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13> 퇴계와 남명

浩 根 書 堂 2013. 4. 30. 21:31

 

[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13> 퇴계와 남명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은 같은 경상도에서 같은 해에 태어났다(同道同庚). 퇴계는 경상좌도에 태어나 인()을 사랑했고, 남명은 경상우도에 태어나 의()를 사랑했다.

 

이익(李瀷)"남명은 우도에, 퇴계는 좌도에 해와 달처럼 있었으며, (중약) 좌도는 인을 사랑하고, 우도는 의를 사랑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성리대전>에서 득력해 도학에 정진했으며, 학문과 실천을 다함께 중시했다.

 

그러나 다른 점도 많았다. 남명은 "주자 이후에 꼭 저술을 남길 필요가 없다"(朱子以後 不必著述)고 해 이론 보다는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퇴계는 왜 심성수양을 해야 하나를 따지는 이론을 중시했다.

 

남명이 존덕성(尊德性)을 강조했다면, 퇴계는 도문학(道問學)을 강조한 것이다. 이 때문에 퇴계는 이기심성론에 대한 연구와 토론에 열을 올렸는데 반해, 남명은 물 뿌리고 소제하고 손님을 응대하는 법도 모르면서 오활하게 이기(理氣)를 논한다고 비아냥거렸다.

 

남명은 오히려 마음에 사욕이 침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칼로 잘라내고, 정신을 늘 깨어 있게 하기 위해 경의검(敬義劍)과 성성자(猩猩子)를 차고 다녔다. 이 경의검은 뒤에 그의 수제자인 정인홍(鄭仁弘)에게, 성성자는 그의 외손녀사위 김우옹(金宇顒)에게 전수되었다.

 

그는 정신수양에 필요하다면 비록 도교와 불교를 원용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퇴계는 평소에는 성격이 원만하지만 이단을 배격하는 데에는 혹독했다. 퇴계가 남명을 존경하면서도 이단에 감염되었다고 비평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의 출처관(出處觀)도 달랐다. 퇴계는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하는 자연주의자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3번 낙방한 뒤 33세에 문과 급제해 37년간을 벼슬살이를 했고, 우찬성에 양관대제학까지 지냈다.

 

비록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도학연구에만 정진하려 했으나 이미 유학의 종장이 되어 뜻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반면에 남명은 13번이나 왕의 부름을 받고도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나가면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出則有爲), 은거해 있으면 지키는 것이 있어야(處則有守)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종 때에 한 번 불려나갔다가 명종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돌아왔다. 퇴계는 사림이 정치주체가 되어가려는 당시의 정국이 나가서 한 번 해볼만하다고 생각한 데 반해, 남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설치는 권신정치 시대에 나간들 자기의 뜻을 펼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남명이 끝까지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세월이 좋아지면 나가도 된다는 것이고, 실제로 제자들을 내보내 화담계열과 함께 광해군 조의 북인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남명계는 몰락하고, 퇴계계나 노론계로 전향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도통은 퇴계계로 넘어가고, 남명은 절의를 숭상한 마지막 인물로 남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저작권자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說文解字(한문)
글쓴이 : 樂而忘憂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