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 / 天邦支竺馬骨皮)

浩 根 書 堂 2010. 2. 5. 07:32

천방지축마골피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天邦支竺馬骨皮) 혹은 천방지추마골피는 이들 성씨가 조선 시대의 천민 신분에 해당하거나, 천민들이 창성한 성씨라는 내용의 대한민국도시 전설이다. 그 유래나 속설의 등장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일제가 민족의 이간질을 위해 만들어 낸 루머라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등장 시기는 근대화 이후의 시기로 추정된다. 신빙성 없는 내용으로서 여러 차례 그 허구성이 지적되었으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천민은 기본적으로 성을 쓸 수 없었다.
  • 천민이 창성 시, 기존의 대성(大姓) 대신 천민 신분을 드러낼 성을 선택했을 개연성이 낮다.
  • 속설을 뒷받침하는 근거 사료가 없다.
  • 축씨나 골씨는 없다.
  •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역모에 휘말린 사람에게 역모 가담자라는 낙인을 위해 동물의 성이 부여되는 일이 있었으나, 모두 후대에 개성되었다.
  • 해당 성씨 중 마천목과 같이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에 관직 등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등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 전근대 신분제의 잔재인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일본에서도 부라쿠민을 성으로 가려낼 수 있다는 비슷한 속설이 존재하고 있으며, 반유대주의의 전통이 뿌리깊은 유럽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의 지배하에서 유대계 성씨와 비슷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유대인으로 오인받지 않기 위해 성을 바꾸거나, 유대인이 생존을 위해 성씨를 바꾸는 등의 일이 있었다.

 

'천방지축마골피' 성씨는 다 천민? '천방지축마골피' 성씨는 다 천민인가?

 

천방-지축(天方地軸)

①못난 사람이 종작없이 덤벙이는 일.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다/내가 천 년을 살겠느냐, 만 년을 살겠느냐,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아이티를 못 벗고 매사에 천방지축이냐.≪최명희, 혼불≫/교당을 악명 높은 봉세관과 결탁시키는 둥 그 행각이 가히 천방지축이라는 소문이었다.≪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②너무 급하여 허둥지둥 함부로 날뜀. ¶천방지축으로 도망하다/고두쇠는 연거푸 대답을 하고 인제 제 목이 아니 떨어질것을 알아차리고 천방지축으로 아사달의 곁에 가서 동여맨 것을 끄르기 부산하였다.≪현진건, 무영탑≫
①못난 사람이 종작없이 덤벙이는 모양. ¶그전에는 천방지축 어린 나이였고 이제는 한창 감수성이 피어날 열다섯소녀였다.≪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②너무 급하여 허둥지둥 함부로 날뛰는 모양. ≒천방지방. ¶고갯길을 천방지축 달려 올라가자니 마음이 아픈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발인들 아프지 않았으랴.≪정비석,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

천방지축은 이런 뜻입니다. 질문하신 성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또 천방지축마골피가 아니라 천방지추마고피이구요... 이것을 #039;상놈 7성#039;이라고 하는데 전혀 근거없는 말입니다.

 

천,방,지,추,마,고,피 (천방지축마골피... 가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사실 이건 근거없는 말입니다.
영양 천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로 명나라때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천암의 후손들입니다. 천수경이라는 훌륭한 시인도 계셨고 통훈대부, 광주부윤, 영월군수등의 벼슬을 대대로 해온 집안입니다.
방씨는 온양 방씨의 경우 당나라때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온 성씨로 조선조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분이 계셨습니다.
남양 방씨의 경우 당나라 양공 방현령이라는 분을 시조로 사간원 정언벼슬한 분이 계셨지요. 개성방씨는 한성좌윤을, 태원 방씨는 오위장 벼슬을 지낸 분이 계셨습니다.

(각 성씨에 조선조에 높은 벼슬하신 분의 벼슬이름만 꼽겠습니다.)
지씨 - 충주지씨(병조참판)
추씨 - 전주추씨(한성부윤)
마씨 - 목천마씨(장흥부원군)
고씨 - 제주고씨(너무 많다는군요.. -_-;;)
피씨 - 괴산피씨(병조판서) 홍천피씨(한림학사)

이로 미루어 본다면 위에 언급한 7성이 상민의 성씨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사실 이 성씨들의 특징은 희귀성이며, 대부분 중국에서 건너온 도래성씨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런 속설이  퍼지게 된 것이지요. 또 다른 답변도 비슷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千方池秋葛(高)皮는 양반 姓입니다.

이들 姓이 兩班 姓인 것은 朝鮮氏族統譜를 통해 입증됩니다.

千方池秋葛(高)皮의 姓을 가진 분들 중에 역사상 開國功臣, 府院君 등 領議政급인 正1品을 지낸 분들이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姓은 양반이 아니면 가질 수 없으며 양반이 아니면 대과(문과시험)에 응시하거나 벼슬을 할 수 없었읍니다. 따라서 천방지추마갈(고)피가 천민의 姓이라는 말자체가 어폐가 있읍니다.

姓=兩班이었으므로 이들 姓이 천민姓이라면  그 姓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정姓에 대한 비하는 甲午更張이전에 30%에 불과했던 姓가진 사람이 甲午更張이후에  100%가 되면서 "똥묻은 개가 뭐묻은 개" 욕하는 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신의 양친의 조상중에 한 사람이라도 천민이면 천민이 되는 조선시대 논리라면 한국사람 모두가 모두가 천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신의 외가집, 외할머니의 친정, 외할머니의 어머니의 친정.....

할머니의 친정, 할머니의 어머니의 친정, 할머니의 외할머니의 친정....

증조할머니의 친정, 증조할머니의 어머니의 친정,.....

이렇게 따져서 자신이 양반의 혈통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요?

甲午更張이전까지 양반이 30%정도에 불과했는데...


따라서 천방지추마갈(고)피가 천민의 姓이라는 것은 姓=양반이므로 그 자체로서 어폐가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비추워볼때 이를 따지는 것은 하늘보고 침뱉으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천방지축마골피는 원래 天方地丑馬骨皮로서 특정 姓과는 무관하게 7대白丁을 한문으로 부르던 것이었습니다.

이들 7대백정은

天은 무당 ,

方은 목수나 미장이 ,

地는지관 등 요즘의 장의사 ,

丑은 소백정 ,

馬는 말백정 ,

骨은 뼈(고리)백정,

皮는 가죽백정(갓받치) 을 가르킵니다.


甲午更張이전까지는 

천민은 이들뿐만 아니라

官奴婢,

私奴婢,

농노인 小作農 등이 더 있었으며

대부분의 양민과 중인도 공식적으로는 姓이 불분명했습니다.

왜냐하면 관청이 인정하는 姓을 가졌다면 양반의 자손으로 軍役(현대의 병역)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양반가문의 족보는 관청에서 관리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후에 군적관리가 강화되고 중인과 양민이 공명첩을 사서 양반이 되면서 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국가에서 이들을 공식문서인 족보로서 양반으로 인정할 필요때문이지요.


甲午更張이전까지 이들을 부르는 호칭은 7대천민은 ‘동대문밖 갓바치 돌쇠’, 농노(소작농)와사노비는 ‘김(주인의 姓)가네 개똥이’등과 같이 불리워졌습니다.

甲午更張으로 전국민이 姓을 갖게 되었고 1909년 일제에 의해 호적이 정리되면서 천민들은 주인의 姓을 쓰거나 직업과 발음이 비슷한 姓으로 호적을 등록하여 공식적으로 전국민이 姓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족보관리는 군역등에 신분차별을 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족보관리가 관청이 아닌 각 문중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족보는 예를들면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파 공주문중’일 경우  문중보(공주문중)는 10년단위, 종파보(대종파)는 20년단위, 파보(계림군파)는 30년단위, 대종보(경주김씨)는 60년단위로 만들게 되는데 일제시대에는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권력에 의한 검증이 없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특정姓씨라고 주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시대 족보는 本譜와 別譜로 구분하여 甲午更張以前族譜에서 가계의 확인이 불가능한 것을 별보라 했는데 별보의 분량이 본보의 몇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였던 6.25이후 1955년부터 57년사이에 대부분의 족보가 다시 만들어졌는데 아마도 전쟁으로 없어진 족보와 친인척확인목적보다는 각 문중의 경제적 목적이 더 큰 것으로 보이며 이때에 本譜와 別譜의 구분이 슬그머니 없어져 버렸읍니다.

그 결과 甲午更張이전까지 1인당 평균 2명의 아들을 두다가 이때부터 갑자기 아들이 평균 5명이상으로 늘어납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姓을 갖게 되면서도 신분차별을 없앤 甲午更張이전에 7대천민을 비하하면서 부르던 천방지축마골피가 발음이 비슷한 千方池秋馬葛皮로 와전된 것일 뿐 千方池秋馬葛皮가 賤民인 것과는 무관합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姓씨변천을 이해한다면 千方池秋馬葛皮 뿐만 아니라

모든 姓에 賤民등 기존의 姓이 없는 사람들이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현대에 사는 우리는 선진국들이 출신보다는 자수성가를 존중하듯이현재 자기 姓도 중요하지만 신종추원의 논리로 가까운 조상위주로 효도를 다하는 것이 바람직 한 것 같습니다.


덧붙여 일부 분들이 양반이 아니라도 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것은 어디까지나 역사기록을 위해 임의로 붙인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임꺽정이 임씨가 맞을까요? 실록에 임꺽정의 형은 가도치로 가씨로 나옵니다. 성이 아니라 산도적이니 林으로 임꺽정의 형은 갓받치였으니 가로 표기한 것입니다. 

 

출처 : 사단법인)한국전례원 - 社團法人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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