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무오사화와 영남의 거유 퇴게 이황과 남명 조식

浩 根 書 堂 2012. 8. 7. 20:55

무오사화와 영남의 거유 퇴게 이황과 남명 조식

 

 

고려말에 권문세족이라 불리는 지배층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실패하였다. 이 때 나타난 세력이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였다.

이들은 사회개혁을 주장했으나 방법론에 있어서 둘로 갈라졌다.

강경파와 온건개혁파로 나뉜 것이다.
강경파인 정도전 하륜 권근 조준 등은 새로 등장한 무장인 이성계를 내세웠다.

이방원은 반대파를 간단히 제거하여 버렸다.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는 정몽주를 타살한 것이다.

이들은 마침내 이색, 길재 등 온건파를 누르고 역성혁명을 성공시켰다.

권력을 잡은 신흥사대부들은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공신(功臣)을 양산해내며 부와 권력을 독차지하였다.

이들이 훈구파이다. 한번 공신에 책봉되면 공신전과 노비가 지급되며 자자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이어간다.

또한 과거에 떨어져도 벼슬자리를 해먹을 수 있었다.

이를 조상의 음덕으로 관리에 서용된다 하여 '음서(陰敍)'라고 한다.

이러다 보니 이들 훈구파는 점점 부패해지고 한정된 벼슬자리를 두고 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극렬해졌다.

한편 중소지주층으로 지방에 거점을 둔 온건개혁파들은 향촌에 머물며 후학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사림파이다.

이들이 대거 관직에 나선 것은 성종 때에 와서의 일이다.

성종임금은 깨끗한 사림파로 하여금 훈구파를 견제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선조 때에 와서 사림파가 확실하게 권력을 잡게 될 때까지 훈구파와 사림파 간에, 때로는 훈구파간에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이 있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이 이 기간에 있었다.

이러한 난세에 백두대간 태백산과 지리산에서 발원한 낙동강 줄기 하나씩 곁에 두고 은둔하며 남송의 주자를 철저히 닮으려고 했던 두 도학자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다. 그들은 똑같이 신유년(1501년)에 태어난 닭띠 갑장이었다.

이들의 학통을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일손 김굉필]--조광조--이이 성혼
.............................................................................................--김안국--조식
.............................................................................................--이언적--이황

김일손은 연산군4년 무오사화 때(1498년) 사형당했으며

정여창은 무오사화 때 귀양을 갔다가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김굉필 역시 무오사화 때 귀양을 갔다가 갑자사화 때 사형당하였다.

김안국은 중종 14년 기묘사화 때(1519년) 관직을 삭탈당한 바 있으며, 조광조는 기묘사화 때 뜻을 펴지 못하고 그를 부른 중종에게서 사약을 받았다.

이언적은 명종 년간의 을사사화 때(1545년) 유배 후 사사되었다.

이황과 조식은 한창 공부할 시기인 나이 스물에 기묘사화를 목도하였다.

그리고 스승들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었겠는가.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던 이황은 을사사화를 보면서 자신의 처세가 옳았음을 확인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명종이 그를 수차례 불렀으나 번번히 출사를 거절하였으며 청량산 아래 도산서당에서 후학들과 함께 공부만 하였다.

조식 또한 중종과 명종이 수차례 불렀으나 단 한 차례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관찰사가 만나자고 청하여도 거절할 정도였다.

그는 나이 60이 넘어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임진란 때의 의병장인 곽재우와 정인홍 훗날 서인 동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를 시작한 동인의 영수 김효원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이들이 추구했던 학문은 성리학이다. 공자 맹자의 고대유학과 구분하여 성리학을 중세 유학이라고도 하는데 그 핵심 철학은 이기이원론이다.

이를 완성한 사람은 남송의 주희였다. 당시 주희가 살던 시대는 참으로 암울했던 시기였다.

요나라와 형제의 연을 맺고 해마다 명주 20만필과 은 10만냥을 바쳐야 했던 송이 요나라를 물리치고자 금나라를 끌여들여 요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금에게 중원을 내주고 장강 이남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난 것이 이기이원론이다.

즉 금나라가 송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은 열등하고 사악한 기가 순수하고 올바른 이를 억압하고 있는 상태로 본 것이며 이가 기를 극복하고 현실로 나타날 때 세상은 바로잡힌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민들의 자기합리화를 정리한 것이 주희였다. 성리학에서 대의명분을 그토록 중시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성리학을 처음 받아들였던 고려말에 정몽주나 길재도 부패한 권문세족을 기로 보고 자신들 신흥사대부들을 이로 보았다.

이황과 조식도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의 어지러운 조선 사회를 바라보았다. 훈구파를 기로 보고 사림파를 이로 본 것이다.

'동방주자'라고도 불리는 이황, 그리고 조식의 이러한 이기이원론은 당시 사림세력뿐만 아니라 훗날 붕당정치로 갈려졌을 때에도 동인, 남인들의 사상적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은 똑같이 무릉도원을 이상향으로 보았음인지 다음과 같은 시조 한 수씩을 남겼다.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못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지지마라 어주자(漁舟子) 알까 하노라


청량산은 봉화군 낙동강 상류쪽에 있는 산으로 도산서원에서 가깝다.

그곳의 선경을 말 못하는 백구가 소문낼 리 없고 다만 복숭아꽃이 떨어져 흘러나가 외부사람들이 알고 몰려올 것을 걱정한 내용인데 정작 그 자신이 시조를 지어 널리 알리고 있다.

이 시조를 읽었음인지 남명 조식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무릉도원이라고 주장한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매오 나는 옌가 하노라


영남의 이 두 거유는 은둔의 처세술로 모두 70을 넘게 살았다.

출처 :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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