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은 데우지 않으면 식어버리지만
사람의 손길은 보온병에 들어 있는 것처럼 항상 따뜻해요."
꿈만 같던 시간들이 지나갔다.
커다란 자동차 한 대에 몸을 맡긴 채 그렇게 아이가 내게서 떠나갔다.
멋진 작별 인사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이를 차에 태워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실감을 했다.
길을 걸을 때 더 이상 계단이 시작된다고 주의를 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자동차 소리가 너무 무섭다고 울먹거리는 아이의 귀를 두 손으로
막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아이의 이름은 한성현.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가 있는 올해 열한 살의 초등학생이다.
아이를 만난 건 지난 8월 여름 SK그룹의 자원 봉사 단인 Sunny를 통해서였다.
성현이는 새하얀 피부와 착한 눈망울을 가진 그 나이 또래들과
비슷한 장난끼 많고 꿈도 많은 아이였다.
“성현아, 나는 박진희 선생님이야. 앞으로 우리 잘 지내보자” 라는
나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꼭 잡는 아이. 웃는 얼굴이
너무 예쁜 그 아이가 처음부터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차 안에서 이런 저런 이기를 나누고 우리는 경기도 덕평 수련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릴 때 꼭 붙잡아 주고 수련원까지 함께 걸었다.
수련원에는 계단이 참 많아서 계단이 시작될 때마다 주의를 주어야했다.
어떻게 보면 걸어가다가 계단에 마주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아이의 유일한 두 눈인데 꼼꼼하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계단에서 구를 지도 모른다.
"계단 시작이야. 조심해." 라고 주의를 주는 내게 "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손을 꼬옥 잡는 아이. 따스함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퍼져 나와 아이의 손을 타고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예정된 담력 훈련을 했다.
파트너와 함께 정해진 코스의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산행이라니.
시작부터 불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출발 전 모기를 쫓기 위해 약을 다 바르고 성현이는
내 손을 꼭 잡고 산행길에 올랐다. 생각보다 가파른 산이었다.
혼자 가기도 힘든데 아이와 함께 가려니 정말 배로 힘이 들었다.
성현이는 헉헉거리는 내 숨소리를 들었는지
“선생님 괜찮으세요? 저 때문에 힘드시죠?”라고 물었다.
순간 내 자신이 더욱 부끄러워졌다.
나도 이렇게 지치는데 잘 보이지도 않는 아이는 낯선 환경이 얼마나
두렵고 힘들까. 아이가 나를 이렇게 믿어주는데 나는 이런 건 왜 하는지
모른다고 불평이나 해대고. 정말 스물 두 살의 나는
열한 살의 아이보다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힘든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먹는 저녁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식판을 받아와 숟가락과 젓가락을 쥐어주는데 아이가 오늘의
반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코 앞에 있는 반찬조차 무엇이 나왔는지 모르는 현실이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나는 밥을 먹는 내내 마음으로 울었다.
“미역국이 덜 뜨겁네. 더 뜨거웠으면 맛있었을텐데” 라는 나의 말에
성현이는 열한 살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의젓하게 말을 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국은 데우지 않으면 차갑지만요.
사람의 손길은 항상 따뜻해요. 선생님 손도 따뜻해요.
보온병에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성현이었다면 이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남들 다 보는 세상, 좋지 않다고 불평을 해도 적어도 구경은 할 수 있는
세상에 자신만 볼 수 없다면 세상을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찡하게 울리더니 눈물샘마저 자극을 받았다.
그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은 고작 48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내 인생의 오백 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 극히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지난 22년간의 삶을 통째로 반성해 볼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느끼게 해줬다는 점에서 그 아이는 단순히 내가 담당한
아이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아이는 세상의 누구보다 똑똑하지 않다고, 누구보다 예쁘지 않다고
누구보다 돈이 많지 않다고 불평, 불만, 비교를 일삼던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반성할 수 있도록 나를 일깨워준 고마운 존재였다.
우리 주위에는 이처럼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몸을 잘 가누기 힘든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거나 그들을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인 양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열한 살의 아이에게서
나는 도덕 교과서의 백 마디 말보다 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사람의 손길은 데우지 않아도 식지 않는다는 한마디. 그것은 우리 주위의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고 따스한 손길로 감싸 안아주라는
천사의 작은 속삭임이 아니었을까.
아이의 그 말은 소외된 이웃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던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그 말 한마디로
나는 비록 학과 공부에 지친 학생이지만 틈틈이 어려운 이웃들을
방문하며 따스함을 전해드리려 노력하고 있다.
결코 식지 않는 사람의 따스한 손길.
꼬마 천사의 한마디가 지금 이순간 가슴 속에서 훈훈하게 퍼져나온다.
<오늘은 박진희님의 글입니다.>
미 사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