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임진전쟁과 서애유성룡 VS 병산서원

浩 根 書 堂 2012. 11. 17. 22:22

                 임진전쟁과 서애유성룡

 

 서애 유성룡 ▲

 

 서애 유성룡의 붓 글씨 ▲

 

조선 선조 때의 재상(1542~1607).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대사헌(大司憲/사헌부의 종2품관)·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지방관 종2품관) 등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과 권율(權慄) 같은 명장을 천거하였으며,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서예(書藝)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에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국보제132호 병산서원게시중)”, “신종록(愼終錄)” 따위가 있다.

 

출신과 관직생활

 

할아버지는 군수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승지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에 올랐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정9품관,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대교, 전적/정6품을 거쳐 1569년(선조 2) 공조좌랑/정6품 으로 있으면서 서장관(書狀官/북경사신의기록관)으로 명임금에게 충언을 올리던 일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1570년 부수찬·수찬/서책을 편집하여 펴냄을 거쳐 정언/왕에게 간쟁(諫諍)·논박(論駁)하는 일·이조좌랑에 오르고, 1571년 병조좌랑, 1575년 부교리·이조정랑·헌납/임금에게 충언을 올리던 일 , 1577년 검상·사인·응교, 1579년 직제학·이조참의·동부승지/공방의 일을 맡아보던 승지 등을 두루 지냈다. 1581년 부제학홍문관(弘文館)에 소속되어 있던 관원.품계는 정3품 당상관으로 있으면서 〈무빙차십조 無氷箚十條〉를 올리고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초진(抄進)했다. 이듬해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왕명을 하달하고 하의(下意)를 상달(上達)하는 일을 맡아 했다.·대사헌/오늘날의 검찰총장과 같다 등을 지내고, 1583년 왕명으로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대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584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다음해 〈포은연보 圃隱年譜〉를 교정하고 1586년에는 〈퇴계선생문집〉을 편차(編次)했다. 그뒤 형조판서·대제학·병조판서 등을 거쳐 1590년 우의정에 오르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책록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추천하는 한편 〈제승방략 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을 예전처럼 진관제도(鎭管制度)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한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했다.

 

임진전쟁 의 활동

 

1592년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책을 맡았다.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왕의 피난길에 따라갔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다시 등용되어 왕명으로 명(明)의 장수 임세록(林世祿)을 접대하고, 의주에서는 2차례 계(啓)를 올려 군사모집, 화포제조, 난민(亂民)의 초무(招撫) 등을 건의했다. 평안도도체찰사에 부임하여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고, 이듬해 호서·호남·영남의 3도도체찰사에 올랐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한 뒤 일본군과 화의를 모색하자 이에 반대, 화기제조·성곽수축 등 군비확충과 군사양성을 주장했다. 환도한 뒤에는 훈련도감의 설치를 건의하고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94년 〈청훈련군병계 請訓練軍兵啓〉·〈청광취인재계 請廣取人才啓〉·〈전수기의십조 戰守機宜十條〉 등을 올려 전시대책과 시무책을 건의하고, 훈련도감의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했다. 그뒤에도 4도도체찰사가 되어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군병을 교련하는 등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군비보완에 힘썼다. 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을 천거했다 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는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에 대해 명나라에 가서 해명하지 않는다 하여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削奪) 당했다. 1600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명상(名相) 서애 유성룡(西涯 柳成龍)이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을 때,각 고을에 발송할 공문이 있어서 역리(驛吏)에게 주었다.보낸 후 사흘 뒤에 그 공문을 다시 고칠 필요가 있어서 회수시켰더니 그 역리가 돌리지도 않고 있다가 고스란히 그대로 갖고 오더라는 것이다.서애는 "사흘이 지나도록 왜 공문을 발송하지 않았느냐"고 꾸짖자,역리 대답하기를 "속담에 조선공사삼일이란 말이 있어 소인의 소견으로 사흘 후에 다시 고칠 것을 예견(豫見)하였기에 사흘을 기다리느라고 보내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서애는 "가히 세상을 깨우칠 말이다.내가 잘못이다."라고 역리에게 말하면서 고쳐서 반포했다.」라 되어 있다. 지금은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나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이나 다같이 우리나라 사람은 인내심이 부족하고 정령(政令)을 자주 변경한다는 뜻으로 똑 같이 쓰인다.

                 

                      

 

 

 

서애 유성룡과 병산서원

 

 ▲

이 서원은 본래 풍악서당< 豊岳書堂 >이라 하여 조선< 朝鮮 > 명종< 明宗 > 18년(1563) 구< 舊 > 풍산현< 豊山縣 > 북쪽에 창건< 創建 >되었으나 선조< 宣祖 > 5년(1572) 이곳으로 옮겼다. 그후 광해군< 光海君 > 6년(1614) 서애< 西厓 > 유성룡< 柳成龍 > 선생의 업적< 業績 >과 학덕< 學德 >을 추모< 追慕 >하는 사림< 士林 >들의 발기< 發起 >로 사묘< 祠廟 >를 짓고 향사< 享祀 >하였다.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본관< 本貫 >은 풍산< 豊山 >으로 명종 19년(1564) 사마시< 司馬試 >를 거쳐 도승지< 都承旨 >, 예조판서< 禮曹判書 >, 우의정< 右議政 >, 좌의정< 左議政 > 등 많은 관직< 官職 >을 역임하였고 임진전쟁시< 壬辰戰爭時 >에는 영의정< 領議政 >으로 왕을 호종< 扈從 >하였으며 도체찰사< 都體察使 >가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화기< 火器 > 제작< 製作 >, 성곽< 城郭 > 수축< 修築 > 등 군비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훈련도감< 訓鍊都監 >을 설치하여 군대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선조 31년(1598) 북인< 北人 >들의 탄핵으로 한때 관작< 官爵 >을 삭탈당하고 향리< 鄕里 >에서 후학< 後學 > 양성< 養成 >에 힘쓰며 『 징비록 < 懲毖錄 >』(국보 제132호) 등 많은 저서< 著書 >를 남겼다.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 扈聖功臣 >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 豊原府院君 >에 봉해졌다. 도학< 道學 >, 문장< 文章 >, 덕행< 德行 >,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嶺南 > 후생< 後生 >들의 추앙< 追仰 >을 받았다. 경내< 境內 >에는 복례문< 復禮門 >, 만대루< 晩對樓 >, 동< 東 >·서재< 西齋 >, 입교당< 立敎堂 >, 장판각< 藏板閣 >, 존덕사< 尊德祠 > 등이 있다.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된 화산을 주산으로 한 병산서원 전경 

 

 가파른 계단위에 길게서있는 이층누각 만대루(晩臺樓) ▲

 

 서원 아래의 물길으르 끌어 만든 광영지(光影池) 사각의 연못 속에 둥근 섬이 있닫.

 

 누각 아래서 바라본 입교당(立敎堂)의 병산서원 현판이 보인다.▲

누 상의 기둥은 일직선으로 잘 다듬어진 기둥이다. 

 

만대루 아래의 기둥은 나무 생긴모양대로 굽어져 있다. ▲ 

 

 강학공간에서 만대루로 오르는 나무 계단 그리고 그 주변 ▲

 

만대루에서 바라본 강학 공간 ▲

 

서재에서 동재쪽을 바라본 풍경 ▲ 

 

 입교당에서 바라본 동재와 만대루 ▲

 

강학공간 온돌방인 명성재(明誠齋)는 원장이 기거하던 공간이다. ▲

 

내 삼문 앞에서 내려다본 고직사 ▲

 

 존덕사(尊德祠)에서 내삼문을 내다본 전경

 

 사당인 존더사(尊德祠) ▲

병산서원은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에 있는 서원으로 1978년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민속마을로 지정된 풍산(豊山) 류씨(柳氏) 집성촌인 하회마을과는 화산(花山)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병산서원은 산의 동쪽에 있고 화회마을은 그 반대쪽에 있다. 낙동강 물줄기가 흘러 내려오다가 화산을 만나 센 물살을 만들며 물 항아리 모양으로 휘감아 돌아 남쪽으로 흘러 나가는 강가 언덕에 서원은 위치했다.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있던 풍산 류씨(柳氏)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豊岳書堂) 을 모체로 하여 건립되었다. 서당은 본래 풍산읍에 있었는데, 1572년(선조 5)에 서애(西崖) 류성룡. 1542-1607)이 서당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병산서원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3년(광해군 5)에 서애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둥 지방유림이 서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건립하면서 향사의 기능을 갖춘 서원이 되었다. 그 후 1629년에 수암(修巖) 류진(柳紾 1582-1635) 이 추가 배향되었으며, 1863년(철종 14)에 병산(屛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운 선조 때의 문신으로 정언(正言)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 도승지(都承旨), 경상도 관찰사. 대제학(大提學). 우의정(右議政).영의정(領議政) 등을 등용하여 임진왜란을 역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애는 1598년(선조 31)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하회에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여 [징비록(懲毖錄)] 등을 집필했다. [징비록]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급했던 국난을 이겨낸 구국의 내용을 기록한 서애의 수기(手記)이다. 국보 제 13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칠 년간의 전황을 기록한 기사로 다시 이 나라에 이러한 참담한 전쟁이 일어나ㅓ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후세에 알리기 위해 썼다고 한다. 이 책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전황을 소상하게 알 수 이쓴 귀중한 역사서다. 책이름 [징비록]은 [시경(詩經)][소비(小毖)]편에 “미리 지난 일을 징제(懲)해서 뒷날 근심이 있을 것을 삼간다(毖)”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서애는 하회마을 앞 낙동강 건너 부용대(芙蓉臺) 기슭에 있는 옥연정사(玉淵精舍)에서 징비록을 구상하고 썼다. 옥연정사는 집 앞 소(沼)의 푸르고 맑기가 옥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류성룡의 호 ‘서애(西厓)’는 옥연정사가 있는 부용대 절벽에서 취하여 이름지은 것이다. [징집록]은 서애의 고택인 하회마을의 충효당에 있는 유물각인 영모각(永慕閣)에 다른 유물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병산서원은 화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산자락에 남향을 하며 자리 잡았다. 서원 앞으로는 낙동강 물이 흐르고 강 건너에 는 병풍처럼 펼쳐진 병산이 있다. 병산은 산의 형상을 따라 붙인 이름이다. 서원에서 앞을 바라보면 강변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지며, 그 옆 언덕에는 노송들이 꿈틀거리며 서 있고 강물 속에는 병산이 깊게 그림자를 띄우고 있다. 이 강변에 잇대어 화회마을로 넘어가는 산자락에 시작된다. 병산서원은 바로 이러한 강물과 병산을 마주 보는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은 경내의 건물로는 존덕사. 내삼문. 입교당(立敎堂), 동재, 서재, 전사청, 장판각, 만대루(晩臺樓), 복례문(福禮門). 고직사 등이 있다.

복례문은 서원의 정문이다. 본래 만대루 동쪽에 있는 대문을 1921년에 이전하여 중건한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규모가 솟을 대문이다. ‘복례(福禮)’는 [논어]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에서 따온 말이다. “자기를 누르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라”라는 이 뜻은, 곧 세속적인 자신의 마음과 자세를 극복하고 예를 다시 갖추라는 뜻을 갖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이층 누각 만대루가 가파른 계단 위에 옆으로 길게 서 있다. 만대루는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로 누 아래에는 자연스런 형상 그대로의 구불텅한 수많은 나무 기둥이 열을 지으며 이층 누를 받치고 있다. 서원은 이 누 밑을 지나 강당 앞마당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다.

자연 그대로의 기둥으로 구성된 아래층과는 대조적으로 위층은 반듯하게 다듬은 누마루 기둥들이 정제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성이학적인 자연관과 조선 유학의 꿋꿋하고 청청한 맥이 동시에 아래. 위층 건물에 살아나 있는 듯하다. 만대루의 ‘만대(晩臺)’는 중국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우후 늦게 대할 만하니(翠屛宜晩臺)”에서 따온 것이다. 누각의 이름을 시에서 빌려 왔듯이 만대루가 얽어내는 공간은 가히 시적이다. 이곳에 서면 한쪽으로는 병산과 낙동강을 낀 자연이 펼쳐지는 경관을 읽을 수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서원 일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원의 자리로 번잡한 거리의 우마(牛馬) 차를 멀리해 뛰어난 경치를 지닌 곳을 태하는 까닭은 영기(靈氣)를 지니고 있는 곳이어야 걸출한 인재를 배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만대루 누마루에 서면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이 만대루는 유생들이 휴식도 하고 풍광을 보며 시회(詩會)를 가졌던 곳이다.

만대루의 복례문 사이에 조성된 공간 서쪽으로는 물길을 끌어 만든 작은 연당 광영지(光影池)가 있는데 방형의 연당 속에는 원형의 작은 섬이 조성되어 있다. 이 방지원도(方池圓島)의 주변에는 봄부터 붉게 피는 배롱나무와 사철 청청한 대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강당인 입교당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세 칸은 대청이고 양쪽 각 한 칸은 온돌방이다. 동쪽의 온돌방 명성재(明城齋)는 원장이 기거하던 곳으로 이곳에 앉으면 서원 모든 곳이 읽힌다. 앞쪽으로는 동. 서재 등 강학 공간 그리고 만대루와 그 건너 자연이 강당 동쪽 협문 밖으로는 전사청이 강당 대청 뒤 판문 밖으로는 장판각이 강당 동북쪽 뒤로는 전사청과 사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 방 경의재(敬義霽)는 유사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강당 대청 한가운데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앞쪽을 바라보면 서원 일대의 경관이 또 다른 모습으로 얽혀 들어온다. 만대루 이층 일곱 칸 기둥 사이로 강물과 병산과 하늘이 일곱 폭 병풍이 되어 얽히며 펼쳐지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그것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극적인 공간 분위글 만들어, 바로 나 자신이 자연 가운데에 묻혀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원생이 기거하며 수학하던 동재와 서재가 위치했는데, 정면 내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에는 툇간을 조성했다. 동재의 큰방은 동직재(動直齋), 서재의 작은방은 마루방으로서 장서실(藏書室)이다.

강당 동쪽 옆을 돌아 뒤로 들어가면, 언덕 위에 있는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사당인 존덕사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 복벽에 유성룡을 주벽으로 모시고 동벽에 유진을 종향하고 있다. 사당 앞 동측 계단 옆에는 관세대가 있고 사당 기단의 양측 계단 앞에는 정료대가 길쭉한 팔각 석주의 구조물을 하고 서 있다.

병산서원 만대루의 입교당 대청에서 읽히는 건축공간과 경관의 얼개는, 건축을 둘러싼 산천경개가 어떡해 건축의 공간미학으로 재구성되어 되살아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부분이다. 병산서원의 건축은 우리나라의 산하를 알고, 그 속에 건축을 읽어 만든 정신과 방식을 아는 대 길잡이가 되는 실례를 잘 보여준다. 병산이 있고 낙동강이 설정된 이러한 산하를 갖춘 곳에 하나의 인공물을 집어넣는 데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병산서원은 태 초 부터 있어 온 이 자연에 공간을 열리게 하고 트이게 하는 방식으로 마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듯한 건축을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사위가 조용한 청아한 밤에 서원 일곽을 이루는 공간은 마치 길고 짧은 긴장과 완화가 이어지는 가락으로 가득 찬 듯하다. 담과 건물들로 둘러싸인 서원 뜰은 텅 비었으되 그냥 텅 비어 있지 않음을 지부와 담의 선에 나타나는 리듬과 그것을 배경으로 저 멀리 서 있는 병산과 소나무에서 읽을 수 있다. 텅 빈 마당 위를 덮는 나무와 그 속을 흐르는 구름과 달을 배경으로 기둥과 누각 지붕 사이로 다가오는 병산의 산새라든가. 들창문을 통해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벽산서원이 예사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병산서원이 주는 이러한 건축미는 눈으로 소리로 어둠과 빛으로 느끼는 그 모든 것이다. 병산서원은 한국의 서원건축이 주는 아름다움이라는 기능태를 우리에게 실제로 접하게 한다.

게시자 주 

정언 ~ 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에 있던 정6품직.

대사헌 ~ 도헌(都憲) 또는 대헌(大憲)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의 검찰총장과 같다. 조선의 관직으로 중앙과 지방

        행정의 감찰과 고발을 담당하는 사헌부의 수장이다. 종이품(從二品) 

대사간 ~ 조선 시대에 둔, 사간원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삼품 

대사성 ~ 조선시대 성균관의 최고 전임관원으로서 정3품의 당상관직.성균관에는 지관사(知館事)와 동지관사

        (同知館事)가 대사성보다 높은 관직이었으나 홍문관 또는 예문관 대제학 등이 겸직하는 자리 

관찰사 ~ 조선시대의 지방장관.종2품의 문관직으로서 

대제학 ~ 조선시대 예문관과 홍문관의 최고 책임자.정2품직.

              전임직이 아니라 타관이 겸임하는 겸직이다.

의정 ~ 영의정(領議政)은 의정부 3의정 가운데 하나로 정1품에 해당하는 조선 시대 최고의 중앙관직이었다.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국보 제132호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 징비록

 

고저지(古楮紙)에 기록된 초본(草本)에 남색(藍色) 천으로 표지를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영의정(領議政)으로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고 임진지휘(臨陣指揮)하였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난후(亂後)에 귀향(歸鄕) 정리한 저술 중의 하나이다.

그 내용은 난전(亂前)의 교린사정(交隣事情)과 선조(宣祖) 25년(1592)에 발발하여 동왕(同王) 31년(1598)에 평정되었던 전황(戰況)의 골자를 수기(手記)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난전(亂前)의 일본(日本)과의 교린관계(交隣關係)를 비롯하여, 임전(臨戰)에 있어서의 국민적 항쟁(抗爭), 명(明)의 구원(救援) 및 제해권(制海權)의 장악에 대한 저간(這間)의 전황(戰況)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와 겨레에게 이러한 비참한 전화(戰禍)가 또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참회와 염원에서 그 수난상(受難相)을 수기(手記)하고, 『징비록(懲毖錄)』으로 제명(題名)한 것이다.

임진왜란사(壬辰倭亂史)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가장 대표적인 기본 사료(史料)가 된다

 

                                                                                                  

 

 

 
출처 :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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