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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 - 王昭君(왕소군)

浩 根 書 堂 2016. 2. 24. 11:00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王昭君(왕소군)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나라 땅이라 갖가지 꽃과 풀 없겠냐만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끌려온 이 몸에겐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가꿀 일 없으니 자연히 옷 띠도 헐렁해지고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이는 잘록한 허리 몸매 보이기 위함 더욱 아니네! 요점 정리 작자 : 왕소군(王昭君) 연대 : 한나라 원제 형식 : 한시, 오언절구 주제 : 흉노족 왕에게 끌려가는 가련한 처지를 빗댄 詩 이해와 감상 한나라 원제(元帝/무제의 할아버지)때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왕소군(王昭君)이 흉노족 왕에게 끌려가는 가련한 처지를 빗댄 시로 봄이 왔건만 봄같지 않고 오랑캐 땅에는 꽃도 피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나라 원제(元帝)때 흉노와 잦은 전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워 골치가 아플때 흉노의 왕(묵특선우)이 한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흉노의 왕이 자기 나라를 돌아갈때 궁녀한명만 보내주면 국경을 침범하지 않는 일종의 화친조건을 내세웠다. 원제는 많은 궁녀들중 가장 못생긴 궁녀를 보낼 결심을 하고는 궁녀를 그려놓은 화첩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당시에도 로비가 통했던지 궁녀들은 자기들을 그리는 화공들에게 돈을 주면서 예쁘게 그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야만 화첩을 본 왕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어 벼락감투(후궁)를 쓸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소군은 미모에 자신이 있어 전혀 로비를 하지 않았는데 화공이 이를 괘씸히 여겨 가장 못생긴 얼굴로 그렸다. 때마침 흉노에게 보낼 궁녀를 고르기 위해 화첩을 본 순간 왕은 가장 못생기게 그려진 왕소군을 지목하여 흉노왕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막상 실물을 보니까 너무나 미인인지라 흉노왕은 입이 벌어지고 화가 난 원제(元帝)는 화공의 목을 잘랐다. 왕소군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흉노땅으로 동행하였는데 흉노땅은 봄이 훨씬 지났건만 날씨가 매우 추웠다. 이때 왕소군이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라 읊었다.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답지 않다." 는 뜻이다. 졸지에 말도 통하지 않는 흉노의 땅으로 버림받은 왕소군이 한탄하여 읊어진 시가 위의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이다. 이 시는 위의 해석과 달리 해석하기도 한다.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으랴만, 봄이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즉, 오랑캐 땅인들 어찌 화초가 없으랴만, 정 붙이지 못하는 이역땅에서 꽃을 대하니, 봄이 되어도 봄날의 설레임이 없다는 뜻이다. 왕소군은 죽어 흉노의 땅에 묻혔는데, 겨울이 되어 흉노땅의 풀이 모두 시들어도 왕소군의 무덤의 풀만은 사시사철 늘 푸르렀다고 하여 그 무덤을 청총(靑塚)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내몽고에 가면 이 무덤이 있어 관광객이 신기해 한다고 한다 왕소군은 동토에서 옷짜는 기술 등 많은 문화를 흉노에게 전파하여 흉노와 한나라는 이후 60년간을 평화롭게 지냈다 한다. 중국 역사상 4대 미인 중 한 사람인 왕소군(王召君)은 그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 이였기에 기러기가 하늘 날아가다 왕소군의 예쁜 모습에 넋 잃고 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모두 땅으로 떨어졌다 하여 "낙안(落雁)"이란 말이 만들어 졌다. 하지만 그녀는 참으로 기구하고 한 많은 생을 살았다.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80년 "서울의 봄"이 군사정권에 짓밟히면서부터 정치인들이 자주 인용했던 글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화 한토막! 어느 고을의 향시에서 시제(詩題)를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가 내걸렸다. 응시한 수 많은 유생들은 제각기 왕소군의 고사를 들먹이며 자신들의 학식을 한껏 뽐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합격자 발표가 되고, 장원 급제한 사람의 답안지가 공개되었는데, 뜻밖에도 장원급제한 이의 답안지는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를 반복해서 쓴 너무나 황당한 답안지였다. 아무리 오언절구라 이해해 주려고 하여도, 기, 승, 전, 결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昭君怨(소군원) - 이백(李白)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소군이 옥 안장을 떨치며 上馬涕紅頰(상마체홍협) 말을 타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흘러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오늘날 한나라 궁녀가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내일 아침 오랑캐의 첩이 되는도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에서 한 구절만 인용하여 반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생들은 누구라 할 것없이 한 걸음에 채점관을 찾아가서 따지듯 그 답안지가 장원에 뽑힌 연유를 물은즉, 채점을 맡은 나으리 가로되, "이 胡地無花草 오언절구는 한문 해석의 정수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기승전결이 뚜렷하다"고 하니, 이해를 못한 유생들이 그게 어떠냐며 계속 따지자, 채점관 나으리 그 시를 해석하는데,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다하나 胡地無花草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만 胡地無花草 먼땅이라 화초가 없을 것 같으니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구나 그제서야 유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 둘씩 뿔뿔이 흩어져 갔다. 이 시의 비밀은 바로 <胡>자를 어떤 뜻으로 해석하느냐에 있었던 것이다. 즉, <胡>자를 起句(기구)에서는 '오랑캐' 名詞로, 承句는 '어찌' 疑問詞로 轉句에서는 '멀다' 形容詞로 結句에서는 다시 '오랑캐' 名詞로 본 것이다. 이백의 <昭君怨(소군원)>은 王昭君(왕소군)이 한나라 궁을 떠나 흉노의 땅으로 출발하는 때의 비애(悲哀)와 정경(情景)을 묘사하였고, 동방규의 <소군원>은 흉노 땅에 도착한 후 황량한 풍토에서 맞는 상심(傷心)과 망향(望鄕)의 슬픔으로 나날이 수척해 가는 가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심화 자료 王昭君(왕소군) 왕소군의 초상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알씨(선우의 처)로,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이름은 장(嬙, 출전은 한서)이다. 성을 왕, 자를 소군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군이라고 불리며 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형주 남군(현재의 호북성 사시) 출신으로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고대 중국 4대 미인의 한 사람에 손꼽힌다.

출처 : 너에게로 가는카페
글쓴이 : 섬바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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