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김시습, 유성룡, 이덕형, 이가환 등 3~4세에 글 깨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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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순) 율곡 이이·매월당 김시습·한음 이덕형·서애 유성룡 |
역사에는 가끔 그 시대의 수준을 뛰어넘는 천재가 등장한다. 보는 시험마다 모두 장원해 9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린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천재성은 유명하다. 그러나 ‘역사’라는 수식어가 붙는 천재는 머리만 좋은 사람이 아니다. 역사 속의 천재는 그 시대에 가장 머리가 좋거나 각종 시험에 탁월한 성적을 낸 사람이 아니다. 역사 속의 천재는 특유의 혜안으로 시대를 앞서 보고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을 뜻한다.
조선의 천재는 율곡 이이를 비롯해 매월당 김시습, 읍취헌 박은, 북창 정렴, 서애 유성룡, 아계 이산해, 하서 김인후, 한음 이덕형, 청장관 이덕무, 정헌 이가환 등을 꼽는데, 이들 모두 3~4세 때 글을 깨우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시습은 5세 때 정승 허조가 “내가 늙었으니 노(老) 자를 가지고 시를 지으라”고 하자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라고 지었고, 허정승이 무릎을 치면서 “이 아이는 이른바 신동이다”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패관잡기’에 전한다. 세종은 5살이 된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 박이창에게 명해 자신의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짓게 했다. 김시습은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來時襁湺金時習)’이라고 대답했고, 벽에 걸린 산수도를 가리키면서는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小亨舟宅何人在)’라고 지었다. 세종이 비단 30필을 내리자 그 끝을 서로 이어서 끌고 가 김오세(金五世)라고 불렸다. 그러나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세조를 인정할 수 없던 김시습은 스스로 승려가 되어 불우하게 생을 마쳤다. 세상과 불화한 천재였는데, 박은 역시 갑자사화 때 26세의 나이로 사형당했다.
특유의 혜안으로 시대를 앞서 보다
당대 제일의 지식인이면서 서자라는 이유로 불우하게 지낸 천재가 이덕무였다. 읽지 않은 책이 없어서 간서치(看書痴)라고 불린 이덕무는 ‘이목구심서’에서 “내 작은 초가가 너무 추워서 밤중에 일어나 ‘한서’ 1질을 이불 위에 죽 덮어서 추위를 조금 막았다”라고 쓸 정도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서자들의 처지를 동정했던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용하면서 한 시대를 주름잡는다.
다산 정약용이 “질문한 사람마다 깜짝 놀라서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라고 말한 희대의 천재가 이가환이었다. 정약용은 “그의 기억력은 고금에 뛰어나 한 차례 눈으로 보기만 한 것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다”면서 “무릇 글자로 된 것은 한 번 건드리기만 하면 물 쏟아지듯 막힌 데가 없었으며, 모두 정밀히 연구하고 알맹이를 파내서 한결같이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 같았다”라고 설명한다.
정조 시대에 공조판서까지 오른 이가환은 정조 사후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와 노론에 의해 천주교도라는 혐의를 받고 사형당했다. 그 역시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였다. 그런 천재를 죽인 것은 비단 그 한 사람만의 불행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불행이었다.
출처 : 사단법인)한국전례원 - 社團法人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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