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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경 개요

浩 根 書 堂 2011. 12. 25. 23:27

사상관 > 유교경전 > 오경 > 역경

 

『역경』은 유교의 기본 경서인 오경(五經)의 하나로서 천지 자연과 인간 세계의 본질 및 그변 화 현상을 기호화하고 설명을 가한 책이다.

본래의 명칭은 『역(易)』 또는 『주역(周易)』 이었는데, 점서(占書)였지만 공자(孔子)가 이에 대해 철학적인 의미를 붙여 해설을 한 이후 유교의 경서인 『역경』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역의 의미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석척설( 說)로서 역을 도마뱀을 나타내는 상형문자(象形文字)로 보는 것이다. 중국 고대인들은 도마뱀이 매일 12번씩 색깔을 바꾼다고 믿었으며, 역은 바로 그 변화의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설은 본래 『설문(說文)』에서 시작되어 후대에도 이 설을 지지한 학자도 있었으나, 과연 도마뱀이 하루에 12번씩 색깔을 바꿀 수 있는가도 의문이고, 역이란 글자가 상형문자인가도 문제이다. 설령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역의 가르침이 단순히 변화의 이치만을 제시하는가가 문제이므로 설득력 이 미흡하다.

둘째는 일월설(日月說)로서 역을 일(日)과 월(月)의 복합문자로 보는 것이다. 이 설 역시 『설문』에 근거한 것인데, 일(日)은 양(陽)을, 월(月)은 음(陰)을 표시하며, 따라서 역을 음양소장(陰陽消長)에 관한 책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연구성과에 의해 일·월의 복합자가 명(明)으로 밝혀짐으로써 제3의 설이 출현하게 되었다.셋째는 자의설(字義說)로서 역을 그 자체에 내포된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역이라는 글자는 다시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첫째, 이간(易簡) 또는 간역(簡易)으로서 간단하고 ��이하다는 의미이다. 이에 의하면 하늘과 땅은 모든 현상과 온갖 사물을 포용하고 생성화육(生成化育)하고 있지만 번거롭거나 요란스럽지는 않다. 천체의 운행은 확연하여 사람에 그 쉬운 것을 보여주고, 땅의 작용은 순탄하여 사람에게 간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변역(變易)으로서 변하고 바뀐다는 의미이다. 천지간의 모든 상황과 사물은 항상 변하고 바뀜으로써 음과 양 두 기운이 교섭한다. 셋째, 불역(不易)으로서 바뀌거나 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 그 위치를 바꾸지 않는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의설에서는 역을 이상의 세 가지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본다. 이것을 맨 처음 제시한 것은 위서(緯書)였는데,『주역정의(周易正義)』에서도 이 설을 따르고 있다. 한편 『주역』에서 주(周)의 의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한대(漢代)의 정현(鄭玄)이 주장한 것으로서 ‘두루’, ‘널리’라는 의미이다. 역의 가르침의 원리는 우주(宇宙) 사이에 널리 미친다는 것이다.

둘째는 주를 시대명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고대에는 연산역(連山易)·귀장역(歸藏易)·주역의 삼역(三易)이 있었다고 한다. 연산역은 신농씨(神農氏) 시대의 역이고, 귀장역은 황제(黃帝) 시대의 역이며, 주역은 주대(周代) 문왕(文王) 때의 역이라는 것이다. 정현은 연산이란 산에서 나온 구름이 연결되어 끊어지지 않는 모양이고, 귀장이란 만물이 그 속에 감추어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연산역을 하대(夏代)의 역, 귀장역을 은대(殷代)의 역, 주역을 주대의 역이라 보기도 한다. 하·은대에 연산·귀장이란 역이 행해졌다는 것은 한대 환담(桓譚)의『신론(新論)』에 연산·귀장이란 말이 있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춘추시대에 복서(卜筮)를 하여 길흉을 판단함에 『주역』이외의 말을 사용한 것이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흔히『연산역』·『귀장역』을 토대로『주역』이 형성된 것으로 본다.

『주역』의 전체 구성은 본문에 해당하는 상하의 경문(經文)과 해설부문인 십익(十翼)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하의 경은 다시 64괘(卦)의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의 작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보통은 『계사전(繫辭傳)』에 근거하여 8괘는 상대(上代)의 복희씨(伏犧氏)가 황하(黃河)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있는 도형(圖形)을 보고,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 중간으로는 만물의 각기 마땅한 바를 살려서 천지만물의 모든 현상과 형태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8괘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종���의 학자들에 의하면, 복희는 우선 천지간의 모든 사물을 각기 둘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곧 건(健)과 순(順), 강(剛)과 유(柔), 기(奇)와 우( ), 대(大)와 소(小), 장(長)과 단(短) 같은 것을 음(陰)과 양(陽)의 둘로 나누어, 양을 ‘-’, 음을 ‘ ’로써 나타내었다. 『주역』에서는 이것을 효(爻)라고 하는데, 효는 본받는다는 뜻이다. 양을 ‘-’으로 표시하고, 음을 ‘ ’으로 표시한 것은 언어에 대한 한계성을 벗어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할 수 있게 해주며, 이것은 『주역』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 ‘ ’의 결합으로 생겨난 괘는 무한한 포괄성과 상징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음과 양은 그늘진 것과 밝은 것, 아래와 위, 찬 것과 더운 것, 선과 악 등 그 위치나 성질이 상반될 때 온순하고 나약하고 어둡고 그윽한 것을 음이라 한다면, 활발하고 굳세고 밝고 표면적인 것을 양이라 할 수 있다. 어찌되었건 모든 사물은 음과 양 어느 한 쪽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음과 양은 또 중첩하여 노음(老陰: )과 소양(少陽: ), 노양(老陽: )과 소음(少陰: )의 사상(四象)으로 나뉜다. 이것은 음양 양의(兩儀)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음이 양으로, 양이 음으로 유전변화하는 원리를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사상은 또 팔괘(八卦)를 낳는데, 괘는 높이 건다『掛』는 뜻이며, 팔괘는 소성괘(小成卦)라고도 한다. 팔괘는 건(乾: )·태(兌: ) ·이(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이다. 한편 8괘는 각각 자연물을 상징하는데 건은 천(天:하늘), 태는 택(澤:못) , 이는 화(火:불), 진은 뇌(雷:우레), 손은 풍(風:바람), 감은 수(水:물), 간은 산(山:산), 곤은 지(地:땅)를 상징한다.

또한 팔괘는 사물의 성정이나 가족 관계에 대입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 『설괘전(說卦傳)』에 의하면 건( ) 괘와 곤( ) 괘 중의 각 효(爻)는 서로를 구하여 6괘를 낳는다. 그것은 마치 건『父』·곤『母』 두 괘로부터 여섯 자녀가 태어남과 같으므로 ‘건곤육자(乾坤六子)’라고 한다. 즉 진(震:長子)·손(巽:長女)·감(坎:中男)·이(離:中女) ·간(艮:少男)·태(兌:少女)이다. 그런데 8괘만으로는 천하의 모든 사물을 포괄할 수 없으므로 8괘를 중첩하여 64괘를 만들었다.

64괘는 대성괘(大成卦)라고도 하는데, 64괘의 작자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예컨대 복희는 8괘를 그렸을 뿐이고 문왕이 64괘를 지었다는 설, 복희 때에 이미 64괘가 있었다는 설, 복희가 8괘를 지었고 신농이 64괘를 지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도 정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문왕 이전에 64괘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64괘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건(乾)·곤(坤)·준(屯)·몽(蒙)·수(需)·송(訟)·사(師)>·비(比)>·소축(小畜)>·이(履)· 태(泰)·��(否)·동인(同人)·대유(大有)·겸(謙)·예(豫)·수(隨)·고(蠱)·임(臨)·관(觀)·서합( )·분(賁)·박(剝)·복(復)·무망(無妄)·대축(大畜)·이( )·대과(大過)·감(坎)·이(離)·함(咸)·항(恒)·둔(遯)·대 장(大壯)·진(晋)·명이(明夷)·가인(家人)·규( )·건(蹇)·해(解)·손(損)·익(益)·쾌( )·구( )·췌(萃) ·승(升)·곤(困)·정(井)·혁(革)·정(鼎)·진(震)·간(艮)·점(漸)·귀매(歸妹)·풍(豊)·여(旅)·손(巽) ·태(兌)·환(渙)·절(節)·중부(中孚)·소과(小過)·기제(旣濟)·미제(未濟)이다.

한편 『주역』의 경문에 해당하는 괘사(卦辭)인 단사(彖辭)는 문왕이, 효사(爻辭)는 주공(周公)이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왕이 단사·효사를 지었고 주공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문왕이 『주역』의 경문을 지었다는 설은 『계사전』에 근거한다. 『계사전』에서는 “역의 일어남은 그 중고(中古)에 있어서였던가. 역을 지은 이는 그 우환(憂患)이 있었던가" 라고 하였고, 또한 ”역의 일어남은 그 은(殷)의 말세(末世), 주(周)의 성덕(盛德)에 당해서였던가. 문왕과 주(紂)의 일에 당해서인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문 전체를 문왕이 지었다는 설은 문제가 있다. 예컨대 승괘(升卦) 육사(六四)의 효사에 '왕용향우기산(王用享于岐山)'이라고 하였는데, 무왕(武王)이 은(殷)을 정벌하고 비로소 문왕을 추호(追號)하여 왕(王)이라고 하였으므로 합당하지 못하며, 또한 명이괘(明夷卦) 육오(六五)의 효사에 '기자지명이(箕子之明夷)'라는 말이 있는데 기자가 붙잡혀서 종이 된 것은 문왕 이후의 일이므로 역시 부합되지 않는다.

한편『춘추좌씨전』에는 “주(周)의 예(禮)가 모두 노(魯)에 있다. 내 이제야 주공의 덕과 주(周)의 왕된 까닭을 알겠다”라는 말에 근거하여 효사는 주공이 지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계사전』에 근거하여 문왕이 지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있고, 『춘추좌씨전』에 근거하여 주공이 효사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계사전』에서는 다만 제작 시대만을 암시하는 데 그쳤을 뿐이며, 『춘추좌씨전』에서도 주공이 효사를 지었다는 말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대(淸代)의 경학자 최술(崔述) 등은 단사·효사는 한 사람의 작품이며, 시대적으로는 은·주 사이로서 억지로 그 작자를 찾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주역』에는 경문 이외에 그 뜻을 해석하고 『주역』��� 이치를 선양한 십익(十翼)이 있다. 십익이라는 명칭은 후한(後漢)에서 시작되었는데, 한나라 이전에 는 그것을 대전(大傳)이라고 하였다. 십익의 익(翼)은 돕는다�� 뜻이다. 따라서 십익은 『주역』을 새의 날개처럼 돕고 있는 열 가지의 문헌이라는 의미이다. 곧 『단전(彖傳)』·『상전(象傳)』·『계사전(繫辭傳)』의 상(上)·하(下)와 『문언전(文言傳)』·『설괘전(說卦傳)』·『序卦傳』·『잡괘전(雜卦傳)』을 말한다. 『단전』은 괘사(卦辭)를 부연 설명한 것으로서 괘명(卦名)과 괘사를 괘의 상(象)과 육효(六爻)의 구성 등에 입각하여 해석한 것이다.

『상전』에는 대상(大象)과 소상(小象)이 있다. 대상은 괘 전체의 뜻과 상·하괘의 배치에 대한 논리에 입각하여 인사를 주로 설명한 것이며, 소상은 각 효(爻)의 효사(爻辭)를 부연 설명한 것이다. 『계사전』은 계사를 다시 설명하고 『주역』을 일관성 있는 논리로 해설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계사전』은 『주역』의 해설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주역』을 소재로 독자적인 철학을 천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계사전』으로 인하여 『주역』이 단순한 점서의 지위에서 벗어나 철학·윤리·수양의 책으로서 그 가치성을 보유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문언전』은 건·곤 두 괘에 한하여 미려한 문장으로 괘사 ·효사를 해설한 것이다. 『설괘전』은 괘 전체에 대한 총체적 해설로서, 8괘가 천지자연의 상징이라는 것, 소성괘에서 대성괘로 변화함에서의 이치와 공적 등을 설명한 것이다. 『서괘전』은 64괘 배열 순서의 의의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잡괘전』은 64괘에서 두 괘를 뽑아 서로 비교하여 그 의의와 특색을 상대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상의 십익은 고래(古來)로 공자가 지은 것이라고 믿어져 왔으나, 송대(宋代)에 이르러 구양수(歐陽脩)가 『역동자문(易童子問)』에서 처음으로 이것을 의심하였고, 청대(淸代)에 이르러 최술이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에서 십익은 공자의 작이 아니라고 단정하였다.

예를 들면 『계사전』에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자왈(子曰)이라고 표현하였으므로 공자의 문인이나 후대에 편집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십익에 포함된 사상은 전국시대 말기와 진한대(秦漢代)의 것이 많은데, 특히 『계사전』의 “형이상자위지도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등은 『노자(老子)』의 '도상무명(道常無名)', '박산즉위기(樸 散則爲器)'등과 연계되는 것이고, 또 이러한 대어법은 전국시대 이전에는 없었던 경향이다. 따라서 십익은 한 사람, 한 시대의 작품이 아니라 전국시대 말기에서 진한대에 이르는 사이의 학자에 의해서 완성된 작품으로 보인다. 결국 8괘 이하 십익에 이르기까지 『주역』 전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사람에 의해 증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복희의 8괘, 하·은대의 연산역·귀장역은 모두 복서용(卜筮用)이었으며, 『주역』도 여기에 근거하여 발전된 것이므로 그 목적은 본래 복서에 있었다. 복서법(卜筮法)은 『계사전』에 보인다. 이에 의거하면 점을 쳐서 일정한 괘를 얻어서 그 괘 혹은 변괘(變卦)에 있는 글에 의해 길흉(吉凶)을 판단한다. 이러한 사실은 『춘추좌씨전』등에도 보인다. 또한 『주례(周禮)』 『춘관(春官)』 『대종백(大宗伯)』에 의하면 속관(屬官)으로 태복(太卜)·서인(筮人)등이 있어서 점치는 일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원래 춘 관 대종백이란 제사의 장관이며, 그 속관이 제사의 일을 관장하였고, 교육·행정의 일은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라는 관직이 담당하였다. 이것은 역이 당시 점서였으며, 학문적인 것과는 구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때에도 인륜·도덕을 논한 책이 아니라 의약(醫藥)·복서류라 하여 태워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주역』에 이르러 십익이 추가됨으로써 종래의 복서용에 덧붙여 도덕적 의의가 추가되었다. 특히 『계사전』은 이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도 만년에 역을 좋아하여 위편삼절(韋編三絶) 하였다고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기록하고 있다. 한편 『논어(論語)』 『술이(述而)』에도 “나에게 몇 해 수명을 더 주어 오십에 역을 배우게 할 수 있다면 큰 과실은 없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초기의 유가는 인간이 현실사회를 어떻게 올바르게 사느냐의 실천적인 문제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도(天道)에 대해서는 공자도 꺼렸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백가가 쟁명(爭鳴)하면서 음양가(陰陽家)·도가(道家) 등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루면서 유가 측에서도 이 같은 이론을 필요로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주역』의 『계사전』이나 『예기』의 한 편이었던 『중용(中庸)』은 이 같은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한대(漢代)에 이르러 전하(田何)가 처음 역을 전하였다. 『한서』『예문지』및『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선제(宣帝) 때 하내(河內)의 여자가 옛집에서 『주역』을 발굴하여 헌상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선제·원제(元帝) 때에는 시수(施讐)·맹희(孟喜)·양구하(梁丘賀)·경방(京房) 등의 역설(易說)이 성행하였으며, 학관(學官)에 설치되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비직(費直)·고상(高相)�� 설(說)이 유행하였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다시 시수·맹희·양구하·경방 4가의 박사(博士)가 설치되었고, 건무(建武) 4년에 유흠(劉歆)이 『비씨역(費氏易)』을 학관에 설치하려고 하여 범승(范升)과 논란을 벌였다고 한다. 비직에 이르러 처음으로 『단전』·『상전』을 각 괘의 아래에 배분하였고 정현·왕필(王弼)·왕숙(王肅)등에게 전해졌다. 영제(靈帝) 때에는 경문을 돌에 새겨 대학 문에 설치하였다. 당시에는 『주역』을 읽지 않은 자는 관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중시된 것으로 보인다.

위(魏)의 왕숙·왕필은 비직·정현의 구본(舊本)에 의거하여 곤(坤) 이하의 63괘, 단(彖)·대상(大像)을 괘사의 뒤에 두고, 다음으로 소상(小象)을 각 괘효(卦爻)의 뒤에 붙였으며, 또 『문언전』을 건(乾)·곤(坤) 2괘에 배분하였다. 이 당시 비직의 역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주희(朱熹)가 “중간에 제유(諸儒)가 역을 혼란시켰다”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진(晋)의 한강백(韓康伯)은 그의 스승 왕필의 주석을 보충하였고, 당대에 이르러서는 공영달(孔潁達)이 왕필·한강백의 주에 자신의 소(疏)를 덧붙여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하나로서 『주역정의(周易正義)』를 찬하였다.

후에 귀숭경(歸崇敬)의 청에 의해 『주역』을 소경(小經)이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우세남(虞世南)도 “역을 읽지 않은 자는 재상(宰相)이 될 수 없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주역』이 중시된 것으로 보인다. 개성(開城) 2년에는 정담(鄭覃)이 주역석경(周易石經)을 세웠다. 송대에 이르러 여대방(呂大防)은 비직·정현·왕필 등이 고경(古經)을 혼란시켰다고 한탄하고 처음으로 『주역고경(周易古經)』 12편을 편집하였으며, 조열지(晁說之)는 『고문역(古文易)』 8편을 지었다. 이보다 앞서 왕수(王洙)가 자신의 가문에 소장되었던 고역(古易) 12편이 있었다고 하지만, 여조겸(呂祖謙)·주희 등은 조열지의 『고문역』 편차에 의거하여 『주역』을 해설하였다. 진희이(陳希夷)·소옹 (邵雍) 등은 선후천설(先後天設)을 제창하고 주희도 이것을 지극히 존신하였다.

송대 역학을 대별하면, 호원(胡瑗)은 그 뜻을 얻고, 소옹은 그 수(數)를 얻고, 정호(程顥)·정이(程 ) 등은 그 리(理)를 얻고, 주돈이(周敦 )는 그 체(體)를 얻고, 장재(張載)는 그 용(用)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주희의 『주역본의(周易本義)』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복서(卜筮)로서 역을 해설하였다. 금(金)에서는 왕필·한강백의 주석이 채택되고 국자감(國子監)에서도 교재로 사용하였다. 원대(元代)에 이르러 세조(世祖)는 건괘(乾卦)의 뜻을 취하여 국호(國號)를 대원(大元)이라고 하였고, 과거에서는 정이·주희의 주석을 표준으로 삼고 주소(注疏)를 겸용하였다. 또한 형(許衡)·오징(吳澄)·호병문(胡炳文) 등은 각각 주석을 달기도 하였다.

명대에서는 주희의 『주역본의』와 정이의 『역전』을 합각(合刻)하여 과거의 교재로 채택하였다. 영락(永樂) 13년에는 호광(胡廣) 등이 칙명으로 『역경대전(易經大傳)』을 간행하였고, 채청(蔡淸)·초횡(焦 )·양사기(楊士奇)·학경( 敬)·하해(何楷)·내지덕(來知德) 등이 주석을 가하였다. 청대에 이르러 이광지(李光地) 등이 칙명으로 『주역절중(周易折中)』을 간행하였으며, 수많은 학자들이 주석을 베풀었는데 『황청경해(皇淸經解)』에 수록된 것만도 30종에 달한다. 학풍은 대체로 한학(漢學)을 신봉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상수(象數)로써 『주��』의 본지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우번(虞 )의 역설(易說)이 크게 행해졌다.

『주역』의 기본사상은 천도(天道)를 미루어 인사(人事)를 밝히는 것이다. 중국 고대에 서는 자연과 인간의 법칙을 구별하지 않았다. 곧 인사의 법칙은 자연의 법칙에서 오는 것이므로,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을 길(吉)이요, 그것을 거스르는 것을 흉(凶)이라 하였다.

『주역』의 64괘 384효는 한편으로는 음양의 소장(消長), 곧 자연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모든 경우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컨대 일 년 열두 달도 각 괘에 배당되어 11월은 음기(陰氣)가 극점에 달하여 차츰 양(陽)이 생하려는 동지(冬至)의 계절이므로 복괘(復卦)에 해당한다. 이로부터 양이 점차로 생장하고 음이 점차로 소멸하는 순서에 따라 임괘(臨卦:12월)·태괘(泰卦:1월)·대장괘(大壯卦:2월)·쾌괘( 卦:3월)·건괘(乾卦:4월)가 뒤따르며, 여기서 양기(陽氣)가 극점에 달하여 점차 소멸하여 음기가 생장하므로 구괘( 卦:5월)·둔괘(遯卦:6월)·비괘(否卦:7월)·관괘(觀卦:8월)·박괘(剝卦:9월)·곤괘(坤卦:10월)가 이어진다. 이것은 자연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인 동시에 그 안에 일정한 법칙이 갖고 있으므로 사람은 이것을 응용하여 인사의 규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따라서 점을 쳐서 어떤 괘에 해당하면 그것의 가르침을 따라야 흉을 피하고 길하게 될 수 있는데, 이것을 『주역』에서는 선(善)이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주역』의 기본사상은 중정(中正)에 있다. 64괘의 각 효사(爻辭)에 보면 가장 중시되는 것이 중정이다. 곧 효사에서 길(吉)이라고 하는 것은 효가 중정을 얻은 경우이며, 흉이라고 한 것은 효가 중정을 얻지 못한 경우이다. 중이란 64괘 각각의 상하괘에서의 중효(中爻)를 가리킨다.따라서 괘 전체의 상은 흉괘(凶卦)라 하더라도 중효에 속하는 효사에는 흔히 길(吉), 회무(悔亡)라든가 무구(無咎)라는 글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흉하고 험한 상황일지라도 중도(中道)를 이행하면 화를 면하고 길하게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정(正)은 각 효가 마땅한 위치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64괘는 모두 6효로 성립하고 각 효가 음·양 가운데 하나임은 물론이지만, 양효·음효는 본래 일정한 위치가 있다. 6효를 아래에서부터 순서를 정하여 1·3·5는 양이 처할 자리이며, 2·4·6은 음이 처할 자리이다.따라서 음)·양이 각각 자기 위치에 있는 경우에 정(正)을 얻었다고 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정을 잃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각각의 효가 모두 정위(正位)를 얻은 것이 기제괘(旣濟卦)이다. 요컨대 역은 자연의 법칙으로서의 천도를 상징화하고, 인간이 이에 순응함을 인도로서 규정하며,중정한 것을 길(吉)이라고 하여 가장 선하다고 보는 것이다.

『주역』의 주석서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위(魏)의 왕필이 주석한 것이다. 그는 한 자(字) 한 구(句)를 괘의 형태에 근거하여 무리하게 설명하려는 한유(漢儒)와는 달리『주역』을 오로지 처세(處世)의 지혜서(智慧書)로서 파악하였다. 당대(唐代)에 간행된『오경정의』에서도 이것을 채택하였으며, 송대(宋代)에 이르러 정이도 『역전(易傳)』에서 왕필의 태도를 계승하 여 순수하게 윤리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주희는『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 오히려 점서로서 『주역』을 해설하였다.『역경』은 유교의 기본 경서인 오경(五經)의 하나로서 천지 자연과 인간 세계의 본질 및 그 변화 현상을 기호화하고 설명을 가한 책이다. 본래의 명칭은 『역(易)』 또는 『주역(周易)』 이었는데, 점서(占書)였지만 공자(孔子)가 이에 대해 철학적인 의미를 붙여 해설을 한 이후 유교의 경서인 『역경』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역의 의미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석척설( 說)로서 역을 도마뱀을 나타내는 상형문자(象形文字)로 보는 것이다. 중국 고대인들은 도마뱀이 매일 12번씩 색깔을 바꾼다고 믿었으며, 역은 바로 그 변화의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설은 본래 『설문(說文)』에서 시작되어 후대에도 이 설을 지지한 학자도 있었으나, 과연 도마뱀이 하루에 12번씩 색깔을 바꿀 수 있는가도 의문이고, 역이란 글자가 상형문자인가도 문제이다. 설령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역의 가르침이 단순히 변화의 이치만을 제시하는가가 문제이므로 설득력 이 미흡하다.

둘째는 일월설(日月說)로서 역을 일(日)과 월(月)의 복합문자로 보는 것이다. 이 설 역시 『설문』에 근거한 것인데, 일(日)은 양(陽)을, 월(月)은 음(陰)을 표시하며, 따라서 역을 음양소장(陰陽消長)에 관한 책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연구성과에 의해 일·월의 복합자가 명(明)으로 밝혀짐으로써 제3의 설이 출현하게 되었다.셋째는 자의설(字義說)로서 역을 그 자체에 내포된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역이라는 글자는 다시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첫째, 이간(易簡) 또는 간역(簡易)으로서 간단하고 ��이하다는 의미이다. 이에 의하면 하늘과 땅은 모든 현상과 온갖 사물을 포용하고 생성화육(生成化育)하고 있지만 번거롭거나 요란스럽지는 않다. 천체의 운행은 확연하여 사람에 그 쉬운 것을 보여주고, 땅의 작용은 순탄하여 사람에게 간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변역(變易)으로서 변하고 바뀐다는 의미이다. 천지간의 모든 상황과 사물은 항상 변하고 바뀜으로써 음과 양 두 기운이 교섭한다. 셋째, 불역(不易)으로서 바뀌거나 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 그 위치를 바꾸지 않는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의설에서는 역을 이상의 세 가지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본다. 이것을 맨 처음 제시한 것은 위서(緯書)였는데,『주역정의(周易正義)』에서도 이 설을 따르고 있다. 한편 『주역』에서 주(周)의 의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한대(漢代)의 정현(鄭玄)이 주장한 것으로서 ‘두루’, ‘널리’라는 의미이다. 역의 가르침의 원리는 우주(宇宙) 사이에 널리 미친다는 것이다.

둘째는 주를 시대명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고대에는 연산역(連山易)·귀장역(歸藏易)·주역의 삼역(三易)이 있었다고 한다. 연산역은 신농씨(神農氏) 시대의 역이고, 귀장역은 황제(黃帝) 시대의 역이며, 주역은 주대(周代) 문왕(文王) 때의 역이라는 것이다. 정현은 연산이란 산에서 나온 구름이 연결되어 끊어지지 않는 모양이고, 귀장이란 만물이 그 속에 감추어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연산역을 하대(夏代)의 역, 귀장역을 은대(殷代)의 역, 주역을 주대의 역이라 보기도 한다. 하·은대에 연산·귀장이란 역이 행해졌다는 것은 한대 환담(桓譚)의『신론(新論)』에 연산·귀장이란 말이 있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춘추시대에 복서(卜筮)를 하여 길흉을 판단함에 『주역』이외의 말을 사용한 것이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흔히『연산역』·『귀장역』을 토대로『주역』이 형성된 것으로 본다.

『주역』의 전체 구성은 본문에 해당하는 상하의 경문(經文)과 해설부문인 십익(十翼)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하의 경은 다시 64괘(卦)의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의 작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보통은 『계사전(繫辭傳)』에 근거하여 8괘는 상대(上代)의 복희씨(伏犧氏)가 황하(黃河)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있는 도형(圖形)을 보고,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 중간으로는 만물의 각기 마땅한 바를 살려서 천지만물의 모든 현상과 형태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8괘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종���의 학자들에 의하면, 복희는 우선 천지간의 모든 사물을 각기 둘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곧 건(健)과 순(順), 강(剛)과 유(柔), 기(奇)와 우( ), 대(大)와 소(小), 장(長)과 단(短) 같은 것을 음(陰)과 양(陽)의 둘로 나누어, 양을 ‘-’, 음을 ‘ ’로써 나타내었다. 『주역』에서는 이것을 효(爻)라고 하는데, 효는 본받는다는 뜻이다. 양을 ‘-’으로 표시하고, 음을 ‘ ’으로 표시한 것은 언어에 대한 한계성을 벗어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할 수 있게 해주며, 이것은 『주역』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 ‘ ’의 결합으로 생겨난 괘는 무한한 포괄성과 상징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음과 양은 그늘진 것과 밝은 것, 아래와 위, 찬 것과 더운 것, 선과 악 등 그 위치나 성질이 상반될 때 온순하고 나약하고 어둡고 그윽한 것을 음이라 한다면, 활발하고 굳세고 밝고 표면적인 것을 양이라 할 수 있다. 어찌되었건 모든 사물은 음과 양 어느 한 쪽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음과 양은 또 중첩하여 노음(老陰: )과 소양(少陽: ), 노양(老陽: )과 소음(少陰: )의 사상(四象)으로 나뉜다. 이것은 음양 양의(兩儀)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음이 양으로, 양이 음으로 유전변화하는 원리를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사상은 또 팔괘(八卦)를 낳는데, 괘는 높이 건다『掛』는 뜻이며, 팔괘는 소성괘(小成卦)라고도 한다. 팔괘는 건(乾: )·태(兌: ) ·이(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이다. 한편 8괘는 각각 자연물을 상징하는데 건은 천(天:하늘), 태는 택(澤:못) , 이는 화(火:불), 진은 뇌(雷:우레), 손은 풍(風:바람), 감은 수(水:물), 간은 산(山:산), 곤은 지(地:땅)를 상징한다.

또한 팔괘는 사물의 성정이나 가족 관계에 대입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 『설괘전(說卦傳)』에 의하면 건( ) 괘와 곤( ) 괘 중의 각 효(爻)는 서로를 구하여 6괘를 낳는다. 그것은 마치 건『父』·곤『母』 두 괘로부터 여섯 자녀가 태어남과 같으므로 ‘건곤육자(乾坤六子)’라고 한다. 즉 진(震:長子)·손(巽:長女)·감(坎:中男)·이(離:中女) ·간(艮:少男)·태(兌:少女)이다. 그런데 8괘만으로는 천하의 모든 사물을 포괄할 수 없으므로 8괘를 중첩하여 64괘를 만들었다.

64괘는 대성괘(大成卦)라고도 하는데, 64괘의 작자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예컨대 복희는 8괘를 그렸을 뿐이고 문왕이 64괘를 지었다는 설, 복희 때에 이미 64괘가 있었다는 설, 복희가 8괘를 지었고 신농이 64괘를 지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도 정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문왕 이전에 64괘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64괘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건(乾)·곤(坤)·준(屯)·몽(蒙)·수(需)·송(訟)·사(師)>·비(比)>·소축(小畜)>·이(履)· 태(泰)·��(否)·동인(同人)·대유(大有)·겸(謙)·예(豫)·수(隨)·고(蠱)·임(臨)·관(觀)·서합( )·분(賁)·박(剝)·복(復)·무망(無妄)·대축(大畜)·이( )·대과(大過)·감(坎)·이(離)·함(咸)·항(恒)·둔(遯)·대 장(大壯)·진(晋)·명이(明夷)·가인(家人)·규( )·건(蹇)·해(解)·손(損)·익(益)·쾌( )·구( )·췌(萃) ·승(升)·곤(困)·정(井)·혁(革)·정(鼎)·진(震)·간(艮)·점(漸)·귀매(歸妹)·풍(豊)·여(旅)·손(巽) ·태(兌)·환(渙)·절(節)·중부(中孚)·소과(小過)·기제(旣濟)·미제(未濟)이다.

한편 『주역』의 경문에 해당하는 괘사(卦辭)인 단사(彖辭)는 문왕이, 효사(爻辭)는 주공(周公)이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왕이 단사·효사를 지었고 주공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문왕이 『주역』의 경문을 지었다는 설은 『계사전』에 근거한다. 『계사전』에서는 “역의 일어남은 그 중고(中古)에 있어서였던가. 역을 지은 이는 그 우환(憂患)이 있었던가" 라고 하였고, 또한 ”역의 일어남은 그 은(殷)의 말세(末世), 주(周)의 성덕(盛德)에 당해서였던가. 문왕과 주(紂)의 일에 당해서인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문 전체를 문왕이 지었다는 설은 문제가 있다. 예컨대 승괘(升卦) 육사(六四)의 효사에 '왕용향우기산(王用享于岐山)'이라고 하였는데, 무왕(武王)이 은(殷)을 정벌하고 비로소 문왕을 추호(追號)하여 왕(王)이라고 하였으므로 합당하지 못하며, 또한 명이괘(明夷卦) 육오(六五)의 효사에 '기자지명이(箕子之明夷)'라는 말이 있는데 기자가 붙잡혀서 종이 된 것은 문왕 이후의 일이므로 역시 부합되지 않는다.

한편『춘추좌씨전』에는 “주(周)의 예(禮)가 모두 노(魯)에 있다. 내 이제야 주공의 덕과 주(周)의 왕된 까닭을 알겠다”라는 말에 근거하여 효사는 주공이 지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계사전』에 근거하여 문왕이 지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있고, 『춘추좌씨전』에 근거하여 주공이 효사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계사전』에서는 다만 제작 시대만을 암시하는 데 그쳤을 뿐이며, 『춘추좌씨전』에서도 주공이 효사를 지었다는 말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대(淸代)의 경학자 최술(崔述) 등은 단사·효사는 한 사람의 작품이며, 시대적으로는 은·주 사이로서 억지로 그 작자를 찾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주역』에는 경문 이외에 그 뜻을 해석하고 『주역』��� 이치를 선양한 십익(十翼)이 있다. 십익이라는 명칭은 후한(後漢)에서 시작되었는데, 한나라 이전에 는 그것을 대전(大傳)이라고 하였다. 십익의 익(翼)은 돕는다�� 뜻이다. 따라서 십익은 『주역』을 새의 날개처럼 돕고 있는 열 가지의 문헌이라는 의미이다. 곧 『단전(彖傳)』·『상전(象傳)』·『계사전(繫辭傳)』의 상(上)·하(下)와 『문언전(文言傳)』·『설괘전(說卦傳)』·『序卦傳』·『잡괘전(雜卦傳)』을 말한다. 『단전』은 괘사(卦辭)를 부연 설명한 것으로서 괘명(卦名)과 괘사를 괘의 상(象)과 육효(六爻)의 구성 등에 입각하여 해석한 것이다.

『상전』에는 대상(大象)과 소상(小象)이 있다. 대상은 괘 전체의 뜻과 상·하괘의 배치에 대한 논리에 입각하여 인사를 주로 설명한 것이며, 소상은 각 효(爻)의 효사(爻辭)를 부연 설명한 것이다. 『계사전』은 계사를 다시 설명하고 『주역』을 일관성 있는 논리로 해설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계사전』은 『주역』의 해설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주역』을 소재로 독자적인 철학을 천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계사전』으로 인하여 『주역』이 단순한 점서의 지위에서 벗어나 철학·윤리·수양의 책으로서 그 가치성을 보유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문언전』은 건·곤 두 괘에 한하여 미려한 문장으로 괘사 ·효사를 해설한 것이다. 『설괘전』은 괘 전체에 대한 총체적 해설로서, 8괘가 천지자연의 상징이라는 것, 소성괘에서 대성괘로 변화함에서의 이치와 공적 등을 설명한 것이다. 『서괘전』은 64괘 배열 순서의 의의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잡괘전』은 64괘에서 두 괘를 뽑아 서로 비교하여 그 의의와 특색을 상대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상의 십익은 고래(古來)로 공자가 지은 것이라고 믿어져 왔으나, 송대(宋代)에 이르러 구양수(歐陽脩)가 『역동자문(易童子問)』에서 처음으로 이것을 의심하였고, 청대(淸代)에 이르러 최술이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에서 십익은 공자의 작이 아니라고 단정하였다.

예를 들면 『계사전』에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자왈(子曰)이라고 표현하였으므로 공자의 문인이나 후대에 편집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십익에 포함된 사상은 전국시대 말기와 진한대(秦漢代)의 것이 많은데, 특히 『계사전』의 “형이상자위지도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등은 『노자(老子)』의 '도상무명(道常無名)', '박산즉위기(樸 散則爲器)'등과 연계되는 것이고, 또 이러한 대어법은 전국시대 이전에는 없었던 경향이다. 따라서 십익은 한 사람, 한 시대의 작품이 아니라 전국시대 말기에서 진한대에 이르는 사이의 학자에 의해서 완성된 작품으로 보인다. 결국 8괘 이하 십익에 이르기까지 『주역』 전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사람에 의해 증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복희의 8괘, 하·은대의 연산역·귀장역은 모두 복서용(卜筮用)이었으며, 『주역』도 여기에 근거하여 발전된 것이므로 그 목적은 본래 복서에 있었다. 복서법(卜筮法)은 『계사전』에 보인다. 이에 의거하면 점을 쳐서 일정한 괘를 얻어서 그 괘 혹은 변괘(變卦)에 있는 글에 의해 길흉(吉凶)을 판단한다. 이러한 사실은 『춘추좌씨전』등에도 보인다. 또한 『주례(周禮)』 『춘관(春官)』 『대종백(大宗伯)』에 의하면 속관(屬官)으로 태복(太卜)·서인(筮人)등이 있어서 점치는 일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원래 춘 관 대종백이란 제사의 장관이며, 그 속관이 제사의 일을 관장하였고, 교육·행정의 일은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라는 관직이 담당하였다. 이것은 역이 당시 점서였으며, 학문적인 것과는 구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때에도 인륜·도덕을 논한 책이 아니라 의약(醫藥)·복서류라 하여 태워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주역』에 이르러 십익이 추가됨으로써 종래의 복서용에 덧붙여 도덕적 의의가 추가되었다. 특히 『계사전』은 이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도 만년에 역을 좋아하여 위편삼절(韋編三絶) 하였다고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기록하고 있다. 한편 『논어(論語)』 『술이(述而)』에도 “나에게 몇 해 수명을 더 주어 오십에 역을 배우게 할 수 있다면 큰 과실은 없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초기의 유가는 인간이 현실사회를 어떻게 올바르게 사느냐의 실천적인 문제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도(天道)에 대해서는 공자도 꺼렸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백가가 쟁명(爭鳴)하면서 음양가(陰陽家)·도가(道家) 등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루면서 유가 측에서도 이 같은 이론을 필요로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주역』의 『계사전』이나 『예기』의 한 편이었던 『중용(中庸)』은 이 같은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한대(漢代)에 이르러 전하(田何)가 처음 역을 전하였다. 『한서』『예문지』및『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선제(宣帝) 때 하내(河內)의 여자가 옛집에서 『주역』을 발굴하여 헌상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선제·원제(元帝) 때에는 시수(施讐)·맹희(孟喜)·양구하(梁丘賀)·경방(京房) 등의 역설(易說)이 성행하였으며, 학관(學官)에 설치되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비직(費直)·고상(高相)�� 설(說)이 유행하였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다시 시수·맹희·양구하·경방 4가의 박사(博士)가 설치되었고, 건무(建武) 4년에 유흠(劉歆)이 『비씨역(費氏易)』을 학관에 설치하려고 하여 범승(范升)과 논란을 벌였다고 한다. 비직에 이르러 처음으로 『단전』·『상전』을 각 괘의 아래에 배분하였고 정현·왕필(王弼)·왕숙(王肅)등에게 전해졌다. 영제(靈帝) 때에는 경문을 돌에 새겨 대학 문에 설치하였다. 당시에는 『주역』을 읽지 않은 자는 관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중시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 說文解字(재미나는 한문)
글쓴이 : 樂而忘憂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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