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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이지함

浩 根 書 堂 2006. 9. 3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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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이 지함
번호 : 837   글쓴이 : 토마스김 설정
조회 : 0   스크랩 : 0   날짜 : 2006.09.30 20:33
방문자 : 3 / 5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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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아에게 옷을 벗어준 토정선생
조회 (32)
기타등등 | 2006/02/04 (토)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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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아에게 옷을 벗어준 토정선생
                                                    이지함
  토정 이지함은 (토정비결)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일반인들에게는 그가 전설적 인물
인지 실재 인물인지 조차 분명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현령의 아들로 태어났으
며, 형 지번은 청풍 군수를 지냈고, 지번의 두 아들 가운데 산해는 영의정을, 산보는 이조판
서를 지낸 양반 중의 양반 한산 이씨의 명문출신이었다.
    이지함은 본래 보령출신 이었지만 어릴 적에 벼슬살이를 하는 큰형 지번을 따라 서울에
와 글공부를 했다. 그가 광릉에 있을 적에 너무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주변사
람들이 몸이 상할까 걱정하여 등불 기름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도끼를 들고 관솔
을 따다가 물을 피워 놓고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밤을 새워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제자백가에도 통달했지만 과거 공부는통 안했다. 어른들이 과거를
보아 출세하라고 성화를 부리면 마지못해 과거장에 나가서는 글을 짓지 않고 나와 버리거나
또 지어놓고 내지 않기도 했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제각기 좋아하는
바가 있소. 나는 내 좋은대로 살것이외다. "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일정한 스승은 없었지만
그의 견식은 천문, 지리, 의약, 음악, 산수, 관상, 약방문 등 모든 방면에 걸쳐 탁월했다.
  얼마 동안의 공부를 마친 그는 지팡이를 하나 짚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명승지를 찾아
방랑하면서도 각처의 풍속이며 인정, 물산등을 두루 살폈으며 가끔 서울에 와서는 율곡 등
당대의 명류들과 사귀었다. 율곡으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으며 항상 좌중을 웃기는 농담을
잘했고 익살섞인 직언을 서슴지 않는 자유자재의 풍류가 있었다. 또 우계 성혼과 지리산 밑
에 사는 남명 조식 같은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키가 크고 건장하였으며 얼
굴은 검으면서 등글어 풍채가 좋았다. 발은 커서 거의 한자나 되었으며 빛나는 눈은 사람  
의 마음을 뚫어보았다. 목소리는 맑고 웅장하되 말수는 적었으며, 기개가 늠름하였고 위풍이
당당한 대장부였다. 또한 그는 복중에도 물을 마시지 않으며, 엄동에도 홑옷으로 지내는 등
능히 한서기갈을 이겨내는 수련을 쌓았다. 언젠가는 학문을 더욱 다지기 위해 개성으로 서
경덕을 찾아 갔다. 서경덕은 송악산 밑 화담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세상일에는 눈길
도 돌리지 않고사는 도인이었다 이지함은 화담 옆에 방을 얻어 그에게서 제대로 학문을 익
히고자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집주인이 장사를 나갔는데, 그 아내가 이지함의 기골에
홀딱 반해 밤늦게 그의 방에 들어와서는 온갖 아양을 떨며 교태를 부렸다. 그러나 이지함은
점잖게 그 부인을 달랬고 그래도 교태를 멈추지 않자 인륜을 따져 그 요부를 나무라는 중이
었다. 그때 집 안에 들어선 집주인이 문틈을 통해 이지함의 이런 모습을 낱낱이 보았다. 그
는 한걸음에 서경덕에게 달려가 혼자 보기 아깝다고 말하며 이 사실을 고했다. 서경덕도 끌
려와 이 장면을 보았다. 서경덕은 다음날 이지함이 들어오자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학업은 내가 가르치지 않아도 되겠네. 돌아가게."  이지함의 학덕은 당대에 으뜸
가는 스승에게까지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이름은 서울의 명사들은 말할 것
도 없고 임금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마흔여섯 살이 되었을 적에 나라에서는 그에게 포천 현감의 벼슬을 내렸다. 이것은
아주 특혜였는 데도 그는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부임했다. 그는 부임할 적에 베옷에 짚신 차
림 이었다. 저녁 때가 되어 그럴듯하게 밥상을 차려 내오자 새 원님은 멀거니 밥상을 내려
다 보다가 먹을 것이 없다고 상을 밀어냈다. 사령이 더 걸판지게 밥상을 차려 왔는 데도 또
이렇게 말했다. '먹을 것이 없구나." 밥상을 맡은 구실아치가 나와 잘못된 죄를 청하자 이렇
게 말했다. "우리의 민생이 어려운데 모두 앉아서 먹으면서도 절개가 없구나."
그러고는 잡곡밥과 나물국 한 그릇씩만 가져오게 하여 맛있게 먹었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 고을 경비에 보태 쓰겠노라고 하고는 조정에 그물이나 발 같은 것을
보내달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 이에 그는 원님
자리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지함은 극히 짧은 벼슬 기간을 빼고는 거의 전
생애를 방랑 속에서 보냈다. 그런데 그 까닭은 젊어서 친구인 안명세(사관으로서 을묘사화
를 집필했던 탓에 권신의 미움을 받아 처형됨)의 원통한 죽음을 보고 깊이 허무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대지팡이 하나를 벗삼아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걷다가 졸음이 오면 두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몸을 의지해 고개를 수그리고 잠
을 잤다. 이렇게 잠을 잘 적에는 코고는 소리가 우뢰와 같았고 소나 말도 그 곁을 지나가다
가 부딪치면 도리어 물러섰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꼼짝하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
  그는 도보로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안가 본 데가 없었으니 제주도에도 몸소 작은 배를 저
어 세 번이나 왕래하였다 한다. 그 시절에는 제주도에 드나드는 일이 여간 위험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작은 조각배의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를 주렁주렁 달고 풍파에 대한 아무런 걱
정도 없이 제주도를 드나들었다. 어느날 제주도에 다녀오는 길에 해남의 명사 이발의 집을
찾아들었다. 며칠을 굶은지라 그는 들어서자마자 몇 말의 밥을 해내오라고 소리쳤다. 밥이
들어오자 그는 손을 씻은 다음 수저를 제쳐둔 채 밥을 맨손으로 주먹만하게 만들었다. 그리
고는 오른손으로 밥을 입에 넣고 왼손으로 반찬을 집어넣으며 순식간에 그 밥을 다 해치웠
다. 밤에 주인이 비단 이불을 싸들고 들어와 함께 자며 담소를 나누고자 했으나 그는 한사
코 혼자 자겠다고 고집하였다. 주인이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어 보니 악취가 풍겼다. 깜짝
놀라 이불을 젖혀보니 똥, 오줌을 그득하게 싸놓았다. 이지함이 설사가 났는지, 아니면 벼슬
아치 출신이 잘사는 꼴에 눈이 시어서인지 아무튼 간다온다 한마디 인사말도 없이 떠나간
뒤였다. 언젠가는 섬에 들어가 박을 잔뜩 심었다. 박이 익자 모두 거두어서 저자에 내다 팔
았다. 그 돈으로 곡식을 사니 몇천 섬에 이르렀다. 그는 이 곡식을 마포로 실어 날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빈민굴 한가운데 토굴을 짓고 살았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마포
사람들이 그를 흙정자에 산다고 하여 '토정선생' 이라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기
인으로 소문난 토정을 이웃으로 삼아 집안에 무슨 일만 생기면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혼
인날을 잡아달라거나 점을 쳐달라거나 처방을 해달라거나 하며 온갖 일을 부탁했다. 토정은
처음에는 웃으며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토정은 이 일을 모두 당해낼 수가 없어 책 한 권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 책이 바로 (토정
비결)인 것이다. (토정비결)은 평생의 운수를 보는 당사주'와 함께 민중의 사랑을 받아왔는
데 토정은 이 책을 만들적에 '너무 잘 맞으면 사람들이 일은 하지 않고 이 책만 붙들고 있
을 것이라.' 염려하여 내용을 어느 정도 맞지 않게 뒤섞어 놓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만년에 나라에서는 그에게 아산현감자리를 주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장사도 시
키고 기술도 가르쳐 생계를 삼도록 했다. 또 늙거나 힘 없는 사람들에게는 짚신을 삼게 하
여 그 판돈으로 쌀을 사서 먹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을 안의 거지들을 모아 생계 대책
을 세워주고는 구걸을 못하게 했다 이런 원님을 백성들은 부모처럼 섬겼다. 그러나 채 일
년도 못되어 그가 죽자 고을 백성들은 친부모의 상을 당한 듯이 통곡했다. 그는 젊었을 때
부터 빈천한 하층민에 대해 동정심이 각별하였으니 신혼 다음날 추위에 떠는 걸아를 보고
자기의 신포를 벗어준 일도 있었다. 귀천을 가리지 않는 그의 휴머니즘 탓이었는지 그의 가
까운 친지, 제자중에는 유독히 노예신분의 영재들이 많았다. 토정은 고독한 국외자(아웃사이
더)의 길을 걸으면서도 항상 세상을 구하고 민생을 윤택하게 하고자 힘썼던 것이다. 그러므
로 그의 조카인 산해가 토정의 묘비명에서 '세상에서는 토정을 알지 못하고 단지 그 외견만
을 보고 고인일사(高人逸士)라고 하지만 그 재간, 그 경륜, 그 덕량, 그행실이 능히 세상을
구할 만한 대인물이었다. ' 고 한 것은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리라.
  
이지함(1517년-1578년)
  조선시대의 사상가, (토정비결)의 저자,
주역에 통달하고 의약, 복서, 천문, 지리, 음양, 술서 같은 기술학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으
며 일생동안 온갖 기행과 일담으로 유명했다. '국가의 근본은 오직 백성' 이라고 하는 민본
사상에 입각하여 구민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다병주의보다는 정병주의의 채택을 강조하
였는데 말하자면 '적은 수의 병사라 할지라도 사명의식만 투철하다면 얼마든지 국가의 위난
을 막아낼 수 있다. '는 그의 주장에서 강렬한 위민적 애국사상을 엿볼 수 있다.
걸인들에게 각자의 재능에 따라 기술을 배우게 한 일, 백성들에게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산
을 증대케 한 일, 배를 만들어 어업에 종사케 한 일, 가내수공업을 장려한 일 등은 모두 그
의 업적이다. 한편 그 자신은 청렴 강직하여 물욕을 배제하고 청빈낙도의 생활을 행위의 지
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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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아에게 옷을 벗어준 토정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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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아에게 옷을 벗어준 토정선생
                                                    이지함
  토정 이지함은 (토정비결)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일반인들에게는 그가 전설적 인물
인지 실재 인물인지 조차 분명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현령의 아들로 태어났으
며, 형 지번은 청풍 군수를 지냈고, 지번의 두 아들 가운데 산해는 영의정을, 산보는 이조판
서를 지낸 양반 중의 양반 한산 이씨의 명문출신이었다.
    이지함은 본래 보령출신 이었지만 어릴 적에 벼슬살이를 하는 큰형 지번을 따라 서울에
와 글공부를 했다. 그가 광릉에 있을 적에 너무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주변사
람들이 몸이 상할까 걱정하여 등불 기름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도끼를 들고 관솔
을 따다가 물을 피워 놓고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밤을 새워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제자백가에도 통달했지만 과거 공부는통 안했다. 어른들이 과거를
보아 출세하라고 성화를 부리면 마지못해 과거장에 나가서는 글을 짓지 않고 나와 버리거나
또 지어놓고 내지 않기도 했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제각기 좋아하는
바가 있소. 나는 내 좋은대로 살것이외다. "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일정한 스승은 없었지만
그의 견식은 천문, 지리, 의약, 음악, 산수, 관상, 약방문 등 모든 방면에 걸쳐 탁월했다.
  얼마 동안의 공부를 마친 그는 지팡이를 하나 짚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명승지를 찾아
방랑하면서도 각처의 풍속이며 인정, 물산등을 두루 살폈으며 가끔 서울에 와서는 율곡 등
당대의 명류들과 사귀었다. 율곡으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으며 항상 좌중을 웃기는 농담을
잘했고 익살섞인 직언을 서슴지 않는 자유자재의 풍류가 있었다. 또 우계 성혼과 지리산 밑
에 사는 남명 조식 같은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키가 크고 건장하였으며 얼
굴은 검으면서 등글어 풍채가 좋았다. 발은 커서 거의 한자나 되었으며 빛나는 눈은 사람  
의 마음을 뚫어보았다. 목소리는 맑고 웅장하되 말수는 적었으며, 기개가 늠름하였고 위풍이
당당한 대장부였다. 또한 그는 복중에도 물을 마시지 않으며, 엄동에도 홑옷으로 지내는 등
능히 한서기갈을 이겨내는 수련을 쌓았다. 언젠가는 학문을 더욱 다지기 위해 개성으로 서
경덕을 찾아 갔다. 서경덕은 송악산 밑 화담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세상일에는 눈길
도 돌리지 않고사는 도인이었다 이지함은 화담 옆에 방을 얻어 그에게서 제대로 학문을 익
히고자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집주인이 장사를 나갔는데, 그 아내가 이지함의 기골에
홀딱 반해 밤늦게 그의 방에 들어와서는 온갖 아양을 떨며 교태를 부렸다. 그러나 이지함은
점잖게 그 부인을 달랬고 그래도 교태를 멈추지 않자 인륜을 따져 그 요부를 나무라는 중이
었다. 그때 집 안에 들어선 집주인이 문틈을 통해 이지함의 이런 모습을 낱낱이 보았다. 그
는 한걸음에 서경덕에게 달려가 혼자 보기 아깝다고 말하며 이 사실을 고했다. 서경덕도 끌
려와 이 장면을 보았다. 서경덕은 다음날 이지함이 들어오자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학업은 내가 가르치지 않아도 되겠네. 돌아가게."  이지함의 학덕은 당대에 으뜸
가는 스승에게까지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이름은 서울의 명사들은 말할 것
도 없고 임금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마흔여섯 살이 되었을 적에 나라에서는 그에게 포천 현감의 벼슬을 내렸다. 이것은
아주 특혜였는 데도 그는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부임했다. 그는 부임할 적에 베옷에 짚신 차
림 이었다. 저녁 때가 되어 그럴듯하게 밥상을 차려 내오자 새 원님은 멀거니 밥상을 내려
다 보다가 먹을 것이 없다고 상을 밀어냈다. 사령이 더 걸판지게 밥상을 차려 왔는 데도 또
이렇게 말했다. '먹을 것이 없구나." 밥상을 맡은 구실아치가 나와 잘못된 죄를 청하자 이렇
게 말했다. "우리의 민생이 어려운데 모두 앉아서 먹으면서도 절개가 없구나."
그러고는 잡곡밥과 나물국 한 그릇씩만 가져오게 하여 맛있게 먹었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 고을 경비에 보태 쓰겠노라고 하고는 조정에 그물이나 발 같은 것을
보내달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 이에 그는 원님
자리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지함은 극히 짧은 벼슬 기간을 빼고는 거의 전
생애를 방랑 속에서 보냈다. 그런데 그 까닭은 젊어서 친구인 안명세(사관으로서 을묘사화
를 집필했던 탓에 권신의 미움을 받아 처형됨)의 원통한 죽음을 보고 깊이 허무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대지팡이 하나를 벗삼아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걷다가 졸음이 오면 두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몸을 의지해 고개를 수그리고 잠
을 잤다. 이렇게 잠을 잘 적에는 코고는 소리가 우뢰와 같았고 소나 말도 그 곁을 지나가다
가 부딪치면 도리어 물러섰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꼼짝하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
  그는 도보로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안가 본 데가 없었으니 제주도에도 몸소 작은 배를 저
어 세 번이나 왕래하였다 한다. 그 시절에는 제주도에 드나드는 일이 여간 위험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작은 조각배의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를 주렁주렁 달고 풍파에 대한 아무런 걱
정도 없이 제주도를 드나들었다. 어느날 제주도에 다녀오는 길에 해남의 명사 이발의 집을
찾아들었다. 며칠을 굶은지라 그는 들어서자마자 몇 말의 밥을 해내오라고 소리쳤다. 밥이
들어오자 그는 손을 씻은 다음 수저를 제쳐둔 채 밥을 맨손으로 주먹만하게 만들었다. 그리
고는 오른손으로 밥을 입에 넣고 왼손으로 반찬을 집어넣으며 순식간에 그 밥을 다 해치웠
다. 밤에 주인이 비단 이불을 싸들고 들어와 함께 자며 담소를 나누고자 했으나 그는 한사
코 혼자 자겠다고 고집하였다. 주인이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어 보니 악취가 풍겼다. 깜짝
놀라 이불을 젖혀보니 똥, 오줌을 그득하게 싸놓았다. 이지함이 설사가 났는지, 아니면 벼슬
아치 출신이 잘사는 꼴에 눈이 시어서인지 아무튼 간다온다 한마디 인사말도 없이 떠나간
뒤였다. 언젠가는 섬에 들어가 박을 잔뜩 심었다. 박이 익자 모두 거두어서 저자에 내다 팔
았다. 그 돈으로 곡식을 사니 몇천 섬에 이르렀다. 그는 이 곡식을 마포로 실어 날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빈민굴 한가운데 토굴을 짓고 살았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마포
사람들이 그를 흙정자에 산다고 하여 '토정선생' 이라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기
인으로 소문난 토정을 이웃으로 삼아 집안에 무슨 일만 생기면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혼
인날을 잡아달라거나 점을 쳐달라거나 처방을 해달라거나 하며 온갖 일을 부탁했다. 토정은
처음에는 웃으며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토정은 이 일을 모두 당해낼 수가 없어 책 한 권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 책이 바로 (토정
비결)인 것이다. (토정비결)은 평생의 운수를 보는 당사주'와 함께 민중의 사랑을 받아왔는
데 토정은 이 책을 만들적에 '너무 잘 맞으면 사람들이 일은 하지 않고 이 책만 붙들고 있
을 것이라.' 염려하여 내용을 어느 정도 맞지 않게 뒤섞어 놓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만년에 나라에서는 그에게 아산현감자리를 주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장사도 시
키고 기술도 가르쳐 생계를 삼도록 했다. 또 늙거나 힘 없는 사람들에게는 짚신을 삼게 하
여 그 판돈으로 쌀을 사서 먹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을 안의 거지들을 모아 생계 대책
을 세워주고는 구걸을 못하게 했다 이런 원님을 백성들은 부모처럼 섬겼다. 그러나 채 일
년도 못되어 그가 죽자 고을 백성들은 친부모의 상을 당한 듯이 통곡했다. 그는 젊었을 때
부터 빈천한 하층민에 대해 동정심이 각별하였으니 신혼 다음날 추위에 떠는 걸아를 보고
자기의 신포를 벗어준 일도 있었다. 귀천을 가리지 않는 그의 휴머니즘 탓이었는지 그의 가
까운 친지, 제자중에는 유독히 노예신분의 영재들이 많았다. 토정은 고독한 국외자(아웃사이
더)의 길을 걸으면서도 항상 세상을 구하고 민생을 윤택하게 하고자 힘썼던 것이다. 그러므
로 그의 조카인 산해가 토정의 묘비명에서 '세상에서는 토정을 알지 못하고 단지 그 외견만
을 보고 고인일사(高人逸士)라고 하지만 그 재간, 그 경륜, 그 덕량, 그행실이 능히 세상을
구할 만한 대인물이었다. ' 고 한 것은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리라.
  
이지함(1517년-1578년)
  조선시대의 사상가, (토정비결)의 저자,
주역에 통달하고 의약, 복서, 천문, 지리, 음양, 술서 같은 기술학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으
며 일생동안 온갖 기행과 일담으로 유명했다. '국가의 근본은 오직 백성' 이라고 하는 민본
사상에 입각하여 구민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다병주의보다는 정병주의의 채택을 강조하
였는데 말하자면 '적은 수의 병사라 할지라도 사명의식만 투철하다면 얼마든지 국가의 위난
을 막아낼 수 있다. '는 그의 주장에서 강렬한 위민적 애국사상을 엿볼 수 있다.
걸인들에게 각자의 재능에 따라 기술을 배우게 한 일, 백성들에게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산
을 증대케 한 일, 배를 만들어 어업에 종사케 한 일, 가내수공업을 장려한 일 등은 모두 그
의 업적이다. 한편 그 자신은 청렴 강직하여 물욕을 배제하고 청빈낙도의 생활을 행위의 지
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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