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공문십철

浩 根 書 堂 2012. 1. 13. 13:51

孔門十哲(공문십철) 논어(集註) 해설 

사마천의 『史記』「孔子世家」에 따르면, 공자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모두 3천명으로 그중 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달한 자가 72명이라고 되어 있다. 흔히 이들을 神通鬼才라 하고, 그중 열 명의 제자를 孔門十哲(공문십철)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자가 제자들의 장점에 따라 언급한 열 명의 제자로『論語』「先進篇」에 나와 있다.


“子ㅣ曰 從我於陳蔡者ㅣ 皆不及門也로다 德行엔 顔淵 閔子騫 冉伯牛 仲弓이오 言語엔 宰我 子貢이오 政事엔 冉有 季路ㅣ오 文學엔 子游 子夏이니라(공자 가라사대 진나라 채나라에서 나를 따른 자 모두가 문에 미치지 못했도다(문하에 없도다). 덕행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오, 언어엔 재아 자공이오, 정사엔 염유 계로요, 문학엔 자유 자공이니라)”


위에서 말한 덕행은 모든 행위가 바른 것, 언어란 제후간 응대 수사가 뛰어난 것, 정사란 치국에 뛰어난 것, 문학이란 고전에 정통한 것이다. 덕행, 언어, 정사, 문학 네 가지를 들어 제자들을 나누어 말하였기에 흔히 四科十哲이라고도 한다. 四科라 한 것은 후한 때 왕충이 쓴 『논형(論衡)』의 문공편(問孔篇)과 『後漢書(후한서)』의 정현전(鄭玄傳)에서부터이고, 十哲이란 명칭을 부여한 것은 당나라 때 유 지기가 지은 중국(中國) 최초(最初)의 사학(史學) 이론서(理論書)인『史通』의 암혹편(暗惑篇)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공자의 제자 가운데 위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증자라 일컫는 曾參이나 有若 子張 등이 포함되지 않았기에 주자는 ‘皆不及門也로다’를 ‘문하에 없도다’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이 당시 공자의 나이는 69세로 철환주유를 마치고 마지막 말년을 노나라에서 보낼 때였기 때문이다. 어쨌듯 철환주유를 하면서 가장 곤경에 빠졌던 때가 진나라와 채나라에서였다. 이때 그를 따랐던 열 명의 제자 가운데 진나라나 채나라에서 벼슬한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皆不及門也로다’를 ‘벼슬에 오르지 못했도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참고로 열 명의 제자들의 면면을 잠깐씩 들여다본다.


① 안회(顔回, 기원전 521년~기원전490년) : 字는 연(淵).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30세가 적었다. 가정이 빈한하였지만 매우 열심히 학문을 닦아 공자가 안자라 존칭하였을 정도였다. 안회(안자)가 32살에 돌아가셨을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망쳤다(噫라 天喪予(천상여)삿다 天喪予(천상여)삿다 : 『論語』「先進篇」)고 통곡할 만큼 탁월한 제자였다.


주역에도 안회를 언급하였는데, 그가 부활할 것을 예언하며 “공자 말씀하시길 안씨의 자식(顔子)이 그 자못 가까울진저(거의 부활할 조짐이 보일진저!) 선하지 않는 일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않음이 없었으며(어른 알았으며), 그것을 알면 일찍이 다시 행하지 아니하나니(子曰 顔氏之子ㅣ 其殆庶幾乎인뎌 有不善이면 未嘗不知하며 知之ㅣ면 未嘗復行也하나니)”라고 하였다.


안회는 누추한 거리에 살면서 대나무로 엮은 밥그릇에 밥을 담아 쪽박의 물을 먹으면서도(一簞食와 一瓢飮에 在陋巷이라) 조금도 배우는 즐거움이 변치 않으니 공자는 안회야말로 참으로 어질다(賢哉아 回也여)고 거듭거듭 칭찬했다(『論語』雍也편).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에게 제자 중 누가 배우기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안회를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단명으로 죽어 지금은 없다.


그후로는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들은 바가 없다(不遷怒하며 不貳過하더니 不幸短命死矣라 今也則亡하니 未聞好學者也ㅣ라 : 『論語』雍也편)”고 하였을 정도이다. 안회는 또한 은둔군자적인 면모가 강하여 莊子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② 민자건(閔子騫, 기원전 536~?) : 성은 민, 이름은 손(損), 자는 자건이다.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15세 아래였다. 살이 찐 편이었고 과묵했다고 한다. 효행으로 세상에 알려져 중국 24효 중 하나로 꼽히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로부터 학대를 받았지만 원망하지 않고 효도하고 공경하여 집안이 화목했고 이웃의 칭찬을 받았다. 공자 또한 “孝哉라 閔子騫이여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이로다(효성스럽다, 민자건이여. 사람들이 그 부모형제의 칭찬하는 말에 트집잡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였다.


③ 염백우(冉伯牛, 기원전 544년~?) : 성은 염, 이름은 경(耕), 자는 백우.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7세 아래인데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안회 민자건과 더불어 공자의 면모에 가깝다고 일컬어지나 천형으로 일컬어지는 나환, 곧 문둥병을 앓았다. 이때 공자가 병문안을 하나 염백우가 피하자 남창너머로 손을 잡으며 “이럴 리가 없는데! 운명이로구나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伯牛有疾이어늘 子問之하실새 自牖로 執其手하사 曰亡之러니 命矣夫라 斯人也而有斯疾也할새 斯人也而有斯疾也할새 :『論語』雍也편)라며 탄식하셨다.


④ 중궁(仲弓, 기원전 522년~?) : 성은 염(冉), 이름은 옹(雍), 자는 중궁.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29세 적다. 덕행이 높고 박학하여 공자가 왕이 될 재목이라고 칭찬하자 염옹은 출신이 미천함을 한탄했다. 그러자 공자는 “얼룩소 새끼로 털이 붉고 뿔이 바르면 희생으로 쓰려 하지 않아도 산천이 내버려 두겠는가(子謂仲弓曰 ꝃ牛之子ㅣ 騂且角이면 雖欲勿用이나 山川은 其舍諸아 :『論語』雍也편)”하며 반드시 등용되어 쓰일 것이라고 격려했다. 실제로 중궁은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강자의 재상이 되어 대소사를 잘 다스렸다. 한 가지 약점은 말재주가 없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으나 이마저도 공자는 "어찌 말재주를 쓰리오, 남을 대함에 입으로써 하면 자주 남에게 미움을 받느니라(焉用佞이리오 禦人以口給하야 屢憎於人하나니 :『論語』公冶長편)”라고 옹호해주었다.


⑤ 재아(宰我, 기원전 522년~?) : 노나라 사람으로 성은 재, 이름은 여(予), 자는 아(我), 또는 재아(宰我)라고도 한다. 재아는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언변이 뛰어났지만 게으르고 반항심이 강해 공자의 가르침을 잘 따르지 않았다. 이에 관해서는『論語』公冶長편에 잘 나타나 있다. “공자 가라사대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은 흙손으로 다질수가 없으니 재여에 대해 무어라 나무라리오. 공자 가라사대 처음에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그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믿었는데 지금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그 말을 듣고 그 행동을 살피노니 재여로 해서 이를 바꾸었노라(子ㅣ 曰朽木은 不可雕也며 糞土之牆은 不可杇也니 於予與에 何誅리오 子ㅣ 曰始吾於人也에 聽其言而信其行이라니 今吾於人也에 聽其言而觀其行하노니 於予與에 改是와라)


⑥ 자공(子貢, 기원전 520년~기원전 456년) : 위(衛)나라 사람으로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자는 자공이다. 공자보다 31세 적다. 자공은 대단히 영리해서 원칙을 포기하지 않고도 출세하는 방법을 알았으며, 사교에 능해 아첨하지 않고도 섬기는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또 말을 유창하게 하고,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나 계씨의 종주가 외교회의에 그를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論語』에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항상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배우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轍環天下하는데 재산을 다 쓸 정도로 공자에 대한 존경이 지극했다. 두루 능력이 뛰어나 사람들이 자공에게 공자에 필적할 만하다고 말할 때마다 자공은 극히 차분한 어조로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이해가 부족한 소치라고 말하였다. 자공은 공자가 돌아가신 후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각각 대부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제나라에서 죽었다.


⑦ 염유(冉有, 기원전 522년~?) : 노나라 사람으로 성은 염, 이름은 구(求), 자는 자유(子有) 또는 염유라고도 부른다. 화술에 능하여 상대를 부드럽게 설득할 줄 알았으며, 유능한 행정가이자 용맹스런 장수였다. 약삭빠르게 자신에게 이로운 길을 선택하는 그의 재주는 정치적으로 출세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한번은 염구가 공자에게 “선생님의 도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힘이 모자랍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힘이 모자라는 사람은 중도에 그만두지만 지금 자네는 스스로 선을 그으니라(冉求曰 非不說子之道언마는 力不足也로이다 子曰 力不足者는 中道而廢하나니 今女는 畫이로다”고 나무랄 정도로 공자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따르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을 대하든 일을 선택하든 항상 실리를 냉정하게 가늠했던 그는 후에 공자를 떠나 계씨 밑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세금 제도를 시행하는데 있어 계씨와 공자의 의견이 맞섰을 때 염구는 계씨를 도왔는데, 결국 공자에게 이단으로 공격당했다.


⑧ 자로(子路, 기원전 542년~기원전 480년) :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이다. 子路는 자(字)이며, 계로(季路)라고도 한다. 노(魯)나라 변(卞, 지금의 산동성) 출신으로, 무용(武勇)에 뛰어났으며 인품이 호방하고 성실하였다. 무술로써 항상 공자를 수행하였는데 공자는 가끔 그의 만용과 과단한 성격에 대해 꾸지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의 솔직한 성격으로 공자와 가장 마음이 통했던 제자로 꼽혀지기도 한다. 공자와 자로의 이러한 관계는 논어에 자주 언급된다. 자로는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으나 위나라 괴외(蕢聵)의 내란 때 전사했다. 이때 그의 시체가 소금에 절여진 것을 안 공자는 매우 슬퍼했다고 했다. 공자보다 9세 연하였다.


⑨ 자유(子游, 기원전 506년~?) : 오나라 사람으로 성은 언(言), 이름은 언(偃), 자는 자유이다. 공자보다 45세나 적은 나이지만,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문학적 소양이 가장 풍부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가장 주요하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의례였다. 자유는 일찍이 노나라 무성의 성주가 되어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어느 날 공자가 자유가 다스리고 있는 무성으로 가다 보니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공자는 흐뭇한 마음으로 자유를 만나 빙그레 미소지으며 “닭을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을까”라고 묻자 자유는 공자의 뜻을 알아차리고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들으오니 군자가 도를 들으면 사람들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얘들아, 언의 말이 옳다.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었니라”고 하였다(子之武城하사 聞弦歌之聲하시고 夫子莞爾而笑曰 割雞에 焉用牛刀리오 子游對曰 昔者偃也ㅣ 聞諸夫子호니 曰君子學道이면 則愛人이오 小人學道이면 則易使也ㅣ로이다 子曰二三者아 偃之言이 是也ㅣ니 前言戱之耳니라“.


⑩ 자하(子夏, 기원전 507년~?) :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자는 자하. 위나라 온읍 사람으로 공자보다 44세가 적다. 문학에 뛰어났으며 공자의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크게 한도를 벗어나지 않는 경미한 도덕 문제에는 다소 융통성을 가질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공자처럼 절대적 선을 위한 一以貫之의 입장보다는 저속적인 면이 많이 드러난다. 훗날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 되었으나 아들이 죽자 통곡을 하다가 눈이 멀었다고 한다.


[출처] 孔門十哲(공문십철) |작성자 법고창신



출처 : 苞桑之世(포상지세)
글쓴이 : 포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