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최진석의 `풀어쓰는 동양학`] 공자를 꾸짖은 노자

浩 根 書 堂 2013. 3. 6. 21:04

[최진석의 '풀어쓰는 동양학'] 공자를 꾸짖은 노자

공동체 가치 무조건 강요해선 안 돼

기사입력 2012.04.07 17:43:01 | 최종수정 2012.04.07 17:44:09 

 

 

중국 송대(宋代)의 철학자 주희(朱熹)는 공자 사상을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로 압축해 정리한다. 공자의 어록이 기록된 논어에는 이 극기복례라는 말이 한 군데에서밖에 나오지 않지만 주희는 이 한마디 말로 공자의 사상을 개괄한 것이다.

 

매우 적절하다. 공자는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본질인 인()이 있다고 보고, 그 보편적 본질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예()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추종할 것을 제안한다. 예는 인간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공자를 필두로 한 유가에서는 선()의 정점으로 인식된다. 선으로 인정되는 특정한 가치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 특정한 가치 체계와 일체를 이루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 보편적 가치 체계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는 미숙의 상태로서의 개별적 자아(). 개별적인 자아는 성숙의 가능성만을 가진 존재로서 이해된다. 이런 구조에서 인간은 개별성과 결별하고 일반성 내지는 보편성 속으로 편입돼야 한다. 비유하자면, 자신을 고유명사 차원에서 탈피시켜 일반명사 차원으로 상승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구조를 공자는 극기복례라고 표현한 것이다.

 

예는 그 이데올로기 혹은 교화시스템에 포함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기준이나 표준 혹은 이상으로 작용한다. 도덕적 자각 능력이 있는 인간은 모두 그 예에 집중하고 통일돼야 한다. 그래서 공자는 극기복례를 설명하면서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며, 움직이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논어 안언(顔淵)’)”고 말했다.

 

이 예는 전체 사회가 모두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기준이다. 이 기준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공자가 건설하려고 했던 인간의 길이다. 노자는 바로 이 점을 공격하면서 자신만의 인간의 길을 건설하려 한다. 여기서 우리는 미셸 푸코라는 현대의 서양 철학자 한 명을 떠올릴 수 있다. 푸코는 본질이나 중심을 기반으로 형성된 철학에서는 그런 것들이 기준이 돼 결국 이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본질주의적인 근대를 구분, 배제 그리고 억압이라는 틀로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의 내용이 도덕적으로 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본질인 한 기준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기준인 한 사회를 구분하고 차등화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자가 건설한 인간의 길도 결국은 구분, 배제 그리고 억압이라고 하는 부정적 현상을 피해 갈 수 없게 된다.

 

공자의 이런 발상에 대해 공격적인 언사를 날리는 노자의 말을 들어 보자.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

 

이 구절을 어떤 사람들은 노자가 미와 추, 선과 악을 서로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추함이 있어야 아름다움이 있게 되고, ()이 있으니 악()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상대성을 말하려면 개별자로서의 주체가 등장해야 하는데 노자에게 이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학을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문제로 본다고 할 때, 매우 분명히 해야 할 문제다. 이는 뒤에서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다.

 

노자는 여기서 특정한 기준을 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집중하고 통일돼야 한다고 보는 공자 식의 문명을 반대할 뿐이다. 여기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美之爲美)’ 안다는 것은 정해진 미, 정의된 미,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미에 동조한다는 것이다.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善之爲善)’ 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공통의 본질적 특성을 기반으로 해 많은 사람들이 합의한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특성에 기반한다고 믿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합의해야 할 것 혹은 동의해야 할 것으로 강요된다.

 

유행을 예로 들어보자.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로 머리를 물들인다. 처음에는 주로 노란색 계열로 물을 들였다. 모두가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에 누군가가 머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였다면 그것은 파격이다. 어색하고 도발적인 느낌을 준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지만 호감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한두 명이 추종해 따르게 되고, 처음에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 점점 신선하게 보이게 된다. 그래서 대개는 기존의 감각에 답답해하던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많은 추종자들이 생기고 이것이 마침내는 유행으로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유행은 기존의 가치 체계에 저항하고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급기야는 기존의 미적 감각과 공존하면서 사회는 신선하고 다양성이 증가된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이런 유행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을 넘어서서 어떤 단계를 지나게 되면 바로 권력이나 이데올로기로 변질된다. 즉 유행을 따르는 부류와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부류로 나뉘고, 유행을 따르는 부류는 우월감을,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열등감과 그 유행에 대한 저항감을 갖는다. 머리를 염색하는 것이 확고한 유행일 때, 많은 사람들은 머리를 염색하지 않은 채로 외출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고 머리 염색이 미적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행사된다. 유행이 이데올로기화해 따르지 않으면 불편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미셸 푸코의 견해를 빌려서 말한다면, 머리 염색이 유행이 돼 기준이라는 지위를 획득하는 순간 머리 염색은 이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장치로 성장해버린다.

 

노자가 보기에 모든 가치는 중립적이다. 그런데 공자 식의 문명은 예라고 하는 특정 교화 체계를 저 위에 걸어 놓고, 백성들을 모두 거기에 통합하려 한다. 통합적 욕구를 발산하는 이런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아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여기서 노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다. 노자는 그 기준이 비록 선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사되는 한 폭력을 잉태하는 장치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보편화된 이념 내지 체계는 그 내용의 선악 여부와 관계없이 기준 혹은 이념으로 작동해 세계를 구분하고, 바람직하다고 간주되지 못하는 한쪽을 배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간성을 바탕으로 해서 보편적 기준을 확보하고 거기에 모든 백성들이 일치해 나가는 것이 천명을 극복한 새로운 인간의 길일 것이라고 봤다. 이에 반해 노자는 공자의 이 기획 자체가 필시 가치론으로 빠져서 구분하고 배제하는 기능을 피하지 못한 채 갈등과 차등의 원천을 잉태하는 꼴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이런 갈등이 자리 잡지 못할 문명의 기획은 어디에서 영감을 얻어야 할까? 노자는 그 영감을 자연에서 구한다. 자연은 이런 분리의 장치가 없이 작동하면서 오히려 영구적이고 거대한 효과와 결과들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관찰된다. 노자는 자연의 이런 특성을 기반으로 해 천명 속에 문제점으로 자리 잡고 있던 비의성, 주관성 그리고 임의성을 극복하고 투명성, 객관성 그리고 보편성을 확보한다.

 

천명을 극복하고 ()’라고 하는 인간의 길을 건립하려 했던 두 철학자 가운데 공자는 인간을 사유의 원천으로 삼고, 노자는 자연을 사유의 원천으로 삼았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651(12.4.04~4.10일자) 기사입니다.]

출처 : 가양주(家釀酒) 빚는 사람들
글쓴이 : 묵향(지명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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