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심 경 (심학도설)

浩 根 書 堂 2013. 1. 26. 07:45

심경

유교 心學(심학)의 淵源(연원)과 心法(심법)의 精密(정밀)함을 담고 있는 ≪心經≫은 '마음을 다스리는 글'이란 뜻으로 원래 남송시대(南宋時代) 주자학파(朱子學派)인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가 사서(四書)와 삼경(三經), 주염계(周濂溪), 정이천(程伊川), 범준(范浚), 주자(朱子)의 글을 간략히 뽑아 만든 책인데, 명나라 초기의 성리학자인 황돈(篁墩) 정민정(程敏政)이 이에 관계되는 해석과 송나라 유학자들의 학설을 발췌하고 보완하여 ≪心經附註≫라 이름하였다.

우리는 이 ≪心經≫을 통해서 유가 심학의 근원이 바로 ‘상제’인 ‘천’(天)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며, 내 마음속에서 울리는 그 천명天命을 잘 듣고 부합되게 행하는 것이야말로 유가 수행의 궁극 목표이자 유가가 꿈꾸는 참다운 聖人(성인)의 모습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사람의 하는 바를 보고 계시니, 너는 깜깜하여 밝지 아니하여 나를 보는 이가 없다고 하지 말라. 신이 너를 보고 계시니라.”

≪心經≫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도 필수 修養(수양)서 이자 入門書(입문서)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心經≫에 유교에서 논하고자 하는 심학의 연원과 심법의 정미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儒學(유학)에서의 ‘천’(天)이란 곧 出發點(출발점)이자 窮極的(궁극적) 指向點(지향점)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오늘처럼 귀신과 인간의 세계가 徹底(철저)히 분리되어 귀신의 여부를 의심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천’(天)을 말하면 응당 ‘상제’(上帝)라는 人格神(인격신)이 배후에 의미하고 있었다.

유학에서의 선과 악은 바로 마음의 활동이 천리에 부합하면 선이 되는 것이며 부합치 못하면 불선(不善)이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은 항상 작용을 멈추지 않는 활물(活物)이므로 인신(人身)을 주재하는 마음의 작용이 선한지 불선(不善)한지는 오직 완전히 움직여진 곳에서 말할 수밖에 없다. 이 마음의 움직임을 ‘情’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칠정이 모두 절도에 맞아서 그 성에 부합된 행동을 하기 위해서 인간은 마음을 수양한다.

  마음을 닦아 이 성을 온전히 밝혀낸 사람을 유학에서는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이 성인은 천(天)의 종자(宗子)로서 천(天)의 의지를 대신 실현시키는데, 그것이 곧 『중용』에서 말한 ‘천지위언(天地位焉), 만물육언(萬物育焉) - 천지가 제 자리를 잡고 만물이 제 삶을 이루어 잘 화육된다 - 이다.

  인간이 기질을 변화시켜서 불초한 자이지만 마침내 성현이 될 수 있는 것은 성(性)이 통하기 때문이다. 반면 남의 치질도 핥아주는 아부를 하여 권력과 부귀를 누리던 자가 나중에는 아비와 임금도 죽이는 금수만도 못한 놈이 되는 것 역시 이 性이 통하기 때문이니 어떻게 수양을 안할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해야만 그 욕망을 막을 수 있는가? 다만 생각할 따름이니, 배우는 사람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다. 오직 생각하는 것으로서 욕망을 막을 수 있다.” (何以窒其欲 曰思而已矣 學者莫貴於思 惟思而能窒慾, 『심경부주』)

경은 ‘항상 깨어있는’ 법이다(敬是常惺惺法)

 따라서 『심경』의 1권은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히 하고 오직 한결히 하여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는 수행의 기준과 궁극 목적을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서 그 근거로서 “상제가 너에게 내려와 계시니 너는 의심치 말라”고 하여 천명의 필연성을 알리고 그 결단을 찬미하는 것으로부터 심학의 연원을 이끌어 나간다. 여기서 “상제가 너에게 내려와 있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 상제의 의지인 천명, 곧 성(性)이 품수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 성을 밝히는 공부는 항상 정신이 깨어있는 ‘경’(敬)과 홀로 있을 때라도 방만히 굴지 않는 ‘신독’(愼獨)이 관건이 된다. 이에 대해 정자는 “언제나 경(敬)하면 상제를 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심경』은 바로 이 ‘경’(敬)이란 한 글자에서 시작하여 ‘경’(敬)이란 한 글자에서 끝나고 있다. 때문에 『심경』의 마지막 권은 이 경을 어떻게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 가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경계의 글로 끝을 맺는다.

 

心學圖說

제팔 심학도 (第八 心學圖)

 



 

퇴계가 선조에게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군왕의 도(道)에 관한 학문의 요점을 10개의 도식으로 설명하였는데 그 8번째가 <심경>인 심학도설(心學圖說)로, 성현들의 마음(心)에 관한 것과 마음을 주재하는 경(敬)에 관한 심학(心學) 가운데에서 중요한 것을 간추려 체계적으로 도식화하고 설명한 것이다.

林隱程氏(復心)曰: “赤子心, 是人欲未汨之良心, 人心卽覺於欲者. 大人心, 是義理具足之本心, 道心卽覺於義理者.

임은 정(林隱 程)씨가 말하였습니다. “어린이의 마음(赤子心)은 욕심에 아직 어지럽혀지지 않은 양심이요, 인심(人心)은 곧 욕심에 눈 뜬 마음이요, 대인의 마음(大人心)은 의리가 잘 갖추어진 본심이요, 도심(道心)은 곧 의리를 깨달은 마음이다.”

此非有兩樣心, 實以生於形氣, 則皆不能無人心. 原於性命, 則所以爲道心.

이것은 두 가지 모양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형기(形氣) 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 인심이 없을 수 없으며, 동시에 성(性)과 명(命)에 근원을 두었기 때문에 도심 인심이 없을 수 없다. 성명(性命)에 근원하면 도심이 되기 때문이다.

自精一擇執以下, 無非所以遏人欲而存天理之工夫也

“마음을 순수하고 전일하게 하고(精一) 정성껏 한결같이 선(善)을 택하여 계속한다는 것(擇執)” 그 이하는 인욕을 막아서 천리를 보존하는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愼獨以下, 是遏人欲處工夫, 必至於不動心. 則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 可以見其道明德立矣.

“군자는 홀로 아는 그 곳을 삼간다는 것”(愼獨)이하는 인욕를 막는 공부이니, 반드시 움직이지 않는 마음(不動心)에까지 이르러야 부귀로 해서 타락하지 않을 수 있고, 가난과 천함으로 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며, 위협과 무력에도 굽히지 않을 수 있어서 그 도가 밝아지고 덕이 확립됨을 볼 수 있게 된다.

戒懼以下, 是存天理處工夫, 必至於從心. 則心卽體, 欲卽用, 體卽道, 用卽義, 聲爲律, 而身爲度, 可以見不思而得, 不勉而中矣.

또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戒懼)”이하는 천리를 보존하는 공부이니, 반드시 마음에 따라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 “마음에 따라 행동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從心)에 이르러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곧 본체요, 욕(欲)이 곧 작용이며, 본체가 곧 도요, 작용이 곧 의로운 것이요, 소리내는 것이 조화롭게 되고 행동함에 법도가 있게 되어, 생각하지 않고도 얻고, 힘쓰지 않아도 들어맞게 됨을 볼 수 있게 된다.

要之, 用工之要, 俱不離乎一敬. 蓋心者, 一身之主宰, 而敬又一心之主宰也.

요컨대 공부하는 요령은 하나의 경(敬)에서 떠나지 않는데 있다. 대개 마음이란 한 몸을 주재하는 것이요, 경은 또한 한 마음을 주재하는 것이다.

學者熟究於主一無適之說, 整齊嚴肅之說, 與夫其心收斂常惺惺之說, 則其爲工夫也. 盡而優入於聖域, 亦不難矣.

배우는 사람이 ‘마음을 모아 흩어짐이 없게 해야 한다(主一無適)’는 설과, ‘외모를 반듯이 하고 태도를 엄숙히 해야 한다(整齊嚴肅)’는 설과, ‘그 마음을 수렴한다(心收斂)’는 설과, ‘항상 깨어 있게 한다(常惺惺)’ 는 설에 대하여 익숙히 탐구해 보면 공부가 다 되어 충분히 성인의 영역에 들어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右, 林隱程氏掇取聖賢論心學, 名言爲是圖.

심학도는 임은 정씨가 성현들께서 심학을 논한 명언들을 모아서 만든 것입니다.

分類對置, 多而不厭, 以見聖學心法, 亦非一端, 皆不可不用功力云爾.

그림에서 분류 대치시키기를 많이 한 것을 피하지 않은 것은, 성현의 심법이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其從上排下, 只以淺深生熟之大槩言之, 有如此者, 非謂其工程節次, 如致知, 誠意, 正心, 修身之有先後也.

위로부터 아래로 배열한 것은 다만 얕고 깊음과 생소하고 익숙한 점을 들어 대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것이 있다는 것일 뿐이요, 공부의 과정과 절차에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처럼 선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或疑, 旣云以大槩敍之, 求放心是用工初頭事, 不當在於心在之後

어떤 사람은 의심하기를 이미 대체적으로 서술한 ‘흩어진 마음을 찾는다(求放心)’고 한 것은 공부의 시작이니만큼 ‘마음을 둔다(心在)’고 하는 것의 뒤에 놓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臣竊以爲求放心淺言之, 則固爲第一下手著脚處; 就其深而極言之, 瞬息之頃, 一念少差, 亦是放顔子, 猶不能無違於三月之後, 只不能無違斯涉於放.

신은 생각하옵기를 ‘흩어진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얕게 말하면 물론 제일 먼저 해야할 것이지만, 그 깊은 경지에 나아가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한 순간에 한 생각이 조금만 어긋나도 마음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안자(顔子)도 석달 뒤에는 仁을 어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으니, 어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곧 방심의 상태에 들어선 것입니다.

惟是顔子纔差失, 便能知之; 纔知之, 便不復萌作, 亦爲求放心之類也. 故程圖之敍如此.

다만 안자는 잘못이 있자 금방 이것을 알아차리고, 알고 난 뒤 곧 다시는 싹트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도 ‘흩어진 마음을 찾는’ 방법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정씨의 그림을 이렇게 차례 지운 것입니다.

程氏字子見, 新安人, 隱居不仕; 行義甚備, 白首窮經, 深有所得, 著<四書章圖>三卷.

정씨의 자는 자견(子見)이요 신안 사람인데, 은거하여 벼슬을 아니하고 행실과 의리가 매우 잘 갖추어졌습니다. 늙도록 경서를 탐구하여 깊이 얻은 바가 있었고 사서장도(四書章圖) 세 권을 저술하였습니다.

元仁宗朝以薦召至將用之, 子見不願, 卽以爲鄕郡博士致仕而歸.其爲人如此, 豈無所見而妄作耶?

원의 인종조에 천거에 의해 불리워져서 임용하려 했으나, 자견이 원하지 않아서 향군박사(鄕郡博士)를 시켰더니 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됨이 이러하오니 어찌 소견이 없이 함부로 그림을 지었겠습니까?

출처 : 說文解字(재미나는 한문)
글쓴이 : 樂而忘憂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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