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도올 선생의{효경 한글 역 주}

浩 根 書 堂 2021. 1. 16. 16:14

다음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유가(儒家),경서(經書),고시(古詩) 도올선생의 《효경 한글역주》

숭산 추천 0 조회 122 19.03.27 11:22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songdam.poong-su/EZwv/589?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효경 한글역주》

 

도올 김용옥

 

 

※ 역시나 도올 선생 책답게 긴 해제가 실려 있다.

긴 해제지만, 지금까지 모르던 것을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 효경 원문 자체보다 더 흥미롭다.

여기서는 효경 원문을 해제하지는 못하겠고(도올 선생의 번역과 해설을 참고 하면 된다. 길지 않은 원문이니 금방 읽을 수 있다), 해제 부분을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제1장: 주자학과 《효경간오 孝經刊誤》

 

-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효경》을 접한 자가 거의 없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다.

 

- 조선조에서 《효경》은 거의 《효경대의 孝經大義》라는 책명과 구분 없이 쓰여졌다.

 

- 그러면 《효경대의 孝經大義》란 어떤 책인가?

이는 원나라 때 동정(董鼎)이 쓴 책이다.

 

- 그런데 왜 조선조 사람들은 《효경》하면 동정의 《효경대의 孝經大義》만을 읽었을까?

그 이유는 《효경대의 孝經大義》가 주자가 지은 《효경간오 孝經刊誤》라는 책을

크게 발양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 조선조 사람들은 주자의 권위를 존숭했는데, 왜 주자의 《효경간오 孝經刊誤》를 읽지

그 제자를 사숙한 동정의 《효경대의 孝經大義》를 읽었을까?

 

- 그 이유는 주자의 《효경간오 孝經刊誤》는 독립된 작품으로 읽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책자가 아니다.

 

- 주자는 《효경》을 손 보다 결국 실패하게 된다.

게다가 주희는 《효경》을 허구적 구성으로 보았다. 즉 위서로 보았다.

 

- 《효경》은 엄존하는 문헌의 형태로

이미 《여씨춘추 呂氏春秋》(B.C 241년에 성립)에 인용되고 있다.

《효경》이 진한(秦漢) 이전에 성립한 문헌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희와 같은 대석학이라도 《여씨춘추 呂氏春秋》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말이다.

 

- 《여씨춘추 呂氏春秋》는 중국의 독서계에서 냉대를 받았다가,

청조의 고증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정비되기 이전에는

사람의 눈길이 별로 닿지 않은 채 방치된 서물이었다.

 

- 하여튼 주희는 《효경》을 일대 수술을 가하지 않고서는

바이블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어려운 책으로 보았다.

 

- 주자는《예기》안의 한편으로 자리 잡고 있는 「대학」「중용」을 《대학장구》《중용장구》처럼

《효경》도 그러한 틀로 만들 작업을 구상했다.

그러나 《효경》은 「대학」처럼 한 경의 한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독립된 경(經)이었으며

주희가 손을 대기 이전에 이미 장(章) 구분이 있었다.

 

 

제2장: 사마광의 《효경지해 孝經指解》로부터 동정의 《효경대의 孝經大義》

 

- 《효경》은 한대로부터 이미 금문․고문의 시비가 있는 텍스트이다.

당대(唐代)에도 이미 금고문의 시비가 문제시되었고,

이러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시비를 잠재우기 위해

당현종은 스스로 금․고문학파의 주장을 절충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확정하고

그 새로운 텍스트에 주(注)를 가하였다.

이것이 소위 《어주효경 御注孝經》

(어주효경은 ‘개원시주 開元始注’와 그후 이를 보완한 ‘天寶重注’가 있다)

 

- 《어주효경 御注孝經》은 금․고문을 절충하였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금문효경을 위주로 한 것이다.

이 천보중주를 바탕으로 형병(邢昺)의 《효경정의 孝經正義》가 성립하였으므로

오늘날 우리가 보통 13경주소본에서 보는 《효경》은

당현종의 《어주효경 御注孝經》계열이며, 금문계열이다.

 

- 주희는 사마광(1019-1086)을 존경했다.

사마광은 일찍이 《효경》의 정치사적 중요성을 간파했다.

그리고 《효경》에 대한 주석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미 《어주효경 御注孝經》이 금문에 바탕을 하고 있었고,

그것에 기초한 주석들은 꽤나 많았기 때문에

사마광은 고문효경 텍스트에 의거하여 주석작업을 하려했다.

 

- 그런데 사마광이 본 고문효경은 결코 제대로 된 고문효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마광은 고문효경에 근거하여 자기의 효경 주석서인

《효경지해 孝經指解》를 쓴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말은 고문효경에 대한 지해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당현종의 《어주효경 御注孝經》과 일본판 정현 주의 《금문효경》을 대폭 수용했다.

 

- 주희는 사마광을 존숭했으므로 사마광이 만든 《효경지해 孝經指解》의 텍스트가

곧 고문효경이라고 생각해버린 것 같다.

따라서 주희의 《효경간오 孝經刊誤》판본은 금문도 아니고 고문도 아니며

바로 사마광의 《효경지해 孝經指解》판본이었다.

이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오류의 반복이다.

 

- 선조에서《효경》이라고 하는 것은 《효경대의 孝經大義》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용으로 《효경언해 孝經諺解》를 만들었는데(류성룡이 주관),

그 《언해諺解》도 《효경대의 孝經大義》의 경과 전만을 도려내어

그 경전(經傳)에 대해서만 언해를 한 것이다.

 

- 조선의 유자들이 거의 《효경》을 읽지 않았다고 한 것은,

그들에게는 주자에 대한 존중만 있었고 엄밀한 판본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학계에도 계승되고 있다.

 

 

○ 제3장: 다석(多夕)의 효기독론

 

- 다석 유영모 선생의 효 기독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장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장 요약을 생략한다.

 

 

○ 제4장: 불교에서 말하는 효

 

-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잘 부르는 노래 「어머님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시며

손발이 다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무엇이 넓다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 양주동의 작사는 바로 우리나라 정조 때 간행된 화산(화산) 용주사(용주사) 판본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 佛說大報父母恩重經》「정종분 正宗分」속에 나오는

십게찬송(十偈讚頌)에 기초한 것이다.

 

제일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 나를 잉태하여 지켜주신 은혜

제이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 해산에 즈음하여 고통을 감내하신 은혜

제삼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

제사 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어 먹여주시는 은혜

제오 회건취습은(廻乾就濕恩):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는 은혜

제육 유포양육운(乳哺養育恩): 젖을 먹여 키워주시는 은혜

제칠 세탁불정은(洗濯不淨恩): 깨끗하지 않은 것을 씻어주는 은혜

제팔 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 자식이 먼 길 갔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

제구 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 자식을 위해서라면 악업이라도 지으시는 은혜

제십 구경련민은(究竟憐愍恩): 자식을 늙어죽도록 끝끝내 애처롭게 여기시는 은혜

 

- 양주동이 왜 《부모은중경》을 가지고 노래를 지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조선후기부터 《부모은중경》이 대중에게 보편화되어,

누구나 그 가사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제5장: 조선왕조 행실도(行實圖)의 역사

 

-《효행록 孝行錄》은 고려말 충목왕 2년(1346)경에 안향(安珦)의 문인 권보(權溥, 1262-1346)

그의 아들 권준(權準, 1280-1352)과 함께 효행에 관한 기록을 모아 엮은 책이다.

 

- 세종 16년(1434)에 인쇄를 마친 《삼강행실도》는

기존의 《효행록 孝行錄》의 핵심적 내용을 흡수하고

거기에 우리나라의 사례를 첨가한 새로운 방대한 책으로 집현전에서 편찬되었다.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의 출판역사상 민중에게 가장 심원한 영향을 끼친 책이 되었다.

《삼강행실도》는 조선왕조를 뒤흔든 막강한 책이었다.

 

-《삼강행실도》를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들에게 배포하면서

학식있는 자들을 구하여 먼저 그 내용을 숙지케 하고,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강습하도록 하였으나

이러한 하달방식의 강습이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 그러자 관찰사로 하여금 수령들이 얼마나 《삼강행실도》의 보급에 열성적인가를 살펴

근무평가의 근거자료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의 구체적인 제도가 바로 효자․열녀의 포상이었다.

 

-《삼강행실도》의 영향으로 우리사회는 양계(兩系) 사회에서 친계(親系) 사회로,

이성(異姓) 양자에서 동성(同姓) 양자로, 혈통에서 종법으로,

불교에서 유교로 급속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주영하 외,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86-99)

 

-《삼강행실도》는 조선왕조의 가장 강력한 텔레비전 방송이었다.

《삼강행실도》는 효자․충신․열녀를 각각 110 케이스를 모았다.

그러니까 330개의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330개의 스토리마다 전면에 판화가 있다.

 

- 그러나 《삼강행실도》가 3권 3책으로 그 분량이 방대하기 때문에 대중에게 보급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성종은 《삼강행실도》의 산정(刪定)을 명한다.

효자, 충신, 열녀를 각각 35명만 추려(총 105명) 3권 1책의 형태로 편찬하였다.

그리고 상단에 언해를 가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 1490년 성종조에 완성된 《삼강행실도》산정언해본이아야말로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문명의 가치관을 형성시킨

가장 결정적인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 중종 때는 《삼강행실도》의 전성기였다.

중종 6년(1511) 임금의 명령이 떨어진지 불과 2개월 만에 《삼강행실도》2940질을 찍어

전국에 반포하였다.

(2개월만에 3천질 가량을 간행한다고 하는 것은 조선왕조 출판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 중종 13년 조선인 사례를 다룬《속삼강행실도》가 편찬되었다.

이후 《삼강행실도》에 장유유서와 붕우유신의 윤리가 다뤄진 부분이 없다며

《이륜행실도》를 편찬하게 된다.

 

- 조선왕조는 《삼강행실도》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 보편화되어 있는 효라는 덕목은

조선왕조 오백년을 통해 지속적으로 토착화되었는데,

그것이 《효경》이라는 경전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삼강행실도》라는 만화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 조선조 오백년을 통하여 《삼강행실도》가 가르친

우효(愚孝)․우충(愚忠)․우열(愚烈)의 소행은 참으로 비참한 수준의 것이었다.

송․원대 《이십사효》가 확립된 이래, 이러한 우효의 관행은 명나라를 통하여

주자학의 관학화와 더불어 엄청난 포퓰리즘의 흐름을 형성한다.

 

- 《삼강행실도》에 실린 상당수의 우행(愚行)들이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이라는

《효경》의 종지에 어긋난다. 송대는 이러한 우효(愚孝)를 조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전통에 물들지 않은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송나라 사람들이 최고의 효행이라고 여긴 단지(斷指)와

할고(割股: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의 약으로 씀),

그리고 효도를 위하여 자녀를 상해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원나라 이후 명․청대에는 다시 이러한 송대의 분위기가 부활된 것이다.

효행의 포퓰리즘은 날로 극단화되어간 것이다.

 

-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은 만청에서 끝난 우행이,

일제의 악랄한 압제수탈 시기를 통하여 더욱 조장되었다.

 

- 조선총독부와 천황에 복종하는 식민지 국민을 만드는 데

삼강적 인간상은 매우 유효하였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유교도덕을 부르짖는 보수주의자들이, 대부분 반공이나 부르짖고

친체제적인 사유에 물들어 있는 까닭은

그들이 참다운 《효경》의 도덕을 배우지 못한,

모두 일제 끄나풀에 불과한 세도가나 우매한 촌로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사회에서 “유학”이라 하면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 제5장 주영하의 글을 보라)

 

- 효가 도덕적 차원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그 핵심에 있는 것은

부모의 자애이지 자식의 효도가 아니다.

부모의 자애 때문에 자식의 효도는 마땅한 당위로서 인식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리적 코딩(cording)을 넘어서는 도덕적 “베품”이기 때문이다.

효의 본질은 위로부터 아래에로의 베품에 있는 것이다.

“베품”의 전제가 없이 아랫사람의 복종이나 희생,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강탈이요. 복종주의적 강압이다.

 

 

○ 제6장: 한국의 토착경전『부모은중경』

 

-《은중경》에서는 “효 孝”라는 개념을 “보은 報恩”이라는 개념으로 바꾼다.

유교의 《삼강행실도》류의 효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방향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보은”은 필연적으로 쌍방적이다.

 

-《부모은중경》의 위대한 측면은《삼강행실도》가 강요하는 복종의 윤리를

하해와도 같은 자비의 윤리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이라는 이름의 경전이 중국에서는 통용되지 않았으며,

그것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었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이름의, 우리나라 판본의 원형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

은중경류의 경전이 많이 있으나

우리나라 《불설대보부모은중경》과 같이 완벽한 체제를 갖춘 짜여진 경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가지산문의 탁월한 학승이

성리학의 주요개념인 효에 상응할 만한 불교이념을 제시해야만 했던

어떤 역사적 필연성을 이미 여말선초의 격동기에 예감하고

새롭게 한국적 정서를 감안하여 찬술한

한국불교의 한 토착적 대맥이라는 가설을 제시한다(도올 선생)

 

 

○ 제7장: 효와 제국의 꿈

 

- 도올 선생의 해박함을 담을 수 없어 생략함.

 

 

○ 제8장: 선진시대 효의 담론화

 

-《효경》이라는 책명과 내용이 인용된 최초의 사례는

《여씨춘추 呂氏春秋》 「선식람 先識覽」제4, 여섯 번째 편인 「찰미 察微」에서다.

 

- 이는 《여씨춘추 呂氏春秋》가 쓰였을 당시《효경》이 독립된 문헌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의론의 여지가 없다.

 

- 많은 사람들이 순자의 학설을 성악(性惡)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데 순자는 ‘성악’을 말한 적이 없다.

맹자의 선(善)도, 순자의 악(惡)도, 어떤 윤리적 실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순자의 “惡”는 “악”으로 읽지 말고 “오”로 읽어야 한다.

선진(先秦)철학에 있어서는 조로아스교․유대교․기독교의 윤리와는 달리 선․악이 실체화되지 않는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호오(好惡)의 주체임을 말했을 뿐이다.

 

-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실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가능성을 태어난 대로의 본성에 다 부여해버리면

후천적 학습의 필요성이나 의미가 상실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 순자는 일방적 관계는 결국 인간세에 파탄을 가져올 뿐이라고 굳게 믿는다.

순자는 인륜관계의 무차별적 평등이라는 것은 혼란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하이어라키(hierarchy)는 인정하지만,

복종주의나 권위주의는 수용하지 않는다.

 

- 순자를 통해서 바라볼 수 있는 선진시대의 일반적 사회윤리가,

맹자를 적통으로 해서 생각한 송대 이후의 가치관에 비하면,

오히려 발랄한 평등적 인간관을 깔고 있다.

 

- 순자의 “종도부종군 從道不從君, 종의부종부 從義不從父”는

송․명․청대의 윤리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다.

임금이라도 도를 구현하는 자가 아니면 따라서는 아니 되는 것이요.

아버지라도 의를 구현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따라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도와 의는 인간 개체의 임의성을 초월하는 객관적 사회적 원리요 기준이다.

 

- 순자가 말하는 논리는 바로 “심기소이종지 審其所以從之”라는 한마디로 집약된다.

복종 그 자체가 충․효가 될 수가 없다.

과연 왜 복종을 해야 하는지, 그 이치가 납득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없이 불편한 논리를 순자는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 신하가 힘써야 할 것은 군주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순자의 합리주의 정신은 법가(法家)의 객관주의로 발전해나갔다.

 

-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순자의 사상이 《효경》에 전면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순자》「자도 子道」편이 《효경》「간쟁장 諫爭章」으로 들어갔다)

 

- 그렇다면 《효경》의 성립시기는 순자 이후, 《여씨춘추》이전으로 집약된다.

순자의 전성활동기를 BC 280년 정도로 잡는다면,

《여씨춘추》의 성립시점은 BC241년이 되므로 BC 3세기 중반 전후로 추정될 수 있다.

 

 

○ 제9장: 사마천의 「여불위열전」을 비판함

 

- 중국 선진고경 중에서 《여씨춘추》처럼 저작연대가 확실하고

(BC 239년이냐, BC 241년이냐 하는 정도의 논란만 있을 뿐),

또 편찬자가 확실한 서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책이 우리의 의식에서 소원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 역사적으로 《여씨춘추》는 방치된 채로 있었으며

청나라 때 고증학자가 손을 대기까지는 사람들이 거의 읽지 않았으며

따라서 별로 인용도 되지 않았다.

필원(畢沅 1730-1797)의 교정본 《여씨춘추신교정 呂氏春秋新校正》(건륭 54년, 1789)이야말로

《여씨춘추》재발굴의 효시라고 해야할 것이다.

 

- 그런데 왜 이 책은 냉대를 받았을까?

이 책의 편찬사업을 주도한 여불위(呂不韋 ?~BC 235)란 인물에 대한

혐오감이나 천시에서 일차적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여불위라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대부분 사마천 《사기》「여불위열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의 기술은 한나라 무제때의 사건이며,

당시는 이미 진나라에 대한 가치관이 매우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진제국 창업의 적통을 세우는 어떠한 위업을 평가하는 사마천의 붓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사마천의 왜곡된 기술로 여불위라는 인물이 묘사됐을 것이다.

사마천의 역사기술의 권위가 높은 만큼 《여씨춘추》는 2천년간 인간의 무지 속에 파묻히게 된다.

 

 

 

○ 제10장: 《여씨춘추》를 논함

 

- 그동안《여씨춘추》를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등

그 어느 분류에도 끼지 못하는 잡가로 규정돼 왔다.

 

- 그러나《여씨춘추》에는 통일 제국의 비젼이 있었다.

그 비젼을 위해서는 여하한 사상경향도 가릴 여가가 없었다.

《여씨춘추》의 잡다한 성격이야말로 《여씨춘추》의 강점이다.

 

-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노 전 대통령의 서세(逝世) 소식을 접했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 외에 내가 무슨 말을 하리오마는

그는 적절한 시의에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릇 인도되어가는 민심을 바로잡고

역사의 정의로운 대세를 새삼 각인시켰다.

그리고 권좌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아무도 우리사회의 죄악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는 반성의 염을 촉구시켰다”

[출처] 도올선생의 《효경 한글역주》|작성자 알탕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댓글0 추천해요0

스크랩0

댓글

  •  
  • 이전 목록으로 이동
  • 1
  • 다음 목록으로 이동

회원님은 현재 손님입니다. 이 게시판은 정회원 이상 댓글쓰기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