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숙종 [肅宗, 1661~1720],영조 (1694 - 1776)

浩 根 書 堂 2013. 11. 7. 13:38

 

숙종 [肅宗, 1661~1720]

 

조선 제19대 왕.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해 완결을 보았다. 주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해 상평통보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했다. 영토 회복 운동을 전개했고 금위영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했다.

 

재위 1674년~1720년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

아버지 현종(顯宗)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자 명보(明譜). 휘 순(焞). 현종의 아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 비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즉위하였다.

즉위한 이듬해 대흥산성(大興山城)을 완성하고 용강(龍岡)의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하였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나 당시 예론(禮論)에 치우쳐 논쟁이 분분하였고, 당쟁이 심하여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파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왕은 숙원(淑媛) 장씨(張氏)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장씨에게서 출생한 왕자(景宗)의 명호(名號)를 정하고자 하였다. 서인들이 이를 반대하자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을 유배하고 왕자의 명호를 정하였으며, 왕비 인현왕후를 폐위, 희빈(禧嬪)으로 승격된 장씨를 1690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위를 후회하던 왕은 폐비복위운동을 꾀하는 서인을 민암(閔黯 ) 등이 타도하려고 하자 1694년 남인을 추방하고 다시 서인을 등용시켜 폐비를 복위시켰다. 이어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1701년 무고죄(誣告罪)로 사사(賜死)하였다. 왕의 재위기간은 국내적으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으나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사회가 점차 안정기로 접어든 때로 선조 말 이후 계속된 대동법(大同法)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하여 완결을 보았다.

영조 (1694 - 1776)


세자의 출생 : 숙종의 후궁인 최씨에게서 태어난 영조는 어릴 때 이름이 금이었다. 금의 어머니 무수리였다. 하지만 금을 낳자 숙종은 최씨에게 정2품 소의 벼슬을 내렸다. 금은 병약한 이복형 균과는 달리 튼튼하게 자랐다. 균과 금은 비록 이복형제지만 유난히 다정하게 지냈다.


영조의 즉위 : 경종이 37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자에 오른 금이 제 21대 임금으로 오르니 바로 정치, 문화의 전성기라고 불리우는 바로 영조이다. 영조는 당파싸움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한쪽당이 승리하면 반대 당은 역적으로 몰아 모조리 죽인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조는 내가 왕위에 오르면 기필코 당파 싸움을 없게 하리라는 생각을 가졌다. '탕탕평평'이란 말은 어느 한쪽도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공평하게 정치를 행하겠다고 말이다.


영조의 치적 : 영조는 당파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하여 대신들의 말에 절대로 동요하지 않았다. 탕평정책으로 절제와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세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균역청을 설치하고 균역법을 실시 하였다. 균역법은 양인 1인당 군포 2필씩 내는 것을 1필로 내도록 하여 어려운 농민들의 생활에 보탬을 주었다. 그리고 모자라는 수입은 魚, 鹽, 船稅를 징수하여 보충하였다. 영조는 또한 국방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수어청에 조포를 제작 하도록 명하고 군사들에게 조총 훈련을 시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영조는 또한 민심을 파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민심이 임금을 떠나 있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을 펴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태종때 설치했다가 없어진 신문고 제도를 부활 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영조가 신임하는 박문수를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아무도 모르게 민심을 파악하였다. 농업의 발전을 위하여 각 도에 제방을 튼튼히 하여 홍수에 대비 하도록 하였으며, 환곡제도의 폐단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서얼 출신들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의 불만 요소를 제거하였다. 영조는 성격이 엄격하고 작은 일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성품을 가졌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나마 당파 싸움을 잠재울 수 있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밀고 나갔다.


사도세자 : 영조는 정비에게서 후사를 보지 못하였다. 정빈 이씨가 낳은 효장세자는 일찍 죽고, 영빈 이씨가 낳은 아들이 장헌 세자이다. 영조의 나이가 마흔이 되서야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정헌세자는 태어난지 2개월 만에 왕세자로 봉해졌다. 그리고 10세때 혜빈 홍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영조는 성격이 급하고 엄격했다. 그 성격 그대로 장헌세자를 대하니 세자는 영조 앞에만 서면 겁에 질려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영조의 눈길이 미치지 않으면 일시에 풀어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세자의 생활은 이상하였다. 그리하여 그 비행이 영조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영조는 세자를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하였고 뒤주 속에서 장헌세자는 그렇게 죽어갔다.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한 영조 였지만 결국 시파와 벽파의 당쟁에 휘말려 아들까지 죽이고 말았다. 나중에 영조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후회하고 아들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혜빈 홍씨는 남편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홍씨는 한많은 60평생을 한중록 이라는 소설을 통하여 많은 이야기를 썼다.


학문의 변천 : 조선의 학자들 중에서 이제껏 발달해온 성리학을 비판의 눈으로 보고 실학을 받아들인 사람을 실학자라고 한다. 실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은 먼저 농촌 문제에 쏠렸다. 농촌이 잘 살아야 사회가 편안하며 나라도 부강하였다. 그래서 실학자들은 농촌문제에서 토지, 조세, 교육, 군사 등의 문제점을 해결해 가고자 하였다. 실학은 영조와 학문 보호 정책으로 한때 융성하였으나 오랫동안 성리학을 숭상해 온 사회 분위기는 실학자들의 개혁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출처 :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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