이다. visible way다. 이 길을 가는 것은 쉽다. 이 길은 易(이)인 行道다. 후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길이다. invisible way다. 이것은 道德的인 길이요, 倫理的인 길이다.


사람이 사람노릇을 바로 하고 인간이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반드시 實踐해야할 規範的(규범적), 當爲的(당위적)인 길이다. 이 길은 가기 힘들다. 이 길은 克己를 요구하는 苦行道(고행도)요, 修養이 필요한 難行道(난행도)다.


스승에는 師道가 있다.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드물다. 남의 스승이 되려면 제자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비열한 行動을 하지 않아야 하고, 言行이 一致해야 하고, 淸廉(청렴)한 良心을 가져야 하고, 天職思想을 가지고 교육에 心血을 기울이고 精誠을 쏟아야 한다. 선생이 되기는 쉬워도 스승이 되기는 어렵다.


어머니에게는 婦道가 있고, 공무원에게는 吏道가 있고, 무사에게는 武士道가 있고, 紳士에게는 紳士道가 있고, 선비에게는 선비道가 있다.


萬物有道(만물유도).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다 道가 있다. 장사에는 商道가 있고, 바둑에는 碁가 있고, 검술에는 劍道가 있고, 王에는 王道가 있고, 예술에는 藝道가 있고, 차에는 茶道가 있다.


道는 高次元의 世界요, 精神의 높은 境地다. 道는 참된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요, 眞摯(진지)한 것이요, 엄숙한 것이요, 高貴한 것이요, 誠實한 것이다. 무릇 道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오랫동안 뼈를 깎는 고된 노력이 필요하고, 百鍊千磨(백련천마)의 정성된 修練을 쌓아야 한다.


孔子와 소크라테스는 東西古今에 가장 뛰어난 敎育者의 雙璧(쌍벽)이다. 이 두 분의 스승은 千秋萬代에 빛나는 敬虔(경건)한 求道者였다.

기원전 399年 봄 70세의 老哲人 소크라테스는 500명의 아테네 市民들에 의해서 死刑宣告를 받았다. 그는 아테네의 法廷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떠날 때는 왔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한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간다. 누구가 더 幸福할 것이냐. 오직 神만이 안다."


그는 아테네 감옥에서 泰然自若(태연자약)하게 毒杯(독배)를 마시고 죽으면서 사랑하는 제자 크리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사는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人生을 바로 살아야 한다. 正과 義는 사람이 가야할 길이다. ‘바로" 이 두 글자가 가장 중요하다. 正生道, 우리는 인생을 바로 살아야 한다. 殺人犯이 되고, 强姦犯이 되고, 賣國奴가 되고, 悖倫兒(패륜아)가 되고, 亡種이 되어 七八十年을 산들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가치가 있으랴. 그것은 虛妄(허망)한 生이요, 邪惡(사악)한 삶이다.


나는 1962年 여름과 1982年 正月에 아테네에 들러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은 유명한 감옥을 두 번 찾아가 보았다. 이 감옥에서 二千三百여년 전에 70세의 老哲學人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비극적인 죽음의 막을 내렸는가. 소크라테스는 살았을 때도 위대했지만 죽을 때에 더욱 위대했다. "나에게는 죽음의 恐怖가 없다"라고 말하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從容(종용)한 姿勢로 독배를 마셨다.

나는 한참동안 그 감옥 앞을 혼자 徘徊(배회)하면서 感慨無量(감개무량)한 心情에 젖었다. 위대한 求道者 소크라테스는 哲人답게 살고 哲人답게 죽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魂을 가졌다.


"子曰 朝楣夕死可矣"


論語 里仁篇에 있는 이 짤막한 문장은 공자의 熱烈(열렬)한 求道的 精神을 가장 잘 나타낸다. 아침에 眞理의 말씀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아무 恨이 없겠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인생의 목적이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實踐하는데 있다.

 


生의 意味가 무엇이냐. 진리에 同參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의 祭壇 앞에 敬虔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우리는 어떤 人生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공자는 簡潔明快(간결명쾌)하게 다음 열두자로 요약했다.


우리는 먼저 道에 뜻을 두어야 한다. 眞理의 추구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德을 닦고 德을 인생의 精神的 支柱로 삼아야 한다. 德의 근본은 仁이기 때문에 언제나 仁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 끝으로 마음과 생활의 여유를 갖기 위하여 藝術을 사랑하고 藝術을 즐겨야 한다. 道와 德과 仁과 藝. 이것이 공자의 인생관의 핵심이다.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문장 속에 공자의 사상의 根本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一生一路, 一生一道. 사람은 한가지 原理, 한가지 信條를 가지고 始終一貫 꾸준히 한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大成의 길이다. 다음 문장은 공자의 人生觀의 근본을 明示한다.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里仁篇)

공자의 제자들이 道德의 문제를 논할 때 공자는 首弟子인 曾子에게 이렇게 말했다. "증자여, 나의 길, 나의 思想은 한가지 원리로 一貫되어 있다." 증자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공자가 그 자리를 떠난 뒤에 그 말의 뜻을 잘 몰랐던 제자들이 증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증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의 道는 忠恕(충서)다" 漢字의 一貫이란 말은 공자의 一以貫之(일이관지)란 말에서 나왔다.


공자사상의 근본을 한 단어로 要約하면 忠恕다. 忠恕란 무엇이냐. 忠은 中과 心이 합한 글자다. 마음 중심에 거짓이 없고 참된 것이다. 忠은 忠誠 충이요, 곧을 충이요, 眞心다할 충이요, 정성껏 할 충이다. 恕는 용서할 서요, 동정할 서요, 어질 서요, 헤아릴 서다. 忠恕는 忠誠스럽고 어진 것이다. 참되고 정성스러운 것이다. 忠恕는 참과 정성이다. 忠恕는 곧 仁이다.


仁의 내용이 忠恕다. 공자의 道의 屬性을 간단명료하게 지적한 것은 孟子다.


人間의 道는 결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다. 卑近(비근)한 日常生活 속에 있다. 길은 가까운데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道를 먼데서 찾고 高遠한데서 구하려고 한다.


道在爾. 而求諸遠(孟子)

爾는 가까울 이 字다. 우리는 眞理를 먼데서 찾지 말고 가까운데서 찾아야 한다.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眞理를 찾아야 한다. 漢文에 平常心是道란 말이 있다. 道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평상시의 마음가짐에 있다.


아버지가 되었으면 아버지 구실을 잘하고, 아들이 되었으면 아들 노릇을 잘하고, 날마다 자기가 맡은 義務와 責任을 완수하면서, 信用을 지키고, 親和力을 가지고 여러 사람과 和睦한 人間關係를 이루고, 市民구실, 國民구실, 世界人구실을 잘하면서 人間된 道理를 다하면 그것이 곧 道다. 道는 그런 것을 떠나서 먼데 있는 것이 아니다. 道在爾(도재이), 길은 가까운데 있다. 우리는 日常的인 實踐的 行動에서 도를 찾아야 한다. 生卽道, 우리는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가야 한다. 이것이 生의 意味다.


 

 

 

職業과 역할을 基準으로 인간은 士農工商의 네 階層으로 나누어진다.


才德과 器量과 人格을 기준으로 인간을 나누면 聖賢士民의 네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聖人과 賢人과 선비와 백성이다.


聖(holy, sacred, saint)은 인간 最高의 경지다.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다.

貪瞋痴(탐진치)의 三毒으로 신음하는 모든 衆生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智慧와 慈悲의 덕을 몸소 실천한 釋迦, 悖倫과 無法에 빠진 亂世에 王道와 德政으로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天下를 周遊한 孔子, 享樂과 傲慢에 사로잡힌 아테네 시민들에게 勇氣와 正義의 덕을 率先垂範한 소크라테스, 죄악과 貪慾에 물들어 고생하는 민중에게 사랑과 永生의 福音을 전한 그리스도(순서는 年齡順이다.)는 千秋萬代에 우러러 볼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요, 日月과 더불어 不滅의 빛을 發하는 슈퍼스타요, 역사의 神이 우리에게 派送한 위대한 使徒요, 하나님의 놀라운 特製이다.


四聖의 위대한 人格과 정신은 우리에게 큰 빛을 던지고 그들의 진리의 말씀과 實踐은 우리에게 강한 힘이 되어, 일류는 오늘날 이만한 정도의 文化 수준에 도달했다. 四聖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愚衆과 賤民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聖人百世之師也(孟子 盡心篇)

성인은 백세의 스승이라고 갈파한 孟子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聖 字의 구조는 意味深長하다. 耳와 口와 王의 合字다. 성인은 백성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다. 성인은 마음의 귀를 가지고 민중의 소리를 듣고, 역사의 소리를 듣고, 良心의 소리를 듣고, 영혼의 소리를 듣고, 智慧의 소리를 듣고, 하늘의 소리를 듣고, 神의 音聲을 듣는다.

 


일찍이 智慧의 道師였던 莊子는 聽無聲이라고 말했다. 무성을 들어라.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라. 옅은 소리는 소리가 있고 깊은 소리는 소리가 없다. 우리는 無聲의 깊은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인은 천하의 목소리를 조용히 傾聽한 후에 입을 열어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은 깊은 智慧와 良識의 소리요, 우리의 心琴을 울리는 感動과 喜悅의 메시지요, 역사의 進路를 밝히는 光明과 洞察의 음성이 있다.

성인의 말씀은 天下의 法이 되고 萬代의 名言이 된다. 百姓의 소리를 널리 듣고(耳) 옳은 말씀을 하는데(口) 가장 으뜸 가는 자(王), 그것이 聖人이다. 聖은 listening과 speaking의 number one man이다.


漢字는 지금부터 三千五百年前 殷나라때에 만들어졌다. 耳와 口와 王의 세 글자를 결합하여 聖 字를 만든 것은 참으로 놀라운 卓見이다. 聖 字는 漢字의 傑作品이다.


무슨 일이나 聖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다. 書藝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書聖 王羲之, 음악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樂聖 베토벤, 詩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詩聖 李太白, 醫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醫聖 히포크라테스, 바둑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棋聖, 그림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두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聖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百鍊千磨의 노력과 刻苦勉勵의 훈련과 千辛萬苦의 공부와, 惡戰苦鬪의 피땀을 흘려야 한다. 榮光은 苦難에 비례한다. 價値는 勞苦의 産物이다. 勝利는 臥薪嘗膽의 결과다.

性理學의 創始者인 北宋의 巨儒 周濂溪의 글에 이런 名言이 있다.


"聖人의 理想이 무엇이냐. 聖人은 하늘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하늘처럼 크고, 하늘처럼 높고, 하늘처럼 넓고, 하늘처럼 맑기를 바란다."


聖人다음 가는 사람이 賢人이다. 현인의 이상이 무엇이냐. 賢人은 聖人처럼 되기를 원한다. 賢人다음에 가는 사람이 선비이다. 선비의 이상이 무엇이냐. 선비는 현인처럼 되기를 원한다.


日日步步登高. 날마다 쉬지 않고 한 발짝 한 발짝 높이 올라갈 때 頂上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 人間修養은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漸進的 努力의 부단한 蓄積이 놀라운 大成을 가져온다. 千里길도 발밑의 한 발짝에서부터 시작한다. 처마 밑에서 쉬임 없이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이 견고한 바위에 큰 구멍을 뚫는다. 落滴穿石이다.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 道家의 達人인 莊子는 성인의 특색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莊子 內篇 道遙游)



유교의 理想的 人間像은 聖人이다. 유교를 비판한 道敎는 성인이란 말 대신에 至人, 眞人, 神人이란 말을 많이 썼다. 이것이 道家의 이상적 인간상이다. 至人이란 무엇이냐. 至極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道德의 極致에 이른 人物이다.

 


至人 無己, 즉 自己라는 것이 없다. 지인은 天地自然과 동화했기 때문에 私利私慾이 없고, 利己心에서 벗어났고 에고이즘에서 떠났다. 지인은 사심과 사욕을 초월한 사람이다. ‘나"라고 하는 조그만 自我, 자기라고 하는 矮小한 存在의 低俗한한 慾望에서 解脫한 사람이다.

 


神人無功, 신인은 공이 없다. 神과 같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많은 일을 하여 큰공을 쌓아도 그 공을 남 앞에 내세우지 않는다.

 


聖人無名, 성인은 명이 없다. 성인은 아무리 큰 功績을 쌓아도 그 名譽를 탐내지 않는다. 그는 功과 名을 超越한 사람이다. 성인은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無己, 無功, 無名. 자기의 存在와 功과 名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성인의 境地요, 至人의 자리요, 神人의 境界다.

 


九度壯元公. 크고 작은 아홉 번의 科擧시험에 언제나 壯元及第를 한 朝鮮朝 第一의 天才인 栗谷 선생은 20세가 되었을 때 「自警文」을 썼다. 자경문은 自己鞭撻(자기편달),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율곡의 자경문은 四六三 字 밖에 안 되는 짧은 글이다. 그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먼저 모름지기 그 뜻을 크게 가져 聖人이 되는 것을 準則과 목표로 삼아라. 터럭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할 일은 끝난 것이 아니다.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율곡은 20세가 되었을 때 성인이 되는 것을 자기 인생의 目標로 정했다. 秋毫(추호)라도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나의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얼마나 壯한 뜻이냐. 얼마나 遠大한 理想이냐.

나는 東西古今의 여러 立志傳을 즐겨 읽었지만, 弱冠 20세의 젊은 나이에 성인이 되겠다는 壯大한 꿈과 抱負를 가진 청년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

 


과연 師任堂의 아들이다. 그는 4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遠大한 目標를 향해서 邁進했다.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요, 그 아들의 그 어머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율곡 선생의 자경문을 꼭 한번 읽고 큰 꿈과 큰 뜻을 세우기를 바란다.
 
 


聖希天, 賢希聖. 士希賢.


"聖人은 하늘과 같이 되기를 바라고 賢人은 성인과 같이 되기를 바라고 선비(士)는 賢人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이 名言을 道學(性理學)의 巨星인 周濂溪(주렴계)의 名著 "通說"에 나오는 말이다.

聖과 賢과 士는 인간의 知와 德의 段階를 나타내는 말이다. 人格의 水準의 高下를 표현한 것이다.

賢은 어질 현 字다. 세상에 지식이 많은 사람은 허다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博學多識의 학자는 수두룩하지만 인간의 올바른 道理를 알고 至德을 兼備한 賢人은 매우 적다. 學者와 賢人은 정신의 次元이 다르다. 先進國에서 ?世界賢人會議?가 해마다 열리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賢明은 문자 그대로 어질고 聰明한 것이요, 슬기롭고 智慧가 많은 것이요, 明哲한 事理判斷力이 있는 것이다.


賢明과 聰明은 같은 것이다. 귀가 맑은 것을 聰이요, 눈이 밝은 것을 明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언제나 賢人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孔子는 이렇게 말했다.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論語 里仁篇에 나오는 말이다. 자기보다 뛰어난 현인을 보면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그 사람과 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齊는 같을 제 字요, 다스릴 제 字다. 不賢人,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自己反省의 재료로 삼아야 한다.


그런 마음의 姿勢를 가지면 賢人은 언제나 우리의 스승이요, 不賢人도 우리의 스승이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萬人이 다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는 "三人行 必有我師焉"(論語 述而篇)이라고 갈파했다. 세 사람이 같이 가면, 三人이 같이 행동을 하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내가 배울만한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한데서나 배우고자하는 謙遜한 姿勢다.


집이 가난하여 초등학교 1學年 밖에 다니지 못한 獨學自習의 勉學者 링컨은 이런 座右銘을 만들고 누구한데서나 배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敎育의 機會로 삼아라." 참으로 본받을 만한 정신자세다. 世界化 시대에 살아야 하는 우리는 平生敎育으로 부단히 자기를 개발하는 근면한 學習人이 되어야 한다.

道敎의 大師인 莊子는 이렇게 말했다.


賢士尙志(莊子 外篇 刻意)

현명한 선비는 뜻을 崇尙한다. 우리가 참으로 숭상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뜻이다. 志란 무엇이냐. 인생의 높은 理想이요, 遠大한 목표다. 우리는 높은 뜻을 세우고 살아야 한다. 이상이 없는 생활은 虛妄하고 무의미하다. 하루세끼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자면서 無爲徒食, 虛送歲月로 無事安逸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이이다.


이것은 人間다운 生이 아니다. 人生劈頭에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올바른 뜻을 세우는 것이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晝夜로 奮鬪努力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立志, 올바른 뜻을 세워야 한다. 그 다음에는 養志, 뜻이 무너지지 않도록 부단히 營養素를 공급하면서 强化하는 것이요, 셋째는 마침내 뜻을 成就하는 것이다. 우리는 成就社會에 成就人이 되어야 한다. 산다는 것은 성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에 神이 우리에게 던지는 엄숙한 質問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남겨 놓고 갑니까. 당신은 六七十년의 生涯를 살면서 무엇을 성취하였습니까."

인생은 空手來空手去가 아니다. 올 때에는 빈손으로 왔지만 갈 때에는 무엇인가 남겨놓고 가야 한다. 괜히 왔다 괜히 가는 人生이 아니다. 우리 역사의 한 모퉁이에 내가 왔던 흔적을 남기고 가야 한다. 우리 사회의 한구석에 내가 성취한 업적을 남겨놓고 가야 한다.


현인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의 교수요, 미국인에게 많은 꿈과 용기를 심어준 生活詩人 롱페로우(Longfellow)는 이렇게 말했다.


"聖人과 책상을 사이에 놓고 一對一의 對話를 나눈 것은 十年間에 걸친 讀書와 工夫보다 더 중요하다."

賢人과의 깊은 말씀은 우리에게 精神的 開眼을 가져온다. 나의 정신의 눈을 새로 뜨게 한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고 깨닫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한다.


현인과의 깊은 대화는 淸新한 精神的 靈感을 불러일으킨다. 나라의 君主가 훌륭한 賢臣을 만나느냐, 간교한 小人을 만나느냐에 따라 나라의 興亡盛衰가 좌우된다.

위대한 忠臣 諸葛孔明은 國家存亡의 危機에 봉착한 劉玄德에게 이렇게 말했다.


"前漢이 흥한 것은 그 당시의 군주가 賢臣을 가까이 하고 小人을 멀리 하였기 때문이요, 後漢이 衰亡한 것은 小人을 가까이 하고 賢臣을 멀리 하였기 때문입니다."

(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  諸葛孔明 ?前出師表?)


군주가 교활한 아첨輩나 姦邪한 소인의 무리에 둘러 쌓이면 나라는 반드시 쇠망한다. 이것은 東西古今의 역사가 명백히 증명하는 진리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하다, 중요하다 하여도 올바른 事理判斷을 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없다.


올바른 판단에서 올바른 행동이 나오고, 올바른 행동에서 올바른 結果가 나오고, 올바른 결과에서 繁榮과 成功이 到來한다.

잘못된 판단에서 잘못된 행동이 나오고, 잘못된 행동에서 잘못된 결과가 생기고, 잘못된 결과에서 나라의 衰亡과 실패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일의 大小事를 막론하고 올바른 事理判斷이 가장 중요하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先後本末,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 根本되는 것과 末端에 속하는 일이 있다. 또 일의 公私를 막론하고 大小輕重, 큰일과 작은 일, 가벼운 일과 중요한 일이 있다.


또 세상의 모든 일에는 善惡正邪가 있다. 선한 일과 악한 일, 옳은 일과 틀린 일이 있다. 그것을 바로 판단하는 능력이 賢明이요, 智慧요, 明哲이요, 슬기다. 영어의 Wisdom이요, 독일어의 Weisheit요, 프랑스 말의 sagesse요, 그리스말의 Sophia요, 라틴말의 Sapientia다. 賢明과 지혜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德目이다. 孔子가 지혜를 人間의 三德의 하나로 보았고, 소크라테스가 四元德의 하나로 보았고, 기독교에서 으뜸가는 德으로 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현명한 인간, 지혜로운 국민이 되어야 한다. 賢明人이 되려면 먼저 私利私慾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한다. 사리사욕은 우리의 判斷力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항상 理性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良心의 命令에 따라야 한다. 이성의 소리는 안 듣고, 그 양심의 명령에 거역하면 非理와 不正을 낳는다. 우리는 언제나 原理原則을 지키고 順理를 正道를 밟아야 한다. 원리원칙을 짓밟고 순리를 무시하고 正道를 가지 아니하면 반드시 腐敗와 不幸을 초래한다.


우리는 我執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고 獨善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偏見에 휩쓸리지 않아야 하고 我慾에 눈이 멀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賢明人이 될 수 있다.


 

 

 

 

옛날에는 士農工商의 四民이 있었다. 士民, 農民, 工民, 商民이다. 四民 중에서 첫째가는 身分이 士民이요, 선비였다.


士는 선비 士요, 벼슬 士다. 선비는 그 당시의 社會的 中樞階層이었다. 學問과 德行이 뛰어나고, 思言行이 모든 백성의 模範이 되었다.


세계의 여러 文明圈마다 본보기가 되는 階層이 있다. 서양에서는 젠틀맨, 紳士계급이 그 역할을 담당했고, 印度文明圈에서는 바라몬 계급이 그 기능을 수행했고, 東洋의 儒敎文化圈에서는 선비가 그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역사의 앞장에 서서 사회를 끌고 가는 나라의 당당한 牽引車요, 국민을 올바로 領導하는 튼튼한 精神的 支柱였다.


士尙志. 선비는 뜻을 崇尙했다. 선비는 聖賢이 되겠다는 크고 높은 이상을 품고 부단히 자기의 정신을 갈고 닦으면서 人格修養에 一路邁進했다. 뜻 志字는 意味深長한 글자다. 士와 心이 합한 글자다. 뜻이란 무엇이냐. 선비의 마음이다. 遠大한 抱負와 커다란 목표를 세우고 誠實하게 살아가는 용감한 사람을 우리는 志士라고 일컫는다. 志士는 精神姿勢와 人格의 度量과 道德的 力量이 뛰어났다. 그는 지도자의 資質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선비는 세 가지의 자격을 지녀야 한다. 첫째는 士氣가 왕성해야 하고, 둘째는 士節이 견고해야 하고, 셋째는 士魂이 투철해야 한다.


(1) 士氣란 무엇이냐. 선비가 마땅히 갖추어야할 씩씩한 기운이요, 용감한 정신이다. 선비는 孟子가 강조한 浩然之氣를 가져야 한다.



見義不爲 無勇也(論語 爲政篇)


孔子의 名言이다. 義를 보고도 行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선비는 먼저 大勇人이 되고, 眞勇人이 되어야 한다. 용기가 없으면 善인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惡인줄 알면서도 악을 행한다.


세상에 勇氣의 培養과 鍊磨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스스로 돌이켜 보고 나의 행동이 옳다고 믿으면 비록 千萬人이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孟子 公孫丑 上, 縮은 곧을 축(直)자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얼마나 힘차고 용감한 말이냐. 이 말은 공자의 首弟子의 한사람인 曾子가 공자에게 「선생님, 용기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말이다. 힘은 용기에서 생기고, 용기는 正義感에서 우러나온다. 義氣에서 噴出하는 용기가 진정한 용기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 정의감을 키워라.



(2) 선비는 堅固한 士節을 가져야 한다. 士節이란 무엇이냐. 선비의 굳은 節槪와 변치 않는 志操다. 선비는 言行이 一致해야 한다.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절개는 信義를 確守하는 것이요, 옳은 일을 지키어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다. 지조는 一片丹心. 始終如一. 꿋꿋한 의지를 가지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士節의 반대는 變節이요, 背信이요, 不義요, 破廉恥다.


조선조 五一九年 동안의 많은 선비 중에서 가장 지조와 節槪가 강했던 義人으로서 나는 死六臣의 한사람인 成三問을 들고 싶다. 世祖가 端宗의 王位를 簒奪(찬탈)하였을 때 목숨을 걸고 가장 용감하게 항거하다가 무참하게 慘殺을 당한 것이 성삼문이었다. 그의 時調는 우리의 心琴을 울린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蓬萊山 第一峰에 落落長松 되었다가

白雪이 滿乾坤할 때 獨也靑靑하리라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어 모든 花草가 다 시들어 죽더라도 나는 독야청청, 홀로 언제까지나 푸르고 싱싱한 常綠樹가 되고 싶다. 선비는 인간 常綠樹다. 이것이 선비의 늠름한 氣像이요, 鐵石같은 志操다.


成三問의 雅號는 梅竹軒이다. 梅花와 참대는 혹독한 嚴冬雪寒에도 싱싱하게 푸른빛을 자랑한다.

선비의 용감한 氣像을 簡潔明快하게 표현한 것은 論語 泰伯篇에 나오는 증자의 말이다.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선비는 度量이 크고 마음이 넓어야 한다. 意志는 굳고 정신은 강해야 한다. 任重道遠,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仁의 實現을 나의 使命으로 삼으니, 그 책임은 또한 무겁지 아니하랴. 죽을 때까지 나의 사명을 다해야 하니 그 길은 또한 멀지 아니하랴.


선비의 責任이 중대하고 사명이 莫重함을 강조한 명언이다. 선비는 남자중의 남자요, 인간중의 인간이다. 弘毅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과 鐵石과 같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선비가 될 수 있다.



(3) 선비는 투철한 士魂을 가져야 한다.


선비는 선비의 魂이 있다. 선비의 혼이 무엇이냐. 道義의 精神이요, 光明正大의 정신, 빛나고 밝고 옳고 큰마음, 이것이 선비정신이다. 天地神明 앞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마음, 이것이 선비의 마음이다. 淸廉潔白, 忠義勇敢은 선비의 인품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見利思義 見危授命(論語 憲問篇)


利를 보면 義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던져야 한다.


사람은 利益이나 財物 앞에는 마음이 흔들리기 쉽다. 利나 재물을 보았을 때 이것이 正義에 어긋나지 않는가, 올바른 道理에 맞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危險에 부닥치면 무서워서 도망을 치기 쉽다. 그러나 國家存亡의 危機에 처했을 때 용감하게 목숨을 던져야 한다. 이것이 선비의 당연한 道理다. 공자의 이 말씀은 선비를 위한 金科玉條다. 輕利重義, 利를 가볍게 여기고 義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선비의 道理요, 行動原則이다.


서울 南山공원에 가면 安重根 義士를 崇慕하는 記念館이 있다. 그 기념관 앞에 공자의 이 말을 큰 바위에 새긴 우람한 石碑가 서 있다. 安 義士가 旅順 감옥에서 處刑되기 전에 쓴 글씨다. 그 글씨에는 安 義士의 힘이 약동하고 있다.



선비는 나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나를 기뻐 해주는 자를 위하여 容色을 아름답게 가꾼다. (士爲知己者死, 女爲說己者容)


史記에 나오는 말이다. 不惜身命, 선비는 나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신명을 아낌없이 바친다. 선비는 殺身成仁한다. 儒敎가 韓國人에게 공헌한 가장 큰 業績과 價値가 무엇이냐. 선비道다. 한국의 역사에는 선비의 정신이 連綿一貫, 맥맥히 흐르고 있다. 圃隱 鄭夢周의 一片丹心의 忠誠, 死六臣의 늠름한 義烈精神, 道義정치를 실현하려고 용감매진했던 靜庵 趙光祖, 三學士의 高節, 國家存亡의 위기를 당하여 誓海盟山했던 忠武公의 愛國心, 茶山 丁若鏞의 誠忠을 다한 牧民정신, 衛正斥邪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많은 義兵들, 李儁 烈士의 殉國, 退溪의 好學과 栗谷의 經綸, 島山의 民族魂, 白凡의 義氣, 安義士의 殉國, 尹奉吉 義士의 義擧, 모두 유교의 선비정신의 용감한 發露요 선비道의 實踐이요, 韓國魂의 爆發이다.


조선조가 壬亂의 危機와 丙子胡亂의 二大國難을 당하면서도 五一九년 동안 당당하게 國脈을 이어온 것은 선비道가 있었기 때문이다.

 

 

 

 

"天下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다. 천하사람의 천하다."


"天下非一人之天下, 乃天下之天下也"


중국의 古典인 六韜三略에 나오는 名言이다. 六韜는 周나라의 賢人인 太公望 呂尙이 지은 兵法書라고 傳해지지만 後世의 僞作이라는 說이 많다. 韜는 감출(臧) 도 자로서 秘訣을 의미한다. 文·武·龍·虎·豹·犬의 여섯 편으로 되어 있다. 政治와 兵法에 관한 비결을 말한 책이다. 三略은 漢代에 黃石公이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眞僞가 의심스럽다. 上略·中略·下略의 三略으로서 政略과 軍略에 관한 것이다.


天下는 君主 한 사람의 天下가 아니다. 天下萬民의 것이요, 國民全體의 것이다. 군주가 나라의 主人이 아니다. 國民과 百姓이 나라의 주인이다. 그래서 民主政治는 民主社會다.

統治者가 一人獨裁하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舊蘇聯처럼 勞農이 一黨獨裁하면 국가는 멸망한다. 이것은 世界史가 우리에게 가르친 틀림없는 經驗的 眞理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最古의 古典인 書經은 이렇게 갈파했다.


"民惟邦本 本固邦寧(민유방본 본고방녕)"


邦은 나라 방 자이다. 국민이 나라의 근본이요, 국가의 主體다. 국민이 견고하면 국가는 편안하고 泰平하다. 이 문장 앞에 이런 글이 있다.



"군주는 백성과 親近해야 하고, 백성을 蔑視해서는 안 된다.(民可近 不可下)"

천하는 一人之天下가 아니고, 天下 사람의 천하다. 簡潔明快한 眞理다. 爲政者들은 이 名言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한다. 영어에도 이와 꼭 같은 발상이 있다. 국가를 nation, state, country라고 하지만 국가의 本質과 核心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Republic과 Commonwealth라는 말이다. 국가는 국민 全體의 公的(public) 물건(thing)이다. Republic이란 말은 라틴말 res(물건)와 publica(公的public)가 合한 말이다.


국가는 통치자 한 사람의 국가가 아니요, 통치계급의 專有物이 아니다. 국가는 국민의 共同(common) 財産(wealth)이다. 한 개인이나 한 계급의 獨占物이 아니다. 우리는 국민의 공동재산인 국가를 아끼고 尊重하고 잘 管理해야 한다. 國家管理 能力이 없는 사람이 한 나라의 통치자가 될 때 나라의 危機가 오고 국민의 비극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宋나라의 文人 蘇洵은 管仲論에서 이렇게 말했다.


"一國以一人興 以一人亡.(국가는 한사람의 침에 의해서 번영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名君이 다스리면 국가가 번영하고 暴君이 다스리면 나락 망한다. 漢나라 武王의 善政에 의하여 四百年 계속하는 견고한 國基가 확립되었고, 唐太宗의 德治에 의해서 당나라 三百년의 번영이 이루어 졌다. 世宗大王의 뛰어난 王道政治에 의하여 朝鮮朝 519년의 튼튼한 기초가 수립되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根本原理가 무엇이냐. 國家統治의 要諦가 무엇이냐.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民生安定이요, 둘째는 民心을 얻는 것이다.

史記에 이런 명언이 있다.



"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나라를 다스리는 王은 백성을 하늘처럼 소중히 여겨야 하고, 백성은 衣食을 하늘처럼 소중히 생각한다.)"



군자는 국민을 하늘처럼 받들어야 한다. 군주는 民之父母요, 백성의 어버이다. 백성이 있고 나라가 있다.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라가 있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있다. 그러므로 그 先後와 輕重을 논한다면, 根本인 백성이 가장 중요하다.

民本主義의 思想家인 孟子는 이렇게 말했다.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孟子 盡心 下)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發言이다. 백성이 가장 소중하다. 社稷은 그 다음이다. 군주는 제일 나중이다. 사직은 國家를 의미한다. 社는 모일 사, 땅 귀신(鬼神) 사 字이다. 社는 원래 토지의 守護神이요, 그 신을 모시는 祭祀요, 그 제사를 지내는 部落을 의미한다. 稷은 피 직, 또는 神 직 字다. 稷은 穀神을 의미한다.

 

옛날 군주는 건국을 하면 반드시 土神(社)과 穀神(稷)의 두 神에게 경건한 祭祀를 드렸다. 그러므로 社稷은 국가를 의미한다.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 드리는 장소를 社稷壇이라고 하였다. 서울의 社稷公園에 가면 지금도 사직단이 있다.


백성이 가장 소중하고, 그 다음에 귀한 것이 국가요, 그 다음이 임금님이다. 이런 것이 孟子의 民本思想의 핵심이다. 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이요, 백성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食이다. 사람은 하루 세끼 먹어야 한다. 먹지 못하면 죽는다. 세상에는 무엇이 소중하다 소중하다 하여도 먹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食 字의 構造를 보라. 사람 人과 좋을 良의 合字다, 사람(人)에서 제일 좋은(良) 것은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衣食者民之本"(鹽鐵論)이라고 하였다.

 

의복과 食物이 國民生活의 근본이다. 나라의 根本, 政治의 첫째 課題, 國家의 第一義는 국민의 衣食住요, 民生安定이다. 국민을 飢餓에 빠뜨리는 정치, 백성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나라, 그것은 政治의 패배자요, 國家의 落第生이다.


食者民之本也. 국민의 衣食住를 洽足하게 하라. 이것이 정치의 알파요 오메가다. "政在養民"(書經에 나오는 말이다.) 정치의 근본은 국민을 먹여 살리는데 있다.


둘째는 民心을 얻어야 한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得民心 得天下),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失民心 失天下). 이것은 정치의 玉科玉條요, 萬古不變의 眞理요, 大原則이다.


어떻게 하면 민심을 얻고 어떻게 하면 민심을 잃느냐. 荀子는 이렇게 말했다. "愛民者强, 不愛民者弱" 위정자가 백성을 사랑하면 그 나라는 강한 나라가 되고 위정자가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약한 나라로 전락한다.


이것은 明若觀火한 원리다. 정치의 興亡盛衰가 무엇에 의하여 결정되는가. 興하는 나라는 어째서 興하고, 亡하는 나라는 어째서 망하느냐. 民心을 얻으면 나라가 흥하고 민심을 잃으면 나라는 망한다.


그러므로 管子는 이렇게 말했다.

"政之所興 在順民心, 政之所廢, 在逆民心"

民聲은 天聲이요, 民心은 天心이다. 백성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요, 백성의 마음은 하늘의 마음이다.


"君者舟也, 無人者水也"

荀子의 말이다. 君主는 배와 같고 민중은 물과 같다. 배는 물위에 뜬다. 물은 배를 뜨게 한다. 그러나 물은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통치자가 不正과 腐敗와 獨裁와 箝制의 惡을 저지르면, 분노한 민중은 성난 波濤가 되어 배를 전복시킨다.


이것을 우리는 민중의 革命이라고 일컫고 역사의 채찍이라고 칭하고 하나님의 審判이라고 한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정치의 근본을 한마디로 간결하게 要約한 것은 人類의 大聖 孔子다.


"子曰 政者正也"

論語 顔淵篇에 나오는 말이다. 정치의 要諦는 옳은 길을 가는 것이요, 正義를 實踐하는 것이요, 正道와 順理를 따르는 것이요, 天下의 大道를 밟는 것이요, 事理에 맞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요, 萬事의 原則을 지키는 것이다. 政은 正이다. 公正한 방법으로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다.


 

 

출처 : 說文解字(재미나는 한문)
글쓴이 : 樂而忘憂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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