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전쟁과 서애유성룡
서애 유성룡 ▲
서애 유성룡의 붓 글씨 ▲
조선 선조 때의 재상(1542~1607).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대사헌(大司憲/사헌부의 종2품관)·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지방관 종2품관) 등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과 권율(權慄) 같은 명장을 천거하였으며,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서예(書藝)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에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국보제132호 병산서원게시중)”, “신종록(愼終錄)” 따위가 있다.
출신과 관직생활 할아버지는 군수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승지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에 올랐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정9품관,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대교, 전적/정6품을 거쳐 1569년(선조 2) 공조좌랑/정6품 으로 있으면서 서장관(書狀官/북경사신의기록관)으로 명임금에게 충언을 올리던 일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1570년 부수찬·수찬/서책을 편집하여 펴냄을 거쳐 정언/왕에게 간쟁(諫諍)·논박(論駁)하는 일·이조좌랑에 오르고, 1571년 병조좌랑, 1575년 부교리·이조정랑·헌납/임금에게 충언을 올리던 일 , 1577년 검상·사인·응교, 1579년 직제학·이조참의·동부승지/공방의 일을 맡아보던 승지 등을 두루 지냈다. 1581년 부제학홍문관(弘文館)에 소속되어 있던 관원.품계는 정3품 당상관으로 있으면서 〈무빙차십조 無氷箚十條〉를 올리고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초진(抄進)했다. 이듬해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왕명을 하달하고 하의(下意)를 상달(上達)하는 일을 맡아 했다.·대사헌/오늘날의 검찰총장과 같다 등을 지내고, 1583년 왕명으로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대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584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다음해 〈포은연보 圃隱年譜〉를 교정하고 1586년에는 〈퇴계선생문집〉을 편차(編次)했다. 그뒤 형조판서·대제학·병조판서 등을 거쳐 1590년 우의정에 오르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책록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추천하는 한편 〈제승방략 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을 예전처럼 진관제도(鎭管制度)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한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했다.
임진전쟁 의 활동
1592년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책을 맡았다.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왕의 피난길에 따라갔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다시 등용되어 왕명으로 명(明)의 장수 임세록(林世祿)을 접대하고, 의주에서는 2차례 계(啓)를 올려 군사모집, 화포제조, 난민(亂民)의 초무(招撫) 등을 건의했다. 평안도도체찰사에 부임하여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고, 이듬해 호서·호남·영남의 3도도체찰사에 올랐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한 뒤 일본군과 화의를 모색하자 이에 반대, 화기제조·성곽수축 등 군비확충과 군사양성을 주장했다. 환도한 뒤에는 훈련도감의 설치를 건의하고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94년 〈청훈련군병계 請訓練軍兵啓〉·〈청광취인재계 請廣取人才啓〉·〈전수기의십조 戰守機宜十條〉 등을 올려 전시대책과 시무책을 건의하고, 훈련도감의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했다. 그뒤에도 4도도체찰사가 되어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군병을 교련하는 등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군비보완에 힘썼다. 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을 천거했다 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는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에 대해 명나라에 가서 해명하지 않는다 하여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削奪) 당했다. 1600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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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名相) 서애 유성룡(西涯 柳成龍)이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을 때,각 고을에 발송할 공문이 있어서 역리(驛吏)에게 주었다.보낸 후 사흘 뒤에 그 공문을 다시 고칠 필요가 있어서 회수시켰더니 그 역리가 돌리지도 않고 있다가 고스란히 그대로 갖고 오더라는 것이다.서애는 "사흘이 지나도록 왜 공문을 발송하지 않았느냐"고 꾸짖자,역리 대답하기를 "속담에 조선공사삼일이란 말이 있어 소인의 소견으로 사흘 후에 다시 고칠 것을 예견(豫見)하였기에 사흘을 기다리느라고 보내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서애는 "가히 세상을 깨우칠 말이다.내가 잘못이다."라고 역리에게 말하면서 고쳐서 반포했다.」라 되어 있다. 지금은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나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이나 다같이 우리나라 사람은 인내심이 부족하고 정령(政令)을 자주 변경한다는 뜻으로 똑 같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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