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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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태학
태학은 ① 학문의 이름, ②학교의 이름, ③책의 이름으로 쓰입니다.
본문 '태학지도'의 태학은 ③학문입니다.
주자는 大學을 大人의 학이라고 하였습니다(大學者大人之學也). 大人이란, 나이에 따른 구분이라고 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정한 과정을 수료하고 그리고 정한 나이가 되면(성인이 되면) 태학에 가서 배우는 學이란 의미입니다.
다산 정선생은 『대학공의』에서 주자의 이런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大人이 나이에 따른 구분으로 쓴 전례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학공의』에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논증하고 있습니다. 다산이 『대학공의』에서, 「태학의 도가 (천자, 제후, 공경대부 등의) 맏아들을 가르치는 道로서 사서인들을 가르치는 道와는 다르지만 오늘날의 법에는 옛날 같은 귀천이 없으니 누구나 이 태학에 힘씀이 가하다 하겠다」고 하듯 다산의 이런 뜻이 배어 있는 것이 바로 「대인의 학」이라고 하는 주자의 해석일 것입니다.
(『예기』의)「태학」(본시 대학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예기』49편의 글 가운데 제41번째 글입니다)이 쓰여지기 이전 옛날에 삼강령 팔조목이 있었을 것 같지를 않습니다. 「태학」은 『예기』에 잉태할 당시, 옛것을 새롭게 종합하여 체계화한, 즉 온고지신(溫故知新)한 이론일 것입니다. 당연히 오늘날 접하는 『대학』이라는 책 역시 옛날 있었던 학교로서의 태학에서 배우던 교과서가 아니겠지요. 주자 당시(1130-1200년) 온고지신의 결과물입니다.
정자 주자 당시, 「태학」은 『대학』이란 책과 학문으로 다시 새롭게 출생합니다. 다산의 말 「누구나 이 태학에 힘씀이 가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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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겠다」는 것처럼 대학은 만민의 學으로 새로워집니다.
이제 대학을, "대학"에서 "태학"으로 일신하려고 노력하는 본 태학경연의 처지에서 '태'의 의미를 생각하면, 그 '태'는 '小'의 상대어가 아니라 學이 본디 위대한 것이라는 의미로 봅니다. 예를 들면 마음을 明德, 峻德이라고 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德이면 그만일 것을 明이나 峻 등을 붙이는 것과 같은 용법으로 보아야 합니다. 통용하는 소학과 태학의 차이점은 태학은 소학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이론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소위 소학도 역시 태학입니다. 學이라는 것이 본디 위대한 것(太)이므로 소학도 태학이 되는 것입니다.
◈道
도는 우리말 길이 가장 합당한 말로 보입니다. 길은 굴과 골의 중간에서 굴과 골을 연결하는 중성모음으로 이루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굴은 음성이고, 골은 양성 모음이 아닙니까. 道는 머리 首와 발과 관련한 '착'(걸어가는 발足, 소위 책받침이라는 것)이 합쳐져 이루어진 말입니다.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首는 이상이고, '착'은 현실이라고 하여, 道는 현실과 이상을 '일왕일복(一往一復)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것이 道라는 의미인데, 우리말 길로 이해하는 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하고 法(道), (道)理 등 영역을 넓혀 가면 됩니다.
◈明德
明德은 두 가지 쓰임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발리승의 결과물, 즉 情(情은 마음의 물결 파동 마음결. 물결 역시 물이듯이, 마음결 情 역시 마음)으로 쓰이는 경우이고, 하나는 性으로 쓰이는 경우입니다.
►心과 명덕의 구분
明에 초점을 맞추면 明德으로 표현된 마음은 마음 본연의 밝음을 지적하여 말합니다. 明德을 기준으로 마음을 말하면, 사람 사람의 마음은 다 같습니다. 聖人의 마음(明德)과 衆人의 마음(明德)이 다 같습니다. 그러나 心을 기준으로 말하면 사람사람이 다르고 聖人과 衆人이 더욱 다릅니다. 聖人의 마음은 淸(청: 맑음)하고 粹(수: 잡것이 없음, 얼룩이 없음)하지만 중인의 마음은 濁(탁: 흐림)하고 駁(박: 얼룩져 있음)하며 그 정도가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명덕-모든 사람의 명덕은 다 같다. 心-사람 마다 다르다"
또 氣發理乘으로 말하면 온전히 性(인의예지)을 따라 발한 마음이 明德입니다.『중용』에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性을 따르는 것이 道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明德은 道心(도심)의 다른 말입니다. 그러므로 明明德은 道心을 밝히는 일입니다. 이 때의 道心은 人心과 상대하는 道心 즉 人心 道心의 道心이 아닙니다.
<人心과 道心 설명 보기>
心은, 心卽氣(심즉기: 心은 곧 氣이다)로서 性卽理(성즉기: 性은 곧 理이다)의 性과 상대하여 性을 외면하고 사용하기도 하는데, 明德으로 표현한 마음은 이렇게 쓸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性을 포함하여 쓰입니다. 心과 性은 그릇과 거기에 담긴 물(水)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이 그림에서 그릇과 물을 포함한 개념이 情)명덕은 반드시 情이며, 또한 性이므로 그릇과 물을 다 포함하여야 합니다. 남당 한원진의 명덕설을 따른 것이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心은 性과 상대하여 취급할 수도 있으나, 명덕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남당의 명덕설 보기>
- 광석과 금(광석은 心, 금은 명덕에 해당하는 비유) |
心은 鑛石(광석)과 같고 明德은 광석 안에 포함된 金과 같습니다. 금광에서 금을 캔다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금이 박힌 광석을 캔다는 말입니다. 캔 광석을 빻거나 하여 돌에서 금을 분리하지요. 분리과정을 거칠 것도 없이 땅속에서 캐면 바로 금인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광석=금」인 경우는 心이 바로 明德인 경우입니다. 광석으로 말하면 금을 함유하고 있는 정도가 광맥에 따라 각기 다르나, 금으로 말하면, 타산이 잘 안 맞는 광맥의 금이나, 돈을 잘 벌어주는 광맥의 금이나 다 같은 금입니다. 心으로 말하면 衆人과 聖人의 心이 다르지만 明德으로 말하면 聖人의 心(明德)이나 衆人의 心(明德)이나 다 같습니다.
心의 淸濁粹駁(청탁수박)의 문제도 광석의 비유로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
- 德은 得 |
德은 得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받은 것, 얻은 것, 얻어서 된 무엇」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늘로부터 인의예지라는 性을 命 받았으니 그것이 德입니다. 性稟(성품)이라고도 쓰지요. 이 때의 稟(품)도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稟 대신에 德을 붙이면 性德, 德性이 됩니다. 性은 德인 것입니다.
임명장(命 받은 것: 임명장 운운하는 것은 하늘을 의인화하여 하는 설명입니다. 그리소도 교의 경전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命령(말씀)을 통하여 창조하는 모습을 그리면 됩니다)이 종이나 천이 아니고 劍(칼)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번쩍번쩍 하는 칼에 인의예지라는 命을 새겼다고 하고 이것을 받았다고 하면 이 칼이 또한 明德입니다. 따라서 德은 性을 가리키기도 하고(임명으로 理, 말씀_로고스), 性을 포함한 天劍(천검, 임명장으로 氣稟을 겸함, 양심이라고 하고 양지라고도 하고 양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 )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天劍(임명장)이 바로 氣發理乘한 心으로서의 明德입니다. 이 칼을 제대로 쓰자고 하는 것이 明明德입니다. |
- 明德은 理性 |
明은 빛의 理를 말합니다. 빛으로 인해 발하는 熱 色 등은 氣에 해당합니다. 德은 性이니까 德대신 性을, 明은 理이니까 明 대신 理를 대입하면 明德은 理性(리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理性이라는 표현도 明德의 경우처럼 인의예지라는 性을 나타내기도 하고 理性에 따르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로 쓸 수가 있습니다. 理性은 明德의 생활화한 다른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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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明德이 곧 新民
►因其所發而遂明之(인기소발이수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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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德이 발하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明德을 밝힌다.」집주의 설명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明明德이 곧 新民임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집주의 이 말씀이 세주에 이렇게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보았을 때 發하는 '어쩌나' 하는 마음, 不義를 보았을 때 발하는 羞惡之心(수오지심), 賢人을 만나면 발하는 恭敬之心(공경지심), 남의 선행을 보면 발하는 탄모의 情 등이 다 明德의 발현이다...... 발하는 단서를 놓치지 말고 이어서 밝혀야 할 것이다
위처럼 四端의 마음이 발하였다면 발하는 단서를 만들고 발한 마음을 닦을 상대가 있습니다. 우물에 빠지는 아이의 경우라면 아이가 나의 마음에 明德을 발하게 하였고, 아이의 상태가 달려가서 구하는 공을 들이게 합니다. 그 아이와 더불어 나의 明德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明明德이고 어디까지가 新民인지 구분이 안갑니다. 왜냐하면 明明德과 新民이 하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新民의 각론인 조목으로 말을 하면, 이렇합니다.
그 아이의 가족으로서 그렇게 하였다면 가족의 일원과 더불어 |
明德을 밝힌 것으로 齊家의 일입니다.
봉급을 받는 안전요원으로서 그렇게 하였다면 국민(공동체)과의 관계에서 발한 明德을 밝힌 것으로 治國의 일입니다.
외국인으로서 그렇게 하였다면(적국의 아이라고 하면 더 실감나겠지요. 예를 들면 전투 중인데 적국의 아이가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하였다면) 천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한 明德을 밝힌 것으로서 平天下의 일입니다.
明明德과 新民의 경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新民은 아이를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와의 관계에서 발한 나의 마음을 혁신진보케 하는 일입니다.
구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꼭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구해졌다고 그 아이가 꼭 새로워진 것은 아닙니다(물론 죽거나 다치거나할 아이가 온전한 것이 새롭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이는 이런 것을 다 잊고 전과 다름없이 우물가에 또 기어갈 것입니다. 범법자에게 형을 내린다고 옥관이 그 범법자를 새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옥에서 더 큰 범법을 구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의 마음 明德(나라 공동체를 향한) 이 적절히 발휘되었다는 것, 그것으로써 意(나라 공동체를 향한 나의 意)가 한층 誠하여 졌다는 것, 明德이 일층 밝아진 것입니다. 그 만큼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明德을 밝히는 시기 적절, 대처 적절한 행위가 공동체에 덕이 된 것입니다.
因其所發而遂明之(인기소발이수명지. 명덕이 발하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바로 밝혀)에서 明明德과 新民이 하나라는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명덕을 유발하는 저 어린아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린이의 상황이 나의 마음에 측은한 마음을 발하게 하였고, 그 어린이를 구하기 위하여 여러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바로 明明德입니다. 저 어린 아이가 아니면 밝힐 명덕도 없는 것이고 저 어린아이와 더불지 않으면 밝힐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표현된 것이 新民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明明德은 원론이며 新民은 실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명명덕과 신민은 원론과 실제관계에 있는 동의어입니다. 동일한 일입니다.
►①旣自明其明德 又②當推以及人 ③使之亦有以去其舊染之汚
「①자신의 明德을 밝혔다면 또 ②밝힌 마음을 타인에게 미루어가서 ③그 사람도 역시 지난 시기의 때를 벗겨낼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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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집주의 말입니다.
①은 明明德, ② ③은 新民에 대한 설명으로 보입니다.
집주는 明明德과 新民을 하나의 일로 파악하지 않고 있습니다. 明明德을 관념의 차원에 매어두고 있습니다.
明明德이란 ③이 이루어지도록 나의 마음을 다듬는 일입니다. 나의 明德을 밝히는 일, 그리고 저의 明德을 밝히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저의 明德이 밝아질 수 있도록 나의 明德을 밝히는 것이 바로 明明德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나 아닌 타인이 등장합니다. 그로 인하여 내 마음에 인 明德을 그와 더불어 밝히는 것이지 저(他)의 마음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明明德의 실제 상황을 설명하자면 반드시 저가 등장합니다. 저가 바로 신민의 民입니다. 내 마음에 明德을 발하게 하고 내 마음을 밝힐 수 있게 하는 사람이 저 사람으로서, 이러한 뜻이 新民으로 표출되어있는 것입니다. 新民은 自新與民(자신여민: 民과 더불어 스스로를 새롭게 함)입니다.
◈新民과 親民
新民이냐 친민이냐라는 다툼은 新民이 自新與民이라고 하는 말에서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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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民이 自新與民이 아니라고 하는 한에서, 新民이 옳으냐 친민이 옳으냐는 사람 마음 대로 입니다.
기호에 따라 親民으로 나아갈 수 있고 新民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自新與民임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라고 하더라고 新民이 옳습니다. 新民이라고 해야 그 조목이 제가치국평천하와 어울리고(齊治平은 모두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新의 조목으로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新民의 틀에서 自新與民(자신여민)라는 발견이 가능합니다. 만약 신민설이 없고 그대로 친민으로 읽었다면 친민은 '민을 사랑함"이 되어여러 박애주의 사상의 아류로 전락하고 맙니다. 유학의 사상은 거기서 끝장 나고 맙니다.
신민이 自新與民으로 제모습을 드러낸 이상 친민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본문의 親은 新이 옳다(親當作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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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은 下民인가?
정다산의 『대학공의』에,
新民 두 글자는 역시 하민 즉 백성을 지적하여 하는 말이다. 齊家의 家가 新民의 民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면 안 된다. 부모형제를 民이라 할 수 있겠는가. 堯典(요전)에, "큰덕을 밝히사 九族(구족)을 친애하시고 백성을 빛나게 하셨다."라고 하여 九族과 백성도 구분 지어 말하였는데 하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을 가지고 내가 民을 새롭게 하였다고 하면 되겠는가. |

라고 하였습니다.
다산의 말씀은, '民에 부모형제를 포함시키면 안된다'입니다. 태학론에 따라서 이 말씀에 반론을 해 보겠습니다.
반론①
효도하는 것은 齊家의 한 일로서 新民입니다. 新民은 明明德입니다. 明明德은 自明입니다. 스스로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新民은「民을 새롭게 하는 것」즉 治人으로 요약되는 말이 아닙니다. 孝라는 것은 부모라는 존재에 대하여 자식으로서 내 마음에 발하는 明德입니다. 따라서 이 마음 明德을 밝히기 위하여는 부모가 있어야 하고 부모와 더불어야 합니다. 부모 없이 무슨 효심이 발할 것이며, 부모와 더불지 않으면 어떻게 효심 명덕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新民의 新은 明明德을 대치 해석한 말이며, 民은 나의 마음에 효심을 발하게 하는 物, 더불어 마음을 밝힐 수 있게, 새롭게 할 수 있게 하는 物로서 가장 중한 物인 사람(人民)을 지적한 표현입니다. 新民은 이러한 民을 明明德에 얹어(입혀) 대학을 실제화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新民은 民과 더불어 스스로를 새롭게 한다는 뜻의 自新與民(자신여민)입니다. 治人인이 아닙니다.
반론②
君-臣, 父-子, 夫-婦 등과 같이, 말은 은연증 상대어를 암시하여 쓰이기도 합니다. 新民의 民의 경우도 어떤 상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民-官, 民-軍, 民-君, 民-國, 民-天 등과 같이 말입니다. 新民의 民의 상대어는 나(我)입니다. 그리고 新民의 주어, 주체는 나(我)입니다. 왜냐하면 新民은 明明德의 다른 말이고 明明德은 自明이고, 自明은 修身이기 때문입니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修身으로 본을 삼아야 할 것이다(경1장)」고 하였으니 修身의 주체는 특정지위의 누가 아닌 보편적인 나(我) 各人임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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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사람에 대하여 혐오하는 그것으로써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 대하여 혐오하는 그것으로써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 대하여 혐오하는 그것으로써 뒷사람을 이끌지 말며
뒷사람에 대하여 혐오하는 그것으로써 앞사람을 따르지 말며,
오른쪽에 대하여 혐오하는 그것으로써 왼쪽과 사귀지 말며
왼쪽에 대하여 혐오하는 그것으로써 오른쪽과 사귀지 말 것이니,
이러한 도리를 일러 絜矩의 道(絜矩之道 혈구지도)라 한다(전10장)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하 좌우 전후의 한 사람으로 위 문장은 그들과 더불어 하는 修身, 誠意의 실제 모습입니다. 따라서 전후 좌후 상하의 사람들은 民의 실제입니다. 위의 본문은 民과 더불어 나 각인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新民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당연히 위 문장의 주어는 역시 나 각인입니다. 따라서 대학의 주체는 나 各人이지 지배자 등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民은 物我의 상대를 기본으로 하여 物중의物인 사람을 가리키며, |
修身의 주체인 나 各人과 짝하는 말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전후 좌후 상하의 사람이 다 民입니다. 이들과 더불어 하는 修身이 新民인 것입니다. 혈구지도는 신민의 그림입니다. 정리하면 修身의 주체는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에 해당하는 나 각인이며, 나 각인의 행위는 明 즉 新이며, 행위의 대상(목적어)은 明德이며, 주체의 상대어는 전후좌우상하의 民으로 與民(여민: 민과 더불어)의 뜻입니다. 이러하기에 民을 백성 등의 정치적 용어로만 보면 안되는 것입니다.
반론③
『태학』을 통치자에게 적용하면 民은 하민 즉 백성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적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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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부모에게 효도하면 인민들은 효심을 일으키고
임금이 어른들을 공경하면 인민들은 弟심을 일으키고
임금이 고독한 종족을 잘 돌보면 인민들은 임금을 등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군자는 혈矩(혈구)의 道를 지닌다
부형에게 효도하는 것(老老),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長長), 고독한 종인, 또는 인민을 보살피는 것(恤孤)은 임금이 임금으로서 수신 잘하는 모습, 모범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더불어 임금이 나날이 자신을 새롭게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태학을 제왕의 학이라고 하여 수신의 주체를 임금에게만 돌리면, 이는「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修身으로 본을 삼아야 할 것이다(경1장)」라는 말씀과 다르고, 民을 하민에 고정하여 民에서 '부형' ' 어른' '고독한 종인'들을 빼버린다면 임금은 더불어 스스로를 새롭게 할 사람의 반 이상을 잃고 말 것이고, 그로 인하여 인민들은 보고 감화될 바를 잃게 됩니다. 제왕의 학이라고 하여 民을 하민에 귀속하는 것은 일부 맞지만 전체 적용은 불가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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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순에게 적용해 봅니다. 순임금은 요임금에게서 允執厥中(윤집궐중" 진실로 中을 잡아라)의 과제를 받았고, 순임금은 人心道心과 精一(정일: 정밀하고 한결같이 대처함)을 더하여 禹에게 전했습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서경』「 우서」 '대우모').
이것이 바로 황제학의 시조라면 시조인데, 그것의 대상이라는 것이 불과 인심도심일 뿐이며 동시에 유학의 대상입니다. 태학 역시 유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라면 태학의 대상도 역시 인심도심일 뿐입니다. 인심도심이 하민 백성에 대해서만 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유학은 반쪽짜리 학문이 되고 맙니다. 요순 두 분이 전한 과제는 원론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家에서 행하면 齊家가 되는 것이고, 國에서 행하면 治國이 되는 것이고, 천하에서 행하면 平天下가 되는 것으로, 태학은 이 과제의 체계화입니다. 家는 부모형제, 내외를 기본으로 한 인심과 도심이 발하는 무대이며, 부모형제 내외 등의 사람은 인심도심을 유발하는 民이며 동시에 더불어 정일(精一)하게 할 사람 民입니다. 國은 군신관계에 바탕한 인심도심이 발하는 무대이며, 군신은 인심도심을 유발하는 民이며 더불어 정일하게 할 民입니다. 이것이 각기 齊家이며 治國입니다. 이러한 齊家와 治國 등을 하나로 묶어 표현한 것이 新民으로서 新民은 治人이 아닌 것입니다. |
반론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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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덕을 잘 밝히사 구족을 친애하셨다. 구족이 친목한 후 백성을 고루 다르리시니 백성들은 스스로 덕을 밝혔다.
「요전」에서는, 「九族과 百姓도 나누었는데 부모형제를 백성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가 다산의 주장입니다. 펼치면 부모형제 구족 백성이며, 합하면 民이 바로 新民의 民입니다. 物我의 용법으로 보면 나 아닌 것은 다 物로서 부모형제도 物인데 부모형제 등의 人이 民이라고 하여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格物의 物에 사람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거나 사람에 가족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면 대학이 의미 전무한 것이 될 겁니다. 부모 형제도 저 하늘도 物로서 格의 대상, 대학의 대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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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民-明德을 발하게 하고 더불어 明德을 밝힐 상대
新民은 태학의 실제를 언급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新民의 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태학의 바른 이해를 진일보케 합니다.
修身이란 무엇인가를 상기합시다(대학본의 정심수신 참조).
修身이란 情無不中(정무불중)입니다. 修身은, 마음에 발하는 情이 과불급이 없는 상태가 되도록 닦는 공부입니다. 그러므로, 修身이 가능하자면 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情은 거저 생기지 않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물과 같아서 누가 거기에 돌을 던져야 결이 입니다. 마음에 인 물결이 마음결이고 情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닦을 情이 發하려면 그 情을 일으키게 할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모든 物에 대하여 情을 일으킵니다. 반응을 합니다. 物 가운데의 物은 사람입니다. 사람 가운데의 사람은 오륜의 사람들입니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의 사람들이 사람 중의 사람입니다. 그들이 사람 중의 구체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다섯 관계가 사람의 幸不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군신 관계가 없으면 먹고 살기가 곤해집니다. 임금은 먹고 살 터전을 마련하고 그것을 안정적으로 지키는 사람입니다. 경제(足食족식)와 안보(足兵족병)가 군신 관계의 존재이유입니다. 이 관계를 결하게 되면,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하여 발하는 마음을 바르게 닦을 기회를 잃는 것이고, 그 결과 먹고 살 수가 없는 지경, 또는 먹고 살기에 매우 곤한 지경, 안전을 지키기에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부자 관계는 나아주고 길러준 은혜의 관계입니다. 누구든 세상에 태어난 이상 부모가 있습니다. 나를 낳아 준 은혜는 이 세상 무엇보다 귀한 은혜입니다. 당연히 그 은혜를 준 부모에 대하여 발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 부자 관계를 결하게 되었다면, 또는 부모 자식의 사이를 차단당한 상태에 처해 있다면 당연 부자 관계에서 발하는 마음을 바로 다듬을 길을 잃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修身에 막대한 장애가 됩니다. 부부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륜 관계 중 결하는 것이 많을수록 情을 다듬어낼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의 修身)은 보잘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修身은 홀로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라 더불어야 가능한 공부입니다. 이 더불 사람을 밝혀 태학의 실제를 표현한 강령이 바로 ‘태학의 도는 新民에 있다(大學之道在新民)’는 표현입니다. 新民의 民의 구체는 오륜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新民은 ‘民을 새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 ‘民과 더불어 明德을 새롭게 한다’는, 明明德의 실제 모습을 표현한 말로 보아야 합니다. ‘오륜의 사람들과 더불어 명덕을 새롭게 한다.’ 明明德은 태학의 當爲 를 표현한 강령이고, 新民은 태학의 실제, 明明德의 실제를 표현한 강령이 되는 것으로 明明德 외에 힘써야 할 별도의 공부로서 新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明明德과 新民은 동어 반복으로서 明明德은 원론, 新民은 실제를 표현하였습니다.
明明德과 新民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은 지난 시대에 왕양명이 밝혔습니다. 그러나 왕양명은 新民을 버리고 親民(친민)을 고집함으로써, 民에 담긴 뜻과 新에 담긴 뜻을 유학본연의 의미(爲己之學 위기의 학)에 따라서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유학을 여타 박애주의의 아류로 변질시키고 말았습니다.
新民은 ‘民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民과 더불어 자신의 明德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 新民 ...... 태학의 실제-新明德與民(民과 더불어 明德을 새롭게 함)
民이라는 실제物을 통하여 明德이라는 관념, 원론을 실제화 합니다. 明德이라는 것은 일상 마음으로 통하는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매우 종잡을 수 없는 物입니다. 出入無時하며(때 없이 드나들기도 하며) 莫知其鄕한(어디로 튈지 모를) 것이 마음이므로 다만 마음만을 고집하여 그것을 밝힌다고 하면 관념의 세계에서 노니는 일로서 무익한 일일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밝히는 일은 반드시 실제화로 가는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장치가 바로 新民입니다. |
◈ 新民은 爲己
(1)爲己와 爲人에 대한 생각들
爲己와 爲人은 공자의 말씀입니다. 爲己와 爲人은 우리말로 번역하기 까다롭고, 그대로 놓고 이해하기도 까다로운 면이 있습니다. 인생 연륜이 든든하지 않으면 이해하기에 힘이 부치는가 봅니다.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와 함께 爲己와 爲人은 아직은 일반인들에게 올바로 이해되지 않고 있는 유학의 주제입니다.
爲己 爲人과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를 연결하는데서 빚어지는 오해를 살펴보고 爲己 爲人과 태학의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관계를 설명하겠습니다. [ ]은 인용문에 대한 비평입니다. 아래의 인용문들은 爲己 爲人에 대한 생각이 바르지 않은 것들입니다.
°1 해설자가 사서삼경을 읽었다면 수신과 치국, 또는 위기(爲己)와 위인(爲人)으로 두 사람의 철학 체계를 설정해야 할 것이다.
[修身을 爲己로, 治國을 爲人으로 연결하는 구도입니다. 修身과 나란히 쓰는 治國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태학 팔조목의 하나인 治國입니다. 태학은 유학의 학문이고 유학은 爲己의 학입니다. 그런데 治國이 爲人이라면 治國이 태학이 아니며 유학이 아니라는 말인데 안될 말입니다.]
°2 과거를 위해 하는 공부를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 하고 자기 수양을 위해 하는 공부를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한다. 남명은 지배계층의 젊은이답게 처음에는 과거에 뜻을 둔 것 같으나. 토지와 권력을 독점한 훈구파에게 체제변혁을 시도한 사림파들이 죽음을 당하고 지배계층의 권력싸움으로 인해 생산활동을 담당하는 민중들의 고통만 늘어가는 현실 앞에서, 중앙정계로의 진출을 포기한 것 같았다. 그의 나이 37세 때 과거를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는데 과거 포기에 상당한 결단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과거공부와 자기수양을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기수양을 위해하는 공부를 爲己之學이라고 하는 말은 옳지만 그 말을 하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남명선생이 과거를 포기하고 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고 하는데, 과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爲人之學을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과거를 위해서 공부를 해도 爲人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爲己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을 읽으면 과거를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 또는 과거를 통해서 벼슬하는 사람은 爲人하는 사람으로 孔門의 울타리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爲人하는 행위나 爲己하는 행위나 다 겉모습은 같습니다. 다른 것은 속입니다. 과거를 준비하지 않는 행위에도 爲人이 있고 爲己가 있으며, 과거를 준비하거나 벼슬을 사는 행위에도 爲人이 있고 爲己가 있습니다. 爲己와 爲人의 차이는 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습니다.]
°3 공부의 목적을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구별할 때, 위기지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① 자기 자신의 성찰만이 진정한 공부가 된다.
②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출세를 위해 공부한다.
③ 남이 무엇이라고 하든 자신의 전문성을 신장시키기 위해 공부한다.
④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보다는 여러 분야를 광범위하게 공부한다
[이 인용문은 교사임용시험 문제의 하나입니다. 답은 1번으로 보이나 3번도 가능한 답이고 4번도 가능은 합니다. 가장 가까운 답으로 보이는 1번의 '자신의 성찰만'이라는 말이, 이 문제를 낸 사람이나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어떻게 전해질까 하는 것이 의문입니다. ‘자신의 성찰이 진정한 공부가 된다’고 말하는 것과, ‘자신의 성찰만이 진정한 공부가 된다’는 말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자신의 성찰’이라는 것이 家 國 天下를 떠난 것, 또는 家 國 天下와 상대, 대립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 1번은 전혀 답이 되지를 않습니다. 1번이 답이 되려면 자신의 성찰이라는 것이 家 國 天下에 대한 성찰, 家 國 天下를 위한 성찰일 경우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낸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은 자신의 성찰을 家 國 天下와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4 공자가 위인지학(爲人之學), 즉 남을 위한 학문보다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을 우선한 것에서나, 조선조의 성리학자들이 수기(修己)를 치인(治人)보다 더욱 중요하게 내세운 것에 볼 수 있듯이, 지식은 고상한 삶을 추구하는 귀족들의 개인적 인격의 요소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爲己를 고상한 사람들의 개인적 인격적 요소에 배당하고 있는 듯합니다. 또 學을 지식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나 봅니다. 學은 學 한자만 홀로 쓰면 知와 行을 겸합니다. 學이 行과 관련한 말과 상대하여 쓰이면 그 學은 오늘날 말하는 學文과 같은 의미로 지식을 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修己와 治人을 상대하여 修己를 爲己에, 治人을 爲人에 배당하는 듯합니다. 齊家 治國 平天下는 治人이 아닙니다. 만약 齊家가 治人이라면 자식은 누구를 다스려야 합니까. 治國이 治人이라면 인민들은 누구를 다스려야 합니까. 齊家治國에 자식과 여자와 인민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한 齊家 治國 平天下는 유학이 아닙니다. 齊家나 治國이 특정인만 주체가 된다면 분명 이러한 齊家 治國은 인류보편학인 유학이 아닙니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 모든 사람이 태학의 주체입니다. 臣과 인민이 아니면 君이 누구와 더불어 情을 닦을 것이며, 정치를 할 것이며, 君이 아니면 臣民이 누구와 더불어 情을 닦겠습니까. 자식이 부모가 아니면 누구와 더불어 자식의 情을 닦을 것이며 부모가 자식이 아니면 누구와 더불어 부모의 情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齊家 治國 平天下는 治人이 아닙니다. 齊家 治國 平天下는 修身, 修己입니다. 그러므로 齊家 治國 平天下는 爲人이 아니고 爲己입니다.]
°5 총신 구성원은 자기를 위한 학문·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한 학문·위인지학(爲人之學)을 해서는 안 된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한 학문은 자기만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며, 죄의 음흉한 성격에 사로잡혔다는 교활한 형태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을 배출하는 총신 구성원은 하나님을 위한 학문·위신지학(爲神之學)을 해야 한다(필자 주-이 글의 출처가 총신대보임으로 미루어 보아 ‘총신’은 총회신학대학의 줄임말로 보임).
[爲己를 利己로, 爲人은 利他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爲己는 利己가 아니고 爲人은 利他가 아닙니다. 앞서 爲己 爲人의 겉모습은 같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속이라고 하였습니다. 속이란 마음, 마음 씀씀이 입니다. 이 인용문이 그리스도 신자의 글이니 그리스도교 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성경에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여주여 하는 행위에는 爲人으로 하는 것이 있고 爲己로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여주여한다는 것은 천국에 들고자 하는 것이나, 주여주여 해도 천국에 들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 주여주여가 爲人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爲己 爲人의 爲는 ‘위하여’로 번역하면 이 인용문처럼 爲神이라는 이상한 단어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오해를 교정하기 위해서 人心과 道心이라는 용어를 알아야 합니다.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주여주여하는 행위에 本이 있으면 爲己가 되고, 주여주여하는 행위에 本(알맹이)이 없고 겉만 있으면 爲人의 행위가 됩니다. 전도하는 행위에는 비록 초라하더라도 먹고 살 것과 명예가 따르지만, 전도하는 행위는 먹고 살기 위해서, 명예를 구하기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교회 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주여주여 한다면 이는 속알맹이(뿌리)를 쏙 빼버리고 하는 것이므로 爲人이 됩니다. ‘영혼을 잃으면......’ 云云하는 성경구절이 있는데, 이러한 주여주여, 즉 爲人으로 하는 주여주여는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잃게 하는 행위입니다. 爲己는 영혼을 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을 지어낸 사람의 말대로 爲神을 한다고 합시다. 그 爲神이 알맹이 빠진 爲神이라면 그것은 爲人입니다. 똑 같이 爲神을 해도, 어떤 이는 爲己로 하고, 어떤 이는 爲人으로 합니다. 爲己로 하는 爲神은 생명을 주겠지만, 爲人으로 하는 爲神은 죽음입니다.
이상 그리스도교적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爲己 爲人이 爲神과 단어의 형식이 같다고 하여 爲己 爲人과 상대가 되는 말로 사용한다면 전혀 엉뚱한 길로 가게 됩니다.]
°6 선비는 구저기(求諸己)-자기에게서 모든 것을 구하고 자기에게서 모든 것을 찾는다. 선비의 학문은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남을 바로 세우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학문이다.
[이 인용문에서 말하는 남과 자기는 분명 대립하고 있습니다. 태학에서 말하는 ‘자기’ 즉 ‘身’은 남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태학의 ‘자기’, ‘자신’, ‘身’은 남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태학의 ‘자기’, ‘자신’, ‘身’은 남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더불 사람으로 봅니다. ‘자기’, ‘자신’, ‘身’을 닦을 수 있게 하는 더불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태학은 이러한 ‘자기’, ‘자신’, ‘身’을 닦는 학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세우는 일을 하되 그것은 爲人이 아니라 爲己이며 구저기(求諸己. 자신에게서 구함)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7 조선시대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이 주장한 것은?
① 박학(博學)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위인지학(爲人之學)보다 의리(義理)를 밝히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근본이다.
② …….(생략)
[이 문제의 답은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1번이 옳은 글이든 틀린 글이든 1번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고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된 것입니다. 박학과 이용후생에 종사하는 것이 爲人之學이고, 의리를 밝히는 것이 爲己之學이라고 누가 생각하였다면 틀린 생각입니다. 박학과 이용후생에도 爲己와 爲人이 있는 것이고, 의리를 밝히는 학에도 爲己와 爲人의 구분이 있습니다. 박학과 이용후생을 爲己로 하면 그 박학과 이용후생은 爲己之學이 되며, 爲人으로 하면 爲人之學이 됩니다. 의리를 밝히는 학도 爲己로 하면 爲己之學이 되고 爲人으로 하면 爲人之學이 됩니다. 爲己와 爲人의 겉모습은 다 같은 것입니다. 더욱이, 의리를 밝히는 학과, 박학 이용후생을 위한 학이 별개의 학이 아닙니다. 박학 이용후생이 아닌 어디에 의리가 존재할까요.]
°8 공자학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공자는 제일 먼저 배우는 일을 언급하였습니다. 이 배운다는 일은 모자라는 자신의 내면을 채우고 넓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爲己라는 것이지요. 이 爲己는 爲人과 짝을 이룹니다.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짝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爲己 다음에 爲人을 말합니다…….(중략)
爲己와 爲人의 상관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爲己 →修身, 修己, 明明德, 正心, 誠意, 格物致知, 論語 제 1편 學而, 주체, 주관, 개인적 차원, 仁
爲人→齊家, 治國, 平天下, 논어 제 2편 爲政, 객체, 대상, 공동체와의 관계, 사회적 차원, 禮
[이 글을 쓴 사람은 자신이 주장한 것을 자신이 부정하고 있습니다. 공자의 학은 爲己之學이라고 해놓고는 齊家 治國 平天下를 爲人에 배당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논어 위정편을 爲人에다가 배당하였습니다. 그러하다면 齊家 治國 平天下는 공자의 학이 아니며, 논어 위정편도 공자의 말씀 또는 그 학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데 말의 수미불통이 매우 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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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止於至善에 관한 어떤 해석
天儒印(천유인)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天은 천주교를 儒는 유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印은 같다는 뜻을 나타낸 것인가? 거기에, 止於至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至善한 천주를 뵈옵고 안식소에서 안식하는 것」 천당 가서 영복을 누리는 것으로 止於至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처지에서 보면 근사한 해석입니다. 지어지선을 천당가서 영복을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면 유학의 정신은 거기서 발전 끝입니다.
◈ 善과 至善
(1) 善과 善의 기준
- 善이란, 마음이 욕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욕구에 좋은 것, 합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 마음의 욕구도 시공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서로 충돌하는 등 다르고, 사람사람의 욕구가 서로 달라서 충돌합니다. 이 충돌이 불상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다툼이라는 것이 이 욕구의 충돌일 테니까. 善으로 여겨지던 것, 즉 마음의 욕구하는 것이 不善을 불러옵니다. 그러므로, 다만 마음이 욕구하는 것을 가지고 善이라고 할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의 원리 性(인의예지)
마음의 욕구하는 것을 善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으므로, 마음의 욕구가 善의 기준으로 삼을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욕구)의 원리입니다. 마음은 善할 수도 있고 不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원리는 善한 것으로 봅니다. |
이 원리를 善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세상 善의 까닭을 설명할 길이 없어집니다. 마음은 발동하는 氣입니다.
마음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발동하도록 하는 원인자입니다. 발동하는 氣는 善할 수도 있고 不善할 수도 있지만 발동케 하는 원리, 理는 순선무구합니다. 이러한 理가 마음에 구체화되면 그것을 性이라고 부릅니다. 性은 마음에 내재하는 天(理), 하늘(의 뜻)입니다. 따라서 마음 안의 천리인 性은 善한 것 또는 善이고, 이 때문에 사람이 善하고 세상이 善하며 존재하는 것은 善하다고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마음의 원리인 性을 善의 기준으로 삼으면 됩니다.
- 양심
그런데 性은 만지고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므로 수평기나 온도계처럼 그냥 보고서 해득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性의 善함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통해서입니다. 맹자의 사단은 性(善)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단서입니다. 사람 마음에 측은지심을 발하게 하는 원리는 仁, 수오지심을 발하게 하는 원리는 義, 사양지심을 발하게 하는 원리는 禮, 시비지심을 발하게 하는 원리는 智. 사단은 일상 말하는 양심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 네 가지 양심을 지목할 수 있습니다.
- 양심의 업그레이드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 역시 善할 수도 있고 不善할 수도 있는 氣의 발동입니다. 그러나 사단이라고 부르는 양심의 발동은 그 원리인 性에 순명한 것이므로, 양심은 원론적으로는 善한 것입니다. 이러한 양심은 率性의 道心입니다. 善한 것이지만, 원론을 떠나 현실에 적용될 적에 양심도 역시 不善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氣의 발동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규모, 양심의 닦임 정도가 보잘것이 없을 경우 비록 원론적으로 善한 양심이라고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 그 양심이 판단하는 것이 善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善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러나 양심이 不善의 소지가 있지만 최종적으로 양심을 따라 판단할 수뿐이 없습니다. 또 그러나 양심을 따라 판단하는 데는 조건이 따릅니다. 양심을 지속적으로 확충한다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계속 갈고 닦아야 하며, 불완전한 자신의 양심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입니다. 양심은 지속적으로 소위 요즘말로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양심은 계속 업그레이드 가능한 物입니다.
- 선지식으로 존숭하고 배워 새롭게 함
업그레이드, 확충하는 길은 배우는 것입니다. 선인들의 양심이 글(전적)로 전해지고, 家 國 天下의 관습과 법과 례(禮)로 제정되어 전해옵니다. 이러한 것에 비추어 이미 갈고 닦아온 양심을 계속 확충하여 양심의 규모를 크게 하고 밝기를 더하게 되면 양심의 원리를 더욱 잘 읽어 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양심은 善을 판단하는데 탈이 적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물려 받은 전통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한다는 것은 지선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2) 善과 家 國 天下의 상황
善을 말하면서 善의 판단 기준이 문제가 되는 것은, 善이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善이란 시공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실의 善은 시공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어제의 善이 오늘의 善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저기의 善이 여기의 不善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여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고, 동양과 서양이 충돌합니다. 따라서 善 문제가 나오면 반드시 시공이라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家 國 天下라는 시공의 상황이 없이 말하는 善이란, 다만 관념일 뿐입니다.
(3)과거의 조명과 미래의 전망 하에서 至善
지선 차원의 善은 절대선이 아니고, 시공의 상황에서 말하는 상대선입니다. 지선은 이러한 시공 상황, 지금 여기의 처지에서 볼 때 가장 선한 경지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은 경지는 미래의 전망과 과거의 조명 없이 불가능합니다.
(4) 至善-中庸-時中-家國天下 中
시공의 상황은 구체적으로 家 國 天下의 상황입니다. 家 國 天下를 떠나서 善을 말할 수 없고 家 國 天下의 구체적 상황을 떠나서 至善이 있을 수 없습니다.
齊家 治國 平天下는 家 國 天下의 상황에서 修身하는 것입니다. 修身은 情無不中(정무불중: 마음, 감情에 과함도 지나침도 없게 함)하게 하는 공부입니다. 家 國 天下는 中의 상황을 연출하는 현장입니다. 이 中의 경지가 至善입니다. 오늘의 처지에서 과거를 돌아 볼 때 형편없는 것이지만 과거 그 시절에는 그게 최선이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오늘을 볼 때 보는 눈만 높은 사람에게는 오늘이 형편없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최선, 至善일 수 있습니다. 至善은 어느 깨달은 자의 독점물이 아닌 것입니다. 누구나 미인을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의 여자는(여자라면 남자는) 머리 속에서 막연히 그리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막연한 머리 속의 아름다운 여자를 찾아만 다니다가 일생을 마친다면 不善의 지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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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공자를 時聖(시성)으로 소개합니다. 時聖의 時는 時中입니다. 時는 공간의 空을 으레 포함하므로 時空입니다. 그 時空은 구체적으로 家 國 天下, 家 國 天下에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時中은 家 國 天下의 中으로서, 中은 반드시 家 國 天下라는 시공의 상황이 전제된 말입니다. 家 國 天下가 없다면 中도 없는 것입니다. 이 中은 곧 태학, 齊家 治國 平天下의 표적이 되는 至善입니다. |
◈ 止
止는 ‘그칠 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止於至善을 번역할 때도 ‘그칠 지’ 그대로, ‘至善에 그친다’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中, 至善을 초과하지 않고 거기에서 그침.’ 中을 초과하면 失中으로서 至善이 못됩니다. 그러니 거기서 그친다는 해석도 의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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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에서 止는 不遷(불천: 옮겨가지 않음)의 뜻으로 설명합니다. 至善이므로, 더 좋은 善이 없기 때문에, 다른 데로 옮겨갈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닐 것이므로 不遷에는 지속의 뜻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데로 옮겨가지 않는 한 계속 거기에서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止는 '머물 지'라고도 읽습니다. 지극한 경지에 머문다는 것인데, 불천의 뜻과 별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머문다는 뜻에 無爲의 뜻을 더하면 비로소 至善과 짝이 될 것 같습니다. '지선한 경지에 하염없이 머문다.' 머물려고 작정을 해야만 머물러지는 게 아니라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경지의 의미를 止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선에 하염없이 머문다'고 번역합니다. |
전3장은 止於至善을 해석한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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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천자의 도읍 천리는 인민들이 머무는 곳,
제2절: ‘꾀꼴꾀꼴 꾀꼬리 언덕 숲 모퉁이에 머물고’, 공자 이 詩를 평하사, ‘아, 잘도 머무는구나! 머물 곳을 알아야 하는 법이니, 사람으로서 새만 못해서야 쓰겠는가!’ 하셨다.
제3절: ‘거룩한 문왕이시여, 아! 전대의 광명을 이어 그윽이 머무시네.’ 라고 하였다. 문왕은, 임금으로서는 仁에 머무셨고, 신하로서는 敬에 머무셨고, 자식으로서는 孝에 머무셨고, 아버지로서는 慈에 머무셨고, 국민들과의 관계에서는 信에 머무셨다. |
이상이 止於至善을 해석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천자의 도읍, 언덕 숲 모퉁이는 각기 인민, 꾀꼬리가 머물 至善한 곳이고, 仁 敬 孝 慈 信은 각기 임금, 신하, 자식, 부모 된 자가 머물 至善입니다. 그것이 至善이므로, 예를 들어 ‘孝에 머문다’고 하면, ‘효도하려고 애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無爲 자연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강령을 빌어 말하면 이러합니다. 孝라는 것은 明德입니다. ‘머문다’는 말과 함께 써서, ‘孝에 머문다’고 하게 되면, 그 孝는 明德이 明한 상태를 이릅니다. 明德이 明한 상태는 至善의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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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을 통해서 마음을 먹으면 孝나 仁이나 慈나 敬이나 信 등은 일시적으로 밝게 할 수 있습니다(回也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논어』「옹야」제5장).
그런데 신경을 덜 쓰거나 다른 일로 신경을 쓸 수 없게 되면 이러한 明德이 흐려집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가지고 ‘孝에 머문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孝에 머문다’고 하면 효도하는 행위가 무위 자연입니다. 인위로, 억지로, 작정하고, 작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심히 孝를 행하며, 그 孝가 至善의 상태인 것을 나타냅니다. |
강령을 빌어 止於至善을 표현하면, 止於至善은 明德이 明한 상태, 明德이 民과 더불어 새로워진 상태입니다. 종래의 표현을 그대로 쓰면 明德明, 民新(이 경우 民은 주어로 보면 안됩니다)입니다. 明德을 밝히려는 까닭은 明德이 明한 경지에 이르고자 함입니다. 止於至善은 이러한 경지로서 태학의 표적- 明德明(明德與民新. 明德이 民과 더불어 새로워짐), 과불급이 없는 경지, 中, 時中-을 표현한 태학의 결론입니다.
►止의 새로운 해석
止의 새로운 해석을 소개합니다.
止는 執(집: 잡다, 집다)입니다. 따라서 지어지선은 집중(執中)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렇게 지어지선을 집중과 연결하면 대학이 요순의 도통을 잇고 있음이 환히 보입니다.
서경(상서) |
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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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임금→ |
순임금→ |
윤집궐중 |
윤執궐중 |
→ 止어지선 |
이념강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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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
원론 |
실제 |
실천강령 |
명명덕 |
신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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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물치지
정심수신 |
제가
치국
평천하 |
실천조목 |
성의 | |
◈ 중용과 태학의 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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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중용 제9장)
천하국가도 제압하려면 하겠고, 봉급도 사양하려면 하겠고, 시퍼런 칼날도 밟으라면 밟을 수 있겠지만, 중용은 그런 식으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三者亦知仁勇之事 天下之至難也 然不必其合於中庸 則質之近似者皆能以力爲之 若中庸則雖不必皆如三者之難 然非義精仁熟而無一毫人欲之私者不能及也 三者難而易 中庸易而難 民之所以鮮能也(해당 집주)
천하국가를 제압하는 것, 봉급을 사양하는 것,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 등 세 가지는 지인용의 일로서 천하 사람들이 매우 어렵게 여기는 일이다. |
그러나 이 세 가지가 중용에 꼭 합치해야 하는 일이 아닐진댄 자질만 근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력으로 그것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용의 경우는 모든 면에서 이 세 가지 일과 같은 종류의 어려움은 비록 필요하지 않지만, 의리 분별이 정밀하고 어진 마음이 성숙하며 한 오라기라도 사욕이 없는 사람이 아니면 이를 수 없는 경지이다. 세 가지 일은 어려운 것 같으나 실은 쉬운 일이고, 중용은 쉬운 것 같으나 실은 어렵다. 이것이, 제대로 행하는 사람이 적은 이유이다. |
中庸不可能也를 전에는, ‘중용은 참 못하겠구나’ 이렇게 번역을 하였는데 가만 생각하니 중용이 어렵다는 것은 표현이 되었지만 중용의 의미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번역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중용은 그런 식으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물론 오역일 수도 있습니다. 나타내고자 한 뜻은, ‘천하국가를 제압하는 것, 봉급 사양하는 것,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과 같은 방식, 행태로는 중용을 이룰 수 없다’입니다.
태학은 중용과 표리 관계에 있는 학문입니다. 누구도 중용을 실현해야 한다면 누구도 태학에 힘써야 합니다. 아비 된 자, 감투 쓴 자, 천자만이 태학이라는 학문, 제가치국평천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분명 옳지 않습니다. 종래의 사람들이 생각하던 제가치국평천하, 즉 修己와 治人으로 나누어 治人에 배당하던 제가치국평천하, 벼슬과 관련짓던 제가치국평천하는 위 세 가지 일처럼 어렵게 여겨져 왔습니다. 고위 관리가 되려면 과거를 치러야 하고 과거를 치르려면 공부하는 고생이 컷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위에 오른 사람, 성공한 사람들이 격은 고생, 성공한 사람들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에 대하여 고진감래라는 말을 지어 그들을 축하하고 또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위 성공은 중용의 도를 실천한 증거는 아닙니다. 따라서 그러한 성공은 유학이 모범 삼을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식의 성공과, 중용은 어떠할까. 중용은 이러한 방식, 이러한 종류의 고진감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중용은, 그러한 고진감래로 세상의 영달과 명성을 얻거나 아니거나 모두에게 주어진 과업입니다. 모두가 주체가 되어 행해야 할 과업입니다. 새로운 태학의 齊家 治國 平天下가 바로 이러한 과업으로서 종래 통용하던 齊家 治國 平天下와 다른 점입니다. 새로운 齊家 治國 平天下는 중용을 실천하는 道로서 과거의 齊家 治國 平天下에 대한 생각, 방식으로는 다가갈 수 없습니다. ‘중용은 그런 식으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를 이렇게 바꾸어 표현해 봅니다. ‘齊家 治國 平天下는 그런 식, 고진감래의 방식과 사고로 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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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의 번역 문제
종래의 번역은 「태학의 道는 明德을 밝히는 데 있고, 사람(민중, 인민, 백성, 남)을 새롭게 하는 데 있고, 至善에 머묾에 있다」는 식입니다. 원문을 읽을 때 이렇게들 읽습니다. '대학지도 在明明德하며 在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이렇게 하면 明明德과 新民, 止於至善의 내용과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거기에다가 또 三綱領이라고 이름까지 붙이게 되면 明明德 新民 止於至善이, 세 개의 무엇, 더군다나 동등한 선상의 다른 무엇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明明德 新民이 다른 일이 아님은 이미 설명하였고(모르시는 분은 앞의 글들을 보시면 됩니다), 止於至善이 明明德 밖의 다른 일이 아님도 여러분이 압니다(모르시는 분은 [대학본의]>[지어지선]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新民을 번역하지 않고 그냥 쓰면, 新民에서 民을 목적어로 해석하는 실수를 면할 수 있는 이점이 있고 번역의 수고를 덜 수 있습니다. 新民이라고 쓰고 新民이 新明德與民(신명덕여민), 自新與民(자신여민)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明明德은 태학의 원론道, 道의 汎說(범설. 총설)입니다.
新民은 태학의 실제道, 道의 구체설입니다.
止於至善은 이념道 , 道의 목표를 표현한 말입니다.
따라서 三道爲一(삼도위일), 세 道가 하나의 태학道입니다.
이러한 것을 표현하기에는 다음과 같은 번역이 유효할 것 같습니다.
태학의 道는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태학의 道는 신민에 있다.
태학의 道는 지선에 하염없이 머무는 데 있다(또는 지선을 잡는 데 있다).
읽을 때는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태학지도 재명명덕이니라. 재신민이니라. 재지어지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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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1장
제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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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과 末
本과 末은 나무에서 가져온 비유의 말입니다. 本은 나무(木) 밑에 있는 무엇을 나타낸 글자로 뿌리이며, 末은 나무 위에 있는 것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튼튼한 것이므로 뿌리에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는 것이 物有本末의 의미입니다. 극단적으로 그림을 그리면, 나무를 거꾸로 심으면 안되듯이 사람이 하는 일도 본말이 있으니 거꾸로 심어 기르면 안된다는, 즉 本末顚倒(본말전도)를 경계하는 의미입니다. 物은 事와 상대한 것이므로 존재하는 낱낱입니다. 事는 物(과 物)의 관계작용입니다(이 설명은 [대학본의]/[격물치지]에 있습니다). |
物은 本末을 따져 顚倒(전도)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事는 선후의 차례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學의 半은 되는 셈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知止(지지: 머무를 곳, 즉 지선의 소재를 앎)이후에 有定(유정: 목표를 향한 뜻즉 결심이 생김)이라고 한 것처럼 아는 것이 시작이니까요. 물론 이런 의미에서 「태학의 길에 가깝다(近道矣근도의)」고 한 것은 아니겠지요. 學이란 知의 영역(격물치지)과 行의 영역(정심수신)이 있는데, 아는 정도라면 외형적으로 보면 반은 되는 셈입니다. 「道에 가깝겠다」라는 표현은 이런 것을 반영한 것이라는 세주의 설명이 근사합니다. 「道」란 學이며(태학의 도. 태학 즉 도), 그 學은 태학이 아닐 수 없겠지요.
태학의 내용(三綱領 八條目)을 本末 終始(物有本末하며 事有終始하니)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事 |
止 |
新 |
齊 治 平 |
誠 |
(各)有終始 |
本과 始는 所先
末과 終은 所後 |
明 |
格 致 正 修 |
物 |
至善 |
明德 |
物 知 心 身 |
意 |
(各)有本末 |
民 |
家 國 天下 |
강령과 조목에서, 명사에 해당하는 것은 物이고, 동사에 해당하는 것은 事입니다. 이러한 物에는 物마다 각기 本末이 있고, 事에는 事마다 각기 始終이 있습니다. 강령과 조목 상에서 고정된 本末은 없습니다.
떼어낸 위의 부분은 태학의 원론부의 강령과 조목을 표현한 것입니다. 알맹이처럼 가운데 배치한 것은 이것이 태학의 속알맹이 내용임을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 표는 집주의 구분입니다.
本 |
明明德 |
始 |
知止 |
所先 |
末 |
新民 |
終 |
能得 |
所後 |
明明德 新民을 本과 末로 구분하여 배당하였고, 제2절의 知止(머무를 곳을 아는 일)를 始로, 能得(목표를 달성하는 일)을 終에 배당하여
本과 始를 먼저할 것(所先)으로,
末과 終을 나중할 것(所後)으로 삼았습니다.
明明德이 新民에 앞서는 무엇으로 보입니다. 明明德과 新民이 하나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구분은 경1장의 결론 注에서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本末의 구분으로는 明明德 新民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표는 다산의 구분입니다.
物 |
本 |
意 心 身 |
末 |
家 國 天下 |
事 |
始 |
誠 正 修 |
終 |
齊 治 平 |
物과 事를 구분한 것을 제외하고는 주자와 같습니다.
格物致知(격물치지)가 物과 事의 구분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은, 경1장의 제2절부터 끝 절까지를 格物致知를 해석한 내용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朱子가 格物致知를 해석한 장이 망실되었다고 본 데 대하여, 다산은 주자의 설을 수용하지 않고, 제2절 이하 끝 절까지가 바로 格物致知를 해석한 본문이라고 봅니다. 주자의 설을 수용하지 않은 것은 옳을 수 있습니다. 物과 事에 格物致知를 포함하지 않는 것은 미안한 감이 있습니다. 格致(격치) 역시 事입니다. 그러므로 格致에도 선후 始終이 있는 것입니다. 格物 物, 致知의 知 역시 物입니다. 따라서 物과 知에도 本末이 있겠지요. 그리고 格物致知 자체도 物이므로 格致의 대상입니다.

주자와 다산의 본말 선후 구분은,
명명덕과 신민이 별개의 것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明明德은 本이므로 먼저할 것(所先)이고 新民은 末이므로 나중할 것(所後)이라는 설명입니다. 명명덕과 신민이라는 강령을 별개의 物事로 보고 있음이 확실하지요. 그런데 신민과 명명덕이 별개의 것이 아니므로 이러한 구분은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孝라는 것은 부모에게 감응한 자식의 선한 마음입니다. 慈(자)라는 것은 자식에게 감응한 부모의 선한 마음입니다. 孝와 慈(이것은 명덕), 부모와 자식(이것은 民)을 대비할 경우, 부모는 本이므로 거기에 감응한 마음 孝 또한 本이며, 자식은 末이므로 慈 또한 末입니다(이 경우 本末 대비는 원론에서 그러한 것이지 실제 모든 상황을 다 가정한 말은 아닙니다. 本末 적용은 역동적입니다.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가정 경제의 주체로 성장하였다면 자식이 주체로서 本이 됩니다. 本末 적용은 가변적이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볼때, 명덕에도 本末이 있고 사람(民)에도 本末이 있습니다(物有本末). 本은 먼저 힘써야 物이고, 末은 本에 비하면 급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원론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본 없는 末 없고, 末 없는 本은 없는 법이니까요. 본말이 다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物의 本末에 따라 事의 所先 所後가 결정되는 것으로서(事有終始), 명명덕- 本 所先, 신민- 末 所後의 구분은 잘못입니다.
본말 구분은 유학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매사에 무엇이 本이고 무엇이 末인가를 따져 本을 중시하고(內本내본), 末을 뒤로 하는(外末)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대학의 실천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經 중의 經과 傳
태학의 내용은 經과 傳으로 구분하는데, 經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經 가운데도
經 같은 부분이 있고
傳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經은 성인들의 언행을 기록한 것(또는 그와 대등한 차원의 기록)이고, 傳은 經에 대한 현인 학자들의 해석입니다.
그래서
경1장 내에서
핵심 사상 부분을 經중의 經이라고 부르고,
傳 같은 부분을 經중의 傳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이 절까지가 經중의 經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다음 절부터 말절까지는 經중의 傳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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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1장
제4절
◈여섯 개 「欲(하고자)」의 의미
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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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之 |
옛날 |
①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
천하에서 明德을 밝히고자 하면
먼저 治國하고 |
②欲治其國者
先齊其家 |
治國하고자 하면
먼저 齊家하고 |
③欲齊其家者
先修其身 |
齊家하고자 하면
먼저 修身하고 |
④欲修其身者
先正其心 |
修身하고자 하면
먼저 正心하고 |
⑤欲正其心者
先誠其意 |
正心하고자 하면
먼저 誠意하고 |
⑥欲誠其意者
先致其知致知在格物 |
誠意하고자 하면
먼저 致知하였나니 致知는 格物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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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성의가, 단지 팔조목 가운데의 한 조목이 아니라 태학을 통합하는, 천자적 조목임을 보여줍니다.
여섯 개의 欲은 다름 아닌 誠意의 意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欲 한 글자만 당기면 팔조목이 다 끌려오게 되어 습니다. 이 여섯 개의 欲을 알차게 하는 것, "이 여섯 개의 欲=誠"의 공식이 성립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誠意입니다. 따라서 태학이라는 학문의 핵심은 誠意일 뿐입니다.
齊家 治國 平天下를 한 채의 집이라고 할 때, 誠意는 그 집에 들어가는 문이며 통로입니다. 格物致知와 正心修身은 각각 그 집의 왼쪽 오른쪽 창입니다. 齊家 治國 平天下의 집을 잘 그린 그림이 됩니다. |
誠意의 집

誠意 없는, 格物致知와 正心修身은 부뚜막의 소금, 그림의 떡, 무엇보다도 주인도 없고 드나드는 문도 없고 통로도 없는 이상한 빈 집일 뿐입니다. 誠意를 문으로 하여 格物致知, 正心修身에 들어가며, 誠意를 통하여 格物致知, 正心修身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섯 개의 欲자가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위의 집그림은 齊家治國平天下를 집으로 비유하여 그린 그림입니다. 誠意는 齊家治國平天下의 집 주인입니다.
意는 格物致知하고 正心修身하고자 하는 意이기 때문에 영역만 지정하여
誠意於家라고 하면 齊家,
誠意於國이라 하면 治國,
誠意於天下라고 하면 平天下가 됩니다.
「欲」이 어떤 欲이냐에 따라 誠意는 齊家도 되고 治國도 되고 平天下도 됩니다. 誠意는 팔조목의 하나이면서도 팔조목을 초월하여 다른 조목들을 다스립니다. 초월은 떠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디 한 곳에 국한되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전체라는 뜻일 겁니다. 誠意는 천자적 조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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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목 |
강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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欲
(誠意) |
平天下 |
新民 |
用 |
治國 |
齊家 |
正心修身 |
誠意 |
明明德 |
體 |
格物致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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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라는 함정에서 빠져 나오기

아래의 인용문은 태학의 팔조목을 순서, 계단, 과정으로 생각하는 타성에서 벗어나는 데 큰 덕이 될 것입니다. 「먼저」「이후」라는 글자가 태학을 태학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함정 올가미 노릇을 합니다.
감퓨타 자판이라고 신제품이 나왔는데
뭐 분당 천 타를 친다고 .....!
그럼 그게 두벌식일까 세벌식일까?
헤헤헷 내가 진즉 말하고 싶었던 게 그거지!
나라고 두벌식이 좋아서 옹호했겠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소극적으로 자판이 아니라
자판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기계 대 전자지!
기존의 모든 자판은 기계시대에 기계적 사고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거지!
기계적 사고란 운동의 전달순서를 약간 비트는 거지!
여기서 제시되는 것은 순서적 사고!
전자는 기계와 개념이 다르지!
순서가 아니라 방향!
방향이란 동일한 시간대에 둘 이상이 공존한다 말이지!
반도체 아닌감!
내가 이 문제를 중요시하는 것은 이게 단순히 아이디어로
되는 게 아니라 철학이 필요하단 말씀이야!
기계적 사고, 산술적 사고에 빠져 있으면 절대 그런 생각을 못하지!
필요한 것은 공간적 사고, 전자적 사고지!
전자엔 힘의 전달이 순서대로 가는 게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가지!
......
그려 전자의 혁명!
순서에서 방향으로의 전환!
세상은 우리가 모르는 구석에서 엄청나게 변하고 있지!
글자를 한자한자 순서대로 입력한다는 발상이야말로 기계적 발상!
글자를 동시에 입력하면 컴이 알아서 맞춰주는 것이야말로 전자적 발상!
발명도 철학이 있어야 해먹는 거지!
아이디어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아이디어를 만들지!
순서적 시스템인가 방향적 시스템인가?
......
그려 난 자본주의 옹호자면서도 사회주의자여!
이게 순서적 사고의 기계주의자들에겐 절대 이해될 수 없지!
그들은 반도체의 본질을 모르거던!
그들이 아는 것이야 도체나 부도체지!
흑 아니면 백!
그 중간이 있다는 걸 기계주의자들이 어찌 알겠나!
난 반도체가 아니여!
난 쌍도체지!
도체와 반도체의 중간이 아니라 도체와 부도체를 겸하는 거여!
......
내 기준으로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원시때부터 공존해 왔어!
반도체가 도체와 부도체를 겸하듯!
북한도 자본주의지!
김일성 독점 자본주의!
이 세상에 자본주의 아닌 나라는 없지!
허명이 아니라 실질을 이야기하자 이거여!
그려 발상의 대전환!
힘이 쌍방향으로 전달되는 전자!
사회구조를 전자식으로 뜯어고치자는 게
내가 주장하는 최후의 혁명!
문화의 혁명이지!(천리안 ID KIFT 94년 11월 5일 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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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明德이 곧 新民
►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明明德이 곧 新民이라는 또하나의 증거입니다. 앞에서는 집주를 인용하였고 여기서는 경문이 증거합니다.
붉은 색 글씨에 들어갈 말은 平天下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天下에서 明德을 밝히는 것」이 平天下임을 압니다. 平天下가 新民의 조목인 것으로 보아 明明德과 新民이 두 개의 일이 아니라 하나임을 압니다. 그리고 앞에서 다룬 欲에 연결하면, 天下에서 明德을 밝히고자 하는 그 欲을 알차게 하는 것(誠意於天下)이 平天下임도 압니다. 그런데 명덕을 남의 명덕으로 생각하게 되면 집주에서 말하는 대로 명명덕(자기 자신을 먼저 밝히고)하고서 이것을 미루어 나아가 남의 마음도 밝히게 한다는 뜻이 되어 버립니다. 명명덕은 전1장에서도 말하듯이 自明입니다. 명명덕어천하는 명명덕의 결과를 천하에 미루어 나아가 남의 명덕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명명덕의 무대를 지적한 표현, 명명덕을 실제화한 표현입니다. 家 國 天下 없는 명명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론 강령을 실제하한 표현입니다. |
요약
明明德於天下는 평천하이다. 평천하는 신민의 조목이다. 그러므로 명명덕과 신민은 다른 것이 아니다.
明明德은 自明명이다. 천하는 다스리는 대상이 아니고 나를 다스리는 무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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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1장
제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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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修身으로 本을 삼는다.]
집주: 정심까지의 조목은 모두 수신하기 위한 것이며, 제가부터는 수신까지의 조목을 들어서 적용하는 것일 뿐이다.{이 설명이 매우 명쾌합니다. "수신까지"와 "제가부터"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수신까지는 원론이고 제가부터는 그 원론의 실제라는 것을 주자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本이 어지러우면서 末이 잘되는 법은 없으며, 두터이할 것에 박하고, 박하게 할 것에 후하게 할 법은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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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身을 本으로 삼아야」한다면 末은 무얼까?
►집주와 다산의 생각
이 절의 註에서 주자는, 「齊家 이하의 조목은 修身을 들어서 올려놓는 것일 뿐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齊家 이하의 조목」은 齊家 治國 平天下입니다. 齊家 治國 平天下가 格物致知와 正心修身 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修身을 들어 家에 설치하면 齊家이며, 國에 설치한 것이 治國이며, 天下에 설치한 것이 平天下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경우의 修身은 格物致知를 포함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 절을 따져 보겠습니다.
「修身을 本으로 삼아야」라는 말에 의문을 가질 것이 있습니다. ①本으로 삼을 것이 修身이라면 末로 삼을 것은 무엇인가? ②그 本은 무엇의 本인가?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서 태학의 이론이 관념에 머물거나 실학이 되거나 합니다. 종래의 생각을 가지고 「修身을 本으로 삼아야」라는 말을 이해하면 「末에 해당하는 것은 修身을 제외한 다른 조목들, 齊家 治國 平天下」입니다. 修身- 本, 齊家 治國 平天下- 末로 생각하면 대학은 관념에 머물고 맙니다. 허공에 뜨고 맙니다.
주자의 설명 |
本 |
明明德 |
格物致知 誠意 正心修身 |
末 |
新民 |
齊家 治國 平天下 |
다산의 설명 |
物 |
本 |
意 心 身 |
末 |
家 國 天下 |
事 |
始 |
誠 正 修 |
終 |
齊 治 平 |
아래 문답을 살펴 봅시다.
問答
위의 표에는 뿌리와 가지만 있습니다. 나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태학이 아니겠습니까.
태학이라는 학문이 나무라면
구름 위에 심을 수는 없는 것이고, 이 땅 어딘가에 심는 나무입니다.
심겨 자라는 땅이 家와 國과 天下라고 할 때 태학은 각기 무엇이 되겠습니까.
알았다. 그게 齊家 治國 平天下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그러하다면, 齊家 治國 平天下는 家와 國과 天下라는 實地에 심은 태학나무입니다.
齊家 治國 平天下의 뿌리와 가지는 각기 무엇이겠습니까.
뿌리는 修身이겠고,
가지는 齊家 治國 平天下? 어라! 뭐가 이상한디!
위 표의 설계도는 오류가 있습니다. 다만 관념일 뿐이지요.
잠깐! 잠깐!
허! 그런디,
家 國 天下에 심겨지는 말만 하고 身에 심겨지는 건 왜 말 안하는 거여!
그럼 한 번 심어 볼까요?
그려.
태학이라는 나무를 身에 심었습니다. 그 나무를 修身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태학이 齊家 治國 平天下를 포함하고 있으니까, 修身 안에 齊家 治國 平天下가 들어있지요?
어허. 이거 내가 뭐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는디......
►①修身이 本이라고 할 경우 本은 무엇의 本인가
천작(天爵)이란 것이 있고, 인작(人爵)이란 것이 있는데, 인의충신(仁義忠信)과 항상 善을 즐기는 마음, 이런 것은 천작(天爵)이며, 公·卿·大夫니 하는 벼슬은 인작(人爵)이다. 옛사람들의 경우 천작(天爵)을 닦으면 인작(人爵)이 따라왔는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천작(天爵)을 닦아서 그것으로 인작(人爵)을 구한다. 그리고 인작(人爵)을 얻고 나면 천작(天爵)은 버린다.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 곧 잃고 말 人爵인데 말이다.
- 『맹자』 「告子」 上 제 16장 -
本末 적용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항상 상황을 파악하여야 합니다. 대학의 수신이라고 하는 닦음은 닦음 가운데 外物 닦는 것을 버리고 외물을 내면화하여 닦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천작이나 인작이나 그것이 나의 마음이 아닌 이상이라면(내면화 하지 않은 이상) 다 외물입니다. 천작(本)에 대하여 발하는 마음은 도심입니다. 인작(末)에 대하여 발하는 마음은 인심입니다. 천작 인작을 도심 인심과 대비하면 천작 인작은 외물로서 末이고 도심 인심은 내면의 것으로서 本입니다. 本(천작 인작을 내면화한 것. 도심과 인심)을 닦으면 닦음의 本이 되고 末(천작 인작)을 닦으면 닦음의 末이 됩니다. 대학은 이 닦음 가운데 닦음의 本을 채택하여 修身이라고 이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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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음의 대상 |
닦음 |
대학 |
내면화한 닦음 |
인심 도심 |
닦음의 本 |
修身 |
외물을 닦음 |
인작 천작 |
닦음의 末 |
반修身 |
이렇게 볼 때 修身으로 本을 삼으라고 할 때의 本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닦음의 本입니다. 무엇의 本이냐의 답은 '닦음의 本', 즉 修의 本입니다.
맹자의 말씀을 적용해 봅니다. 인작과 천작을 대비하면 천작이 本이고 인작은 末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물일 뿐입니다. 천작을 구하는 것도 그것이 내면화한 게 아닐 경우 외물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천작을 구하는 일도 그것만으로는 修身이 아닙니다. 修身이 되려면 천작을 내면화해야 합니다. '천작에 대하여 발하는 마음' 즉 도심을 구하는 형식을 취해야 修身이 됩니다. '옛사람들의 경우 천작(天爵)을 닦으면 인작(人爵)이 따라왔는데'의 천작을 닦음은 천작을 내면화한 닦음으로서 修身입니다. 반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천작(天爵)을 닦아서 그것으로 인작(人爵)을 구한다. 그리고 인작(人爵)을 얻고 나면 천작(天爵)은 버린다.'의 천작을 닦음은 외물인 천작을 닦는 것으로서 反수신입니다. 반수신은 닦음의 末로서 태학에서는 버린 것입니다. 修身으로 本을 삼으라고 할 때 닦음의 봄이 되는 닦음을 본으로 삼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치국 평천하와 상대하여 한 말이 아닙니다.
►②굳이 팔조목 내에서 末을 찾자면
修身에 상대하는 것은 격물치지입니다. 격물치지는 앎의 조목이고 正心修身은 行의 조목입니다. 앎과 行을 本末에 적용하면 어느 것도 다 가능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行하는 것이 本이고 아는 것은 末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아는 것에 行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 알고 나서야 행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황을 가정한다면 修身으로 本을 삼으라고 하였을 경우 末은 격물치지라는 知의 조목이 가능하며 이 경우 本은 대학의 本, 제가치국평천하의 本입니다.
►③在我者(재아자)와 在外者(재외자)
修身은 대개 세상에서 말하는 닦음(외물을 닦음)을 내면화한 것입니다. 외물을 닦는 행위만 가지고는 닦음의 실상을 볼 수 없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행위를 예로 들면, 외형은 같아도 가르치는 사람의 마음 씀씀이는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외물이라는 것은 在人者(남에게 소관한 것), 在外者(외부의 소관인 것)입니다. 남에게 달린 것이고 내밖에 있는 것이므로 궁국적으로 내가 어쩔 수 없는 命의 소관이 있습니다. 재물은 在外者, 내밖에 있는 것입니다. 재물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하여 내가 재물을 꼭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命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얻었다하더라도 꼭 그것이 내 인생에 득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재물을 얻고 그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마음대로 되지 않고 또 만사여의하여 무언가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이 꼭 행복의 징표도 아니기에 외물을 구하는 행위에 목을 매달 필요도 없습니다. 구하는 것은 일정하고 구하고 자하는 사람은 많고 등등 이러저런 이유로 삶이 어그러지게 됩니다. 그러하다고 외물을 닦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외물을 닦아야 합니다. 이에 외물을 닦을 것이 아니라 외물을 在我者(나의 소관이 것) 在內者(내부 소관)인 것으로 변환하여 닦게 되면 다만 외물을 향하여 치닫는 닦음에서 오는 폐해를 방비할 수 있습니다. 在我者 在內者는 在人者 在外者인 物에 대하여 발하는 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닦으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修身입니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종래의 상식으로는 천자가 하는 일은 平天下입니다. 서인이 할 수 있는 한계는 齊家입니다. 따라서 천자도 본으로 삼아야 하고 일반인도 본으로 삼아야 할 수신은 제가 치국 평천하와 상대하는 수신이 아닌 것을 알만합니다.
◈서인은 齊家까지?
종래의 생각으로는 그러합니다. 治國을 하려면 적어도 감투라도 써야 됩니다.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는 감투 썼다 벗었다 하는 벼슬과 연관 있는 말이 아닙니다.
或者 : 자네는 어째서 정치를 하지 않고 있는가.
공자 : 『서경』에 孝를 말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베풀어 일가의 政(家政가정)으로 삼으라는 것인데 이렇게 하는 것 역시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어찌 감투를 써야 정치를 한다고 하겠습니까.
- 『논어』 「爲政」 제 21장 -
공자의 답이 명쾌합니다. 그런데 명쾌한 답을 궁색하게 이해하는 점이 있습니다.
「공자께서 벼슬을 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는 것은 말하기 곤란한 무엇이 있다. 이 때문에 『서경』의 말을 인용하여 이런 대답을 하였는데,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정치의 오묘한 이치 역시 孝(효)나 弟(제)를 벗어나지는 않는다(집주).」
곤란한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묘한 이치가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공자 말씀 그대로입니다.
德으로 하는 정치는, 비유하자면,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고 여러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여 도는 것과 같다.
- 『논어』 「위정」 제1장 -
과거의 인민은 「여러 별들」과 같았습니다. 여러 별들이 하늘의 운행에 참여하지 않음이 없듯이 과거의 인민이라도 오늘날과 또는 내일과는 정도와 모양의 차이는 있겠지만 國 天下 事를 수행합니다. 야경을 도는 일,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내는 행위, 부역을 하는 일, 의병이 되는 일, 혁명군의 병사가 되는 일, 정벌군의 병사가 되는 일, 모두 國 天下의 일입니다. 位를 얻으면 位를 얻은 사람으로서 하고, 位를 얻지 못하면 位를 얻지 못한 사람으로서, 각자 제 위치에서 道를 행하는 것입니다. 공경대부 등의 감투를 써야만 태학이 가능하다면 태학은 보편학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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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절
◈本末
天爵이 本이고 人爵이 末입니다. 天爵과 人爵이 末이고 이에 대하여 발하는 마음 도심과 인심은 本입니다.
君子務本 本立道生(군자는 本에 힘쓴다. 本이 서면 길이 생긴다).
-『논어』 「학이」 제2장) -
집주에서는 厚하게 할 것을 國 天下와 비교하여 家로 지목하였는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태학의 뜻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家는 家대로, 國은 國대로 天下는 天下대로 각기 후하게 할 것과 박하게 할 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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