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잡지『개벽』에서 위인 투표를 한 것을 보게 되었다.
1920년대면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창일 때인데...
그 시대 사람들은 위인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을까 궁금해졌다.
잡지에 실린 내용을 보면 "위인 투표 발표"라는 기사로부터 시작되는데 이에 따르면
"위인 투표는 심히 내외 독자의 흥미를 야기하여 예상 이상의 성적을 두루 거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선된 10대 위인은 다음과 같다.
사상 --- 이황, 종교 --- 최제우, 정치 --- 이이, 과학 --- 서경덕, 군사 --- 이순신
산업 --- 문익점, 문학 --- 최치원, 교육 --- 최충, 미술 --- 솔거, 사회개선 --- 유길준
잡지 ≪개벽≫ 제14호(1921년 8월 1일)에 실린 글 : 한글 고어와 한문이 뒤섞여 있어 현대어로 바꾸고 번역 작업도 곁들였다.
흥미롭다고 생각하여 시작했는데, 역시 많이 힘들었다.
번역 과정에서 문맥을 부드럽게 하고자 원문 그대로 살리지 못한 부분도 꽤 있다.
개벽 제14호(1921년 8월 1일)
조선 10대 위인 소개의 기일(其一)
세계 중 최초의 물질 불멸론자(物質不滅論者) 서경덕(徐敬德) 선생
(독립기념관 소장)
본지는 이제 형제 여러분의 투표 결정에 의하여 감히 조선 상하 4천 년간의 10대 위인을 소개하기 시작하나이다. 그런데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가령 투표에 과학자나 혹은 정치가로 인정된 이라 할지라도 자못 그의 과학이나 혹은 정치를 주로 삼고 소개함이 아니요 오직 사람 그대로를 소개하기로 하온 바 소개의 결과에 의해서는 간혹 위인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이 변할지도 모르겠나이다. 그리고 투표 발표의 순서로 하면 제일 처음으로 이황 선생이 될 것이나 재료 수집의 관계로써 시대와 순서를 불구하고 서경덕 선생을 먼저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의 바쁜 일을 돌아보지 않고 이번 소개의 붓을 들어주신 황의돈(黃義敦)씨에게 감사를 드리나이다. (기자)
一. 선생의 탄생과 유년시대
선생의 성은 서이고 이름은 경덕이며,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이고 본관은 당성(唐城)이다. 송도 동문(東門) 밖 화담(花潭) 위에 은거 수도하여 세상 사람들이 화담(花潭) 선생이라 지칭하였다. 지금으로부터 433년 전인 1489년(조선 성종 20) 2월 17일에 조선의 보옥이며 세계의 아름다운 꽃으로서 동양 문화상의 지도자며 조선 사상계의 개척자인 화담 서 선생은 황천의 사명을 띠우고 5백년 문화적 고도로서 성거산(聖居山)이 높고 화계수(花溪水)가 맑은 송도 화정리(禾井里), 침묵한 전사(田舍) 한 구석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때는 마침 조선의 두 번째 문화적 황금시대인 성종대왕의 재위 중이며 이상적 정치가 정암 조광조 선생의 탄생 후 8년. 대사상가 퇴계 이황 선생의 탄생 13년 전. 대철인 율곡 이이 선생의 출생 48년 전이다. 중국 철인 경헌(敬軒) 설선(卨瑄)의 사망 후 25년. 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의 죽기 11년 전. 정암(整菴) 나흠순(羅欽順)의 출생 후 24년.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의 탄생 후 17년이다. 서양 철인으로는 지동설 창도자 코페르니쿠스의 출생 후 17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3년 전. 루터의 종교개혁선언 28년 전이다.
조선에서는 조선 문화의 개척시대요 중국에서는 명조(明朝) 문화의 극성 시기며 산동(山東) 설파(薛派)와 여요(餘姚) 왕파(王派) 양대 철학파의 대논전 시대요 서양에서는 계몽운동의 단서가 가장 맹렬히 분기하던 시대이다.
아! 하늘이 그 뜻이 있음인지? 세계적 규운(奎運 : 학문이나 예술 혹은 문화나 문명이 진척되는 기운)이 일시에 활짝 열리고 동서의 철인이 동시에 배출케 됨은 또한 희귀하다 할 만하도다.
선생의 가정은 미미한 지방의 사대부 집안으로서 풍덕(豐德)에 대대로 살다가 선생의 외가를 따라 송경(松京, 개성)으로 옮겼다. 선생의 증조는 득부(得富). 할아버지는 순경(順卿). 아버지는 호번(好蕃). 어머니는 한씨(韓氏)로서 선생과 같은 광영의 후손을 둘만한 업인(業因 : 선악의 인과응보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행위)으로 「덕을 쌓고 어진 일을 많이」 하기 여러 대였었다.
더구나 선생의 아버지는 근엄 정직키로, 선생의 어머니는 온순 자애롭기로 이웃들의 숭앙을 받았었다. 아! 예천(醴泉)이 어찌 근원이 없으며 영지(靈芝)가 어찌 뿌리가 없으랴? 선생의 천성이 아무리 생지(生知 :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앎)일지라도 근엄한 아버지의 훈도 아래에서 자애롭고 정숙한 어머니의 품 안에서 그리 순결하고 때 없는 어진 성품을 보육하고 순수하고도 밝으며 통철한 천성을 갈고 닦으셨다.
그래서 선생은 6, 7세 때 벌써 총명하고 굳세고 정직하며 어르신들의 교훈에 순종하고 물리 연구에 매진하였다. 선생의 가정은 원래 가난하였다. 선생이 6, 7세 때에 생계를 돕고자 밭에서 채소를 채취하다가 종달새가 매일 조금씩 점진적으로 날게 되는 것을 보고 심사숙고하기 며칠 만에 마침내 그 새가 땅기운이 따뜻해짐에 따라 날이 갈수록 날게 되는 원리를 깨달았다. 아! 천리마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천 리를 달릴 것을 꿈꾸고 학의 새끼가 아무리 미소하더라도 구고(九臯)의 울음에 화답하는 도다.[학은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멀리 들리는 것이다. 구고(九皐)에서 울면 들에도 들리고 하늘에도 들린다 하니, 군자가 행실을 닦으면 아랫사람이 믿고 조정에서까지 안다는 뜻이다.] 장래 반도의 개척적 대철인이 될 만한 선생의 천재성은 유년 시대에도 종종 표현됨이 이러하였다.
선생의 14세 때에는 향촌의 서생에게 상서(尙書)와 기삼백(朞三百) 편을 수학하다가 서생이 원리를 분명히 해석하지 못하자, 선생이 물러나 심사숙고하기 15일에 마침내 그 조리를 통찰하여 깨닫고 이로부터 여하한 사리라도 연구하여 깨달을 만한 자신감이 확립하여 연구에 발걸음을 보무당당하게 전진하였느니라.
二. 선생의 수양(修養) 시대
아! 우리 사람의 운명은 아무리 길더래도 그의 결정은 찰나의 감격으로부터 되고 마는 것이다. 석가세존은 가곤라(迦昆羅) 성문 밖의 신비한 감격으로부터 삼계(三界)의 구원자가 되었고, 디오니시오스(Dionysios)는 역사를 읽고 감격한 한 방울의 눈물로부터 해와 달과 빛을 다투는 대 역사가가 되었으며, 원효는 심법(心法) 생멸의 화두를 깨달은 감격적 충동으로 불교계의 대 위인이 되었고, 기번(E.Gibbon)은 로마 옛 수도의 석양이 지는 숲속에서 옛날을 회고하며 흘린 한 움큼의 눈물로부터 천고불마(千古不磨)의 대 사필(史筆)이 되었도다.
세계 문화사에 아름다운 꽃이며 반도 사상계에 결정(結晶)이 될 만한 선생의 생애도 또한 아무리 천재성을 부여받았더라도 평범하지 않은 감격적 충동이 어찌 없었으랴?
선생 18세 때에 대학(大學)을 통독하다가 치지는 격물에 있다(致知在格物)는 장에 이르러 개연히 탄식하고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떨구었다. 이 찰나 동안 선생의 가슴에는 무엇이 돌격하고 선생의 신경에는 무엇이 자극하는 듯 하엿다. “아! 사람이 되어서 어찌 우주의 진리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야 사람이며, 선비가 되어서 그것을 격물치지 못하고서야 글을 읽어 무엇 하랴?” 하면서 이로부터 크게 분발하여 천지 만물의 명칭을 벽 위에 죽 벌려 기록하고 날마다 그것을 궁구하기에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하였다. 아! 이것이 선생이 진리적 생애에 투입하는 최선의 경로요 최초의 감격적 충동이었으며, 선생의 40년 오랜 세월의 전도는 이로부터 지배되고 선생의 천고불마의 대 사상은 이로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선생의 미간은 헌앙하고 선생의 안목은 샛별 같으며, 선생의 총명은 빼어나고 선생의 굳센 의지는 일반 사람보다 뛰어났다. 선생은 이 같은 비범한 천품으로서 문자상철우(蚊子上鐵牛 : 모기가 무쇠소 위에 앉아 있다는 뜻. 모기가 무쇠소를 주둥이로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목숨을 다해 뚫다보면 들어가게 된다는 것으로 격외의 훌륭한 경지를 비유)적 지성과 침선파부증(沉船破釜甑 : 배를 가라앉혀 강을 건너 돌아가지 아니하고 솥을 깨뜨려 다시 밥을 짓지 아니한다는 뜻.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함을 비유)적 최후의 용공(用工)을 겸하였다. 선생이 이로부터 문을 닫아걸고 몸을 똑바로 하고 앉아서는 마음을 다해 궁구하기 수십여 년에 왕왕히 시공을 초월하고 침식을 망각하였다. 더구나 가난한 선생의 가정에서는 6, 7일간 밥을 지어 먹지도 못하였으나 사색에 전력하는 선생의 정신은 10여 일 간 수면도 사절하였다. 그렇지만 봄바람 부는 것처럼 온화한(春風和雨) 선생의 얼굴에는 한 조각 어두운 그늘이 없었고 넓고 명쾌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이 깨끗한(光風霽月)인 선생의 흉중에는 한 가지 진리의 광명이 비쳤다.
진리의 즐거움과 자연 속에 취하고 묻힌 선생의 눈에는 영욕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겼다. 그래서 중종 14년(선생 31세, 기묘) 조광조 개혁 운동 때에 선생이 현량과에 수석으로 추천되었으나 선생은 그를 명쾌히 거절하고 말았다.
선생이 학문에 힘씀이 너무 지나치고 엄격함으로 선생과 같은 건강한 신체와 강고한 두뇌로도 마침내 기와 혈이 막히고 신경이 쇠약해져 한 때에는 어려운 처지와 비운에 빠졌다. 그래서 선생은 34세 때에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하고자 명산대천에 유람의 길을 떠났다. 그래서 금강산, 속리산, 지리산 등 명산에 주유하였다. 선생은 원래에 자연을 가장 사랑함으로 명산의 경치좋은 곳을 만날 때마다 감흥을 못 이기어 글 짓고 노래하고 춤추기를 마지 않았다. 그의 「금강산시」에는 「금강의 아름다움을 전해 듣고 마음속으로 20년을 그리워하다가 이제 경승지에 왔는데 게다가 좋은 가을날을 만났도다. 계곡의 국화 향이 처음 발하고 엄숙한 단풍의 붉은 잎은 불타려고 하네. 길가며 읊조리며 산골짜기에 다다르니 마음이 호젓해지고 쓸쓸해지네.(聞說金剛勝 空懷二十年 旣來淸景地 况値好秋天 溪菊香初動 嚴楓紅欲燃 行吟林壑底 心麗覺蕭然)라고 하여 금강산의 자연을 탄미하였다.(이 밖의 다른 시는 지면상 관계로 소개치 못함)
선생이 여행한지 1년 만에 정신의 총명과 육체의 건강이 쾌차됨으로 이에 학문에 더욱 전력하여 황홀한 진리적 깨달음의 경지로 진보케 되었느니라.
三. 선생의 노성(老成) 시대
선생 43세 때에 어머니의 명령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성균 생원이 되었으나, 부귀가 그의 본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속된 세상에 몸을 더럽히지 않았고, 56세 때에 후릉 참봉(厚陵叅奉)에 임명을 받았으나 또한 굳이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마침내 청산이 우뚝하고 푸른 물이 양양한 화담 서사정(逝斯亭) 가에서 사슴과 벗하고 학과 짝하면서 진리의 꿈을 꾸고 자연의 춤을 추면서. 소옹(邵雍)과 장재(張載)와 같은 옛사람을 추모하고 화숙(和叔) 박순(朴淳), 태휘(太輝) 허엽(許曄)과 같은 후진을 양성하였도다.
「이틀이나 밥을 지어 먹지 못하고 해는 이미 정오인데 논의로써 사람을 감동시키고 용모에는 초췌함이 없었다」라 함은 이 율곡의 기록이요, 「이끼가 솥 안에 가득한데 거문고 타며 높이 읊조리네」라 함은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찬탄이며, 「그 해에 만날 수만 있다면 십 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구나」라 함은 이 퇴계의 추모요 「송도에 삼절이 있으니 선생이 가장 으뜸이다」라 함은 황진이의 우러름이며,
글 읽는 당일에는 세상 다스리는 경륜을 뜻하더니
나이 늙어 다시 안자(顔子)의 가난함을 달게 여겼네.
부귀는 다툼이 있는지라 손을 대기 어렵고
산수는 금하는 이 없으니 가히 몸을 편안케 하리.
산나물 뜯고 낚시질하여 그런대로 배를 채우고
달을 읊고 바람을 노래하니 마음이 상쾌하네.
학문이 의심 없는 지경에 이르니 참으로 쾌활하구나
헛되이 오랜 세월 살다간 인간이 되는 것을 면했구나.
몸을 중천(中天)에 세워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흥취가 맑고 화한 지경에 들어감이로다.
내 마음이 경상(卿相)을 박하게 여김이 아니라
원래 본뜻이 산수지간에 있음이로다.
성명(誠明)의 학업은 여유 있게 칼날을 놀리고
현묘한 기관(機關)을 잘 수렴하도다.
경(敬)을 위주로 하는 공부는 하늘을 대하는 듯하니
창에 가득한 바람과 달은 스스로 유연하구나.
이라 함은 선생이 스스로 말한 것이요 자찬한 바이다. 이 어찌 낙천적이고 천명을 아는 군자가 아니며, 안심입명(安心立命 : 삶과 죽음을 초월함으로써 마음의 편안함을 얻음)의 인생관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냐? 아! 선생의 평안하고 여유로운 기상과 맑고 깨끗한 정신은 천고의 후대 사람을 경계시키는 바이다.
크고 큰 설산(雪山)의 높은 봉우리인가? 크고 붉은 연꽃의 아름다운 꽃봉오리인가? 조양(朝陽)의 상서로운 봉황인가? 구름 속의 선학(仙鶴)인가? 내 무엇으로 선생을 찬미하며. 내 무엇으로 선생을 모사하랴? 내 아무리 배우고자 한들 배우며, 이름하고자 한들 이름할 소냐?
선생의 도덕이 더욱 원숙하고 선생의 학문이 더욱 노성하매 이에 56세의 고령으로 수십 년 동안 함축하여 쌓아놓은 자각적 진리를 펼쳐내어 원이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극설(太極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의 14편으로 선생의 핵심 사상인 기일원론(氣一元論)과 물질불멸론을 서술하고 성음해(聲音解), 황극경세수해(皇極經世數解), 괘도해(卦圖解), 괘변해(卦變解) 등으로 희역(羲易 : 역경(易經))과 소학(邵學 : 소옹의 학문)을 조술(祖述 : 先人이 말한 것을 근본으로 하여 서술하고 밝힘)하여 선생의 독특의 장점인 수리학(數理學)으로 우주 변화의 상수(象數)를 해석하였다.
「어진 자는 반드시 장수한다」는 원칙을 준수치 않는 무심한 하늘은 마침내 선생에게 오래 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58세를 일기로 마치고 지금으로부터 376년 전인 1546년(명종 원년) 7월 7일에 빙그레 미소를 짓는 가운데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아! 철인(哲人)은 시들고 태산(泰山)은 무너졌도다. 다정한 임 잃은 성거산의 저녁 구름은 천고에 원한이 사무치고 주인 없는 화담의 흐르는 물결은 지금도 오열하도다. 그렇지만 선생은 갔더라도 선생의 정신은 남아있고 선생의 육체적 생명은 58세의 단시일로 마쳤더라도 선생의 진리적 사상은 천만 년에 무궁하리로다.
나는 이로부터 선생의 표상적 생애의 서술을 마치고 선생의 사상적 방면을 설명코자 하노라.
四. 선생 이전의 중국유교 사상발전의 대강
선생은 물론 철학가요 유학자이다. 유학자 중에도 심오하고 예리한 독창적 철학자요, 철학가 중에도 온건하고 착실한 유교적 사상가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말하면 유교가 그의 생애요, 유교 사상이 그의 생명이며 광채이다. 누구든지 선생의 생애 곧 선생의 역사를 설명하려면 선생의 실제 생애보다는 선생의 사상 방면에 치중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는 선생의 빛이 없을 것이요, 선생의 가치를 구할 곳이 없으리라.
미숙한 후생(後生)인 필자로서 외람되이 선생을 소개코자함은 물론 황송한 바이지마는, 기왕 붓을 들고 선생을 소개코자하는 이상에는 필자도 또한 선생의 사상 방면 곧 선생의 유교 철학적 개념에 치중치 아니할 수 없는 동시에 그것의 유래와 원천으로서 선생의 사상 상에 중대한 관계가 있고 연결되어 있는 중국 유교사상의 역사적 발전 상황을 먼저 서술치 아니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곧 선생의 사상을 설명키 곤란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 대강을 설명코자 하노라.
윤리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은 물론 중국인의 특색이요 중국 사상의 중심 문제며, 더구나 유교의 강령이요 주의(主義)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모두 만반의 행위를 윤리적 입장으로 해결코자 하였다. 정치로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 임금은 임금다우며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의 이상국가를 꿈꾸었고, 처세로는 「효(孝)가 모든 행실의 근본이다」라고 부르짖었고, 철학으로는 「성선 성악(性善性惡)」이 그들의 중심적 논쟁(係爭) 문제로서 「천명을 일컬어 성(性)이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최종점이요, 발단적 첫걸음(역사적)이다. 바로 말하면 유교의 원시시대 곧 그 교조인 공자는 차라리 이상적 방면을 탐탁지 않게 여겨서 버리고 실제적 방면 곧 실천적 윤리를 오로지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명(命)과 인(仁)을 드물게 말씀」하시며, 「삶을 아직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며, 「사람 섬기는 것도 잘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으리요」 하여 현실 이외의 사색을 여지없이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공자의 뛰어난 제자인 자공(子貢)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성(性)과 하늘의 도는 얻어 들을 수 없었다」라고 개탄하였다. 바로 말하면 공자의 주장은 현실 생애에 몰두하는 우리 인생으로서는 현실 이외 곧 아득히 멀기만 한 이상적 방면에는 넘어다 볼 필요가 없음을 언명하였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의 지식 요구의 충동은 원리에 대한 설명이 없는 믿음 아래 맹종함을 허락하지 아니 할뿐 아니라 당시에 양자강 유역에서 대단한 기염을 토하던 남중국의 문화 곧 노자ㆍ장자ㆍ열자ㆍ양자 등의 현묘한 이상적인 학설이 온 세상에 풍미하는 동시에 이상적 근거가 박약한 유교의 생명조차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항키 위해서는 상당한 윤리적 이상 곧 유교적 철학을 건설치 아니하고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자사(子思)는 「천명을 일컬어 성(性)이라 한다」는 것을 주창하여 유가 철학의 단서를 계발하였고, 맹자는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여 윤리의 기초적 사상을 수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유교 철학의 원시적 맹아시대에 단편적 발현으로서, 조직이 없고 연결이 없고 계통이 없고 통일이 없었다. 더구나 진한 이후 1500년간은 유교의 쇠퇴 암흑시대로서, 그 사상을 계승하고 발휘한 사람이 없었다. 동중서(董仲舒)의 도원설(道原說)은 소략한 데에 기울고. 양웅(楊雄)의 태현론(太玄論)은 노장(老莊)에 흐르고. 왕통(王通)의 집중설(執中說)은 피상에 머물 뿐으로 물론 이상적 유학자가 없었다.
동한 시대부터 수입되기 시작한 불교 곧 현묘하고 신비한 인도 사상은 도도한 홍수와 같이 일사천리의 급물살과 같은 세력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고 마라카를 돌아 중국 전 대륙을 풍미하면서 재래에 근거가 공고하지 못하던 중국 문화사상을 유린케 되었다. 그러므로 장융(張融), 주옹(周顒), 진희이(陳希夷) 등의 삼교일치론, 곧 중국과 인도 양대 사조의 조화 운동이 없지 않았었다. 그러지만 곧 반응이 없고 공적이 없고 마침내 실패로 돌아갈 뿐이었다.
이에 송나라에 이르러 그 반동으로 주돈이, 소옹, 정호, 정이, 장재 등 여러 철인이 계속 나와 유교 사상을 일층 조직적으로 건설하고 유가적 입장을 일층 선명케 하여 불교사상에 대항하였고 더욱이 대철인인 주희, 육상산이 아울러 나와 그것을 집대성하매, 이에 유교의 세력이 갑자기 번성하여 동아시아 사상계에 패권을 장악케 되었으니 이에 순차적으로 송유(宋儒) 사상의 대강을 설명코자 하노라.
물론 유가의 주안점은 윤리이다. 그러므로 그 철학적 사상도 윤리적 입장에 출발하였다. 그래서 그 결과는 본체론(本軆論)에 그치고 말았다. 물론 인식론이나 미학의 범위에는 꿈속에서도 미치지 못하였다. 만일 유교철학이라 하면 그것은 곧 누구든지 물을 것도 없이 본체론 윤리학뿐으로 알고 말 것이다. 더구나 그 내용은 독단론(獨斷論)로서 우주의 실재를 맹목적으로 긍정하고 우리 사람의 깨달음을 대담하게 인정하였다. 20세기 철학 사조에 비교하면 물론 그 내용이 유치하고 그 범위가 편협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본론의 범위는 유가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비평코자 함이 아니요. 유가사상 그것의 역사적 발전 상태를 그대로 소개하여 화담 선생의 사상의 원류를 탐구하려 함이므로 시시비비는 물론하고 유가사상의 중심문제인 본체론과 윤리설만 그대로 소개하려 한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면 본론의 주제인 화담 선생의 학설로 후세에 남겨져 전해지는 것은 유교사상에서도 본체론의 일부만으로 윤리적 사조를 살펴볼 만한 선생의 저술이나 그 무엇도 후세에 남겨진 것이 없다. 선생의 사고 중 유일무이한 본체론을 소개코자하는 필자는 차라리 중국 유가 사상 중의 본체론의 일부만 서술코자 하노라. 그래서 지금 서술코자하는 유가철학의 조직적 시대, 곧 송유의 사상도 본체론의 일부만 소개코자 한다.
송유의 사상은 유교를 옹호하고 도교와 불교 양교의 배척을 주장하였으나 기실은 도교와 불교 양가 사상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바로 말하면 도교와 불교 양가의 사상을 흡수하여 환골탈태한 것으로 유교철학을 조직하였다. 그러므로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아무리 유가사상의 근저인 역학의 표면을 장식하였더래도 그 내용은 불교의 진여론(眞如論), 도교의 태일설(太一說)의 영향을 받은 것이 적지 않은 듯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말하면 삼교일치론자인 진희이의 무극도(無極圖)를 참작한 것은 역사 기록에도 밝히 나타나 있는 바이다. 물론 그의 계승자인 소옹, 장재, 정호, 정이, 주희도 그러하다. 더구나 육상산의 유심론은 유교적 표면에 불교의 이론을 골자로 채웠다.
주돈이의 태극설은 일원적 태극 아래에서 양동음정(陽動陰靜 : 양은 동적이고 음은 정적이다)의 2대 세력으로 우주의 생멸 변화를 설명하였고, 소옹의 선천학(先天學)은 일원적 선천(先天)이 동일한 기하학적 변화의 법칙으로 자연과 자아를 지배함을 주장하였으나, 주돈이의 태극과 소옹의 선천은 혼돈스럽고 장황한 명제로서 아직 이기(理氣) 곧 심(心)과 물(物) 양자의 분석적 경계가 명확하지 못한 동시에 아낙시만드로스의 「도, 아페이론(apeiron : 만물이 생겨나고 다시 돌아가는 만물의 근원 및 원리)」설과 유사한 원시기의 진보하지 못한 본체론인 듯하다.
거기에서 한 번 더 나아가 장재는 태허론(太虛論)으로 우주 발전의 원천이 기(氣) 일원에 있음을 주장하고, 정호는 이기교감론(二氣交感論)을 주장하여 우주의 생멸 변화가 음양 2기의 움직임과 정지(動靜), 떠오름과 가라앉음(升沈)에 오로지 달려 있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 유기론(唯氣論) 곧 유물론으로서 우주의 존재와 생성을 유물론적 방면에서만 관찰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에 불만을 품고 반동사상을 품은 정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기 2원 곧 심과 물 양원론의 단서를 계발하였다. 「음양이 되는 것은 도(道)이고 양이라 소리하는 것은 기이다. 기는 곧 형이하(形而下)인 것이며 도는 형이상(形而上)인 것이다」라고 하여 도와 기 곧 이와 기 두 가지로 우주의 존재를 해석코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단순 몽롱한 이기양원론으로 명확한 설명이 부족하였다. 바로 말하면 그는 장래 주희의 이원론을 계발할만한 선구적 사상에 불과하였다. 곧 정이의 몽롱한 이원론은 주희의 설명을 기다리고서야 조직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주희는 「이와 기는 결코 하나의 물체가 아니다. 다만 물체에서 있어서 보면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어 분간이 없다. 그러나 두 가지가 둘로 나뉘어도 해롭지 않다. 만약 이에서 본다면 비록 물체는 없더라도 이미 물리(物理)는 갖추고 있다. 또한 단지 이만 있으면 일찍이 실제로 이 물체는 있지 않다」라고 하여 이기 두 가지를 명백히 구분하였고, 「이와 기는 본래 앞뒤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소종래(所從來 : 내력)한 것을 미루고자 하면 이가 앞이고 기가 뒤이다」라고 하여 이기의 상상적 선후를 말하면서 「이는 별개의 물체가 아니라 기가 있어야 존재하니, 기가 없으면 이 또한 의지할 곳이 없다」라고 하여 「하나이면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다」는 설명을 주도하며 「기는 능히 응결(凝結)하고 조작(造作)할 수 있으나 이는 오히려 정의(情意)가 없고 계탁(計度)도 없으며 조작도 없다. 단지 이 기가 응결하여 모인 곳이라야 이는 곧 그 가운데 있게 된다」라고 하여 이기 양자의 성질의 다른 점을 설명하여 주이의 몽롱한 이기설을 명확히 설명하고, 「태극은 곧 이(理) 한 글자이다」라고 하여 주돈이의 몽롱한 태극설을 해석하였으며, 「이것이 이고 곧 기이다」라고 하여 이기이원론의 기치를 선명하게 수립하였다.
송유의 학설도 이에 이르러 조직이 완성되었다고 할 만하도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아직도 단순하여 장재와 정이의 기원론은 이의 위치, 곧 이기(심물)의 관계적 한계와 성질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그의 불멸성(물질불멸)을 깨닫지 못하였다. 정호와 주희의 이기양원론은 연기의 방편적 설명이 없었으며, 더구나 그 양원론 자체가 왕왕히 서양에서도(스피노자 사상)이나 인도에서도(상키야 사상) 보는 바와 같이 철학 역사상 중세기말에 진보한 사상이다. 그 결점은 마침내 조선의 철인 화담, 퇴계, 율곡, 노사(기정진) 여러 선생의 손을 경과하고서야 보충이 되고 완성이 되었도다.
아! 위대하다. 우리 조선인의 지력이 이러하다. 아! 영화로다. 우리 한반도의 역사도 이러하다. 우리 조종의 지력으로 우리 선배의 사상으로 세계 문화에 공헌함이 과연 어떠하였는가? 필자는 그 혈통을 받고 傳性을 이은 미래의 조선 청년으로 세계 문화의 완성적 성공이 있음을 축원하면서 붓을 들어 조선 유교사상의 발전으로부터 화담 선생의 사상의 일반을 소개코자 하노라.
(단 육상산의 유심론과 원ㆍ명(元明) 여러 유학자들의 학설은 직접적 영향이 적음으로 생략함)
五. 선생 이전의 조선 유교발전의 줄거리
공자 탄생 이전 곧 원시 유교가 조선에 수입됨은 기자 시대로부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원시적 사상이요 공자 이후 곧 구체적 유교가 수입되는 것은 삼국시대 초엽부터 된 듯하다. 역사 기록으로 보면 지금으로부터 1,550년 전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대학을 설립하고 자제를 교육하였다 하며, 지금으로부터 1,636년 전인 백제 고이왕 52년에 백제 사람 왕인이 논어와 효경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일본인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3, 400년을 경과하여 신라 진평왕 이후로는 삼국전쟁에 당나라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신라인이 자주 중국에 왕래하는 동안에 중국의 유불 양교의 사상을 크게 수입하면서 불교에는 원효, 유교에는 설총의 양대 위인이 잇따라 나왔다. 그래서 설총은 방언으로 9경(九經)을 해석하여 유교사상을 크게 고취하고 남북조선시대(통일신라와 발해)에도 중국 유학생이 배출됨에 따라 유교의 수입됨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오로지 숭상하던 불교사상의 박해로 인해 유교가 크게 발전되지 못하였다.
고려 4백 년간에도 불교가 오로지 성함으로 김양감(金良鑑)ㆍ최충(崔沖) 등 약간의 석유가 간혹 나와 유교를 고취하였으나 또한 미미하고 부진하였다. 고려 말엽 충렬, 충선왕 때에 원나라와의 교통이 빈번함에 따라 중국 유교사상이 다시 수입되면서 안향(安珦)은 유교의 재흥운동에 전력하였고. 우탁(禹倬), 윤언이(尹彦頤)는 역학을 전공하고 백이정(白頤正)은 정주(程朱)의 학설을 수입하며, 권보(權溥), 박충좌(朴忠佐)는 그것을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케 하고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은 유교를 계속적으로 수입 선전하며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권근(權近) 등은 유교를 연구하고 해석하여 크게 고취하매 부패한 불교에 억압된 인심이 크게 호응하여 유풍(儒風)이 크게 진작하였느니라.
조선 초기에도 그 유풍이 크게 진작하고, 조선의 정책이 또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배양하므로, 인심이 그것에 전적으로 쏠리는 중에 위에서는 세종ㆍ성종 같은 성군이 그것을 장려하고 아래에서는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같은 대유(大儒)가 속출하여 그것을 고취하였으므로 유교 사상이 전 사회에 골고루 스며들었느니라.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문화를 물론하고 남의 사상, 남의 문화를 수입하려면 적어도 1백 년 동안의 전력이 아니면 그것을 소화하고 그것을 음미하여 스스로의 문화로 환골탈태하지 못하는 법이다. 곧 우리의 유교사도 그 원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약 1백여 년간은 순전한 중국사상의 수입시대로서 그것을 연구하고 해석함에 지나지 못하였다. 바로 말하면 정몽주, 김종직, 조광조 등의 여러 선배들이 아무리 석학이라 숭배하더라도 그들은 곧 중국사상을 중국사상대로, 중국식 유교를 중국식 유교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사상은 조선화된 사상이 아니요 그들의 유교는 조선화된 유교가 아니었다. 해석적이요 인습적이며, 창조적이요 개척적이 아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면 그들은 장래의 창조와 개척의 선구로서 길을 열고 터를 닦는 데에 지나지 못하였다.
정말 조선화된 사상, 조선화된 유가로서 창조자요 개척자가 된 이는 4천 년 조선 문화사의 결정으로, 200년 송학 수입 역사의 결과물로 탄생하신 화담 선생이 그이시다. 그가 개척자의 최선봉으로서 퇴계ㆍ율곡ㆍ노사 등 모든 계승자도 그의 뒤를 잇대어 배출하였다. 그래서 5백 년 조선 문화의 꽃이 피었고 3천 년 동양 유교의 열매가 맺혔다. 이로부터는 본론의 주제로서 개척자의 최선봉인 화담 선생 학설의 대강을 소개코자 하노라.
六. 선생 사상의 줄거리
『개벽』 제13호 위인 투표에서 선생이 과학자의 최고점을 얻으셨다. 그러나 그는 정곡이 아니다. 일반 사회에서 아직 선생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치 못한 표징이다. 선생은 단순한 과학자가 아니다. 과학자요 철학자이다. 차라리 과학보다도 철학 그것이 선생의 위대한 점이다. 그러나 선생의 연구 방식은 정말 과학적 연구방식을 응용하였다. 과학적 사상이 결핍한 동양에서는 참으로 유일무이한 창작적 연구방식으로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귀납법을 능가할 만하였다.
선생은 물리적 연구의 기초가 수학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수(數)는 불가불 알아야 하니 이(理)의 종횡과 착종은 수(數)자에 있다」라고 언명하였다. 그러므로 선생 학문의 첫걸음은 수학으로서 그것을 연구 방식에도 응용하였지만, 선생의 위대한 점은 과학이 아니요 과학적 연구 위에서 건설한 철학적 사조, 곧 유기론(唯氣論, 유물론) 그것이 참으로 위대한 점이다. 그보다도 물질 불멸론 그것이 더 한층 창작적으로서 광휘가 찬란하지만 물질 불멸론 그것도 과학적이 아니요 철학적이다.
선생은 「태허(太虛)는 맑아서 형체가 없으니, 그것을 불러 선천(先天)이라 하는데 그 선(先)은 시작이 없으며 그 유래는 가히 궁구할 수 없다」라고 하여 글 첫머리에 처음도 없고 마침도 없는 우주 전체에 대한 명제를 대서특필하고 그 뒤를 이어 「주역에 이른바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고, 중용에 이른바 성(誠)이라는 것은 스스로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그 맑은 본체를 말한다면 이것이 기(氣)이며 그 혼연한 기의 둘레를 말한다면 이것이 태일(太一)이다. 주돈이가 이에 대해 어찌 표현하지 못하고 부득이 대략적으로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라 표현하였으니 이것이 곧 선천이다」라고 하여 과거의 철인이 전용한 각종 술어를 포착하여 교묘히 자신만의 기원론(氣元論) 곧 우주의 존재가 기일원론뿐임을 증명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기이하고 기이하며 오묘하고 오묘하다. 갑자기 뛰어오르기도 하고 홀연히 열리기도 하는데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인가? 스스로 능히 그렇게 한다면 또한 스스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이(理)가 움직이는 때라고 한다. 주역에 이른바 느껴서 드디어 통한다 하고, 중용에 이른바 도(道)는 스스로 이끌어 나간다고 하고, 주돈이 이른바 태극이 움직여서 양기(陽氣)를 낳는다는 것이다. 움직임과 정지, 닫힘과 열림이 없을 수 없으니 그 까닭은 왜 그런 것이냐? 이미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여 기일원(氣一元)의 자존 자립, 자행자지(自行自止 : 자기 스스로 행하거나 멈춤)함을 증명하였다. 분명히 말하면 우주의 근본 존재가 오직 기(氣)뿐으로서 연기적 원동력이 또한 그 자체일 뿐임을 언명하였다. 이는 과연 화엄 상승의 법계연기론에 지지 않는 연기론이다.
선생은 모두 일원(一元)의 선천으로 만상의 후천계가 전개되는 경로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미 하나의 기가 스스로 두 개의 기를 품고 있다고 하고, 이미 태일(太一)이 태이(太二)를 지니고 있으므로 일(一)은 부득불 이(二)를 낳게 되고 이(二)는 스스로 생극(生克)하게 되는 것이다. 기가 미세한 데에서 고동치는 데 이르기까지 그 생극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라 하고, 「이(二)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음(陰)과 양(陽)이며 동(動)과 정(靜)이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져 음과 양이 되는데, 양이 그 고동치는 것을 다하여(極) 하늘이 되었고, 음은 그 고동치는 것을 다하여 땅이 되었다」라 하여 일원의 기체(氣體)로부터 음양의 두 기가 스스로 나뉘고 음양 두 기의 생극(生克)과 고동으로부터 후천 세계의 변화 작용이 됨을 언명하였다.
선생의 설명이 이에 미치매 독자는 그 누구든지 재래 유가 철학 상에 제일 중요한 이의 술어를 붙일 곳이 없음을 의심치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은 그러한 모순을 제거키 위하여 「그렇게 되는 바를 일컬어 이(理)라 하고, 그렇게 오묘한 바를 일컬어 신(神)이라 하며, 그 자연스럽고 진실된 것을 일컬어 성(誠)이라 하고, 그 능히 약동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일컬어 도(道)라 하는데 이것을 모두 총괄하여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을 태극(太極)이라 한다」라고 하여 내려오는 각종의 술어를 모순 없이 일관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오히려 후대 사람의 오해가 있을까 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 「기(氣) 밖에 이(理)는 따로 없으며, 이라는 것은 기의 주재(主宰)이다. 이른바 주재는 바깥으로부터 와서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 작용을 지니고 능히 소이연(所以然 : 그렇게 되는 까닭)의 바름(正)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을 일컬어 주재라 한다」라고 하여 이(理)는 기의 변화 작용상 법칙의 가명이오 실재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선생이 남긴 저술을 읽어 이에 이르매 기원론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선생의 사상과 설명이 한 터럭의 빠뜨려진 곳이 없이 철두철미하게 조직적이요 계통적임을 감탄치 아니할 수 없다.
선생은 다시 「이(理)는 기(氣)에 앞서지 않으니 기가 시작이 없으면 이는 진실로 시작이 없다. 만약 이가 기에 앞선다고 하면 이는 기가 시작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은연중에 주희의 「이가 앞이고 기가 뒤다(理先氣後)」설을 논박하였고, 「노자가 말하기를 허(虛)가 능히 기(氣)를 낳는다 하였는데, 이는 기가 시작이 있고 유한(有限)한 것이다」라 하여 노자 사상을 반박하였다.
이로부터 선생은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 「기(氣)는 시작도 없고 생겨남도 없다. 이미 시작이 없는데 어찌 끝나는 바가 있으리오? 이미 생겨남이 없는데 어디서 사라진단 말인가?」라고 하여 우주 일원적 기체(氣軆)의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으며 불생불멸의 원리를 설파하고, 그 결론으로 「죽음과 삶 그리고 사람과 귀신은 단지 기(氣)가 모이고 흩어진 것에 불과하니, 모이고 흩어진 차이만 있으며 있고 없음의 차이는 없다」라 하고, 「사람이 흩어짐에 있어서는 몸과 넋은 비록 흩어지지만, 한데 어울리어 맑고 텅 비어 있는 것에서는 끝내 태허(太虛)의 맑은 가운데로 흩어지지 않는다」이라 하며, 「물체의 미소한 것이라도 그 기는 끝내 흩어지지 않으니, 왜 그런가? 기는 이미 시작이 없는 까닭에 그 마침도 없어서이다」라 하고, 「비록 한 조각 향촉의 기가 눈앞에서 흩어지는 것을 볼지라도 그 남은 기는 끝내 흩어지지 않으니, 어찌 이것을 일컬어 무(無)로 끝났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여 물질의 불생불멸한 진리를 갈파하였도다.
아! 위대하다! 선생이여! 선생 이전에 선생이 없었고 선생 이후에 선생이 없었도다. 선생의 유물론은 한 방울의 물이라도 새지 않는 철저한 조직적 사상이요, 연기론(緣起論)은 화엄 상승의 법계 연기론이요, 물질 불멸론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제창한 것(서양의 물질불멸론보다 2백 년 전)이었다.
아! 나는 과거 철인 큰 선비가 자허(自許 : 자기 스스로 인정함)가 높고 자부(自負 : 자신에 대해 마음을 당당히 가짐)이 중함을 왕왕히 보았노라. 「천상천하유아독존」은 능인(能仁)의 자부요, 「유일하며 둘도 없고 하느님의 참 아들」이라 함은 기독교의 자존이요, 「하늘이 나에게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가리칠 천덕(天德)을 주어 태어나게 했거늘 환퇴(桓魋)가 나무를 베어 압살하려 한들 나를 어찌하겠느냐」 함은 공자의 자허(自許)이다.
선생 또한 자부가 중하고 자허가 높았도다. 「이 말이 비록 문장은 졸렬하지만 여러 성인들이 다 전하지 못한 그런 지경까지 이해한 것을 담고 있다. 너희는 중간에 잃어버리지 말고 후학들에게 전하여라. 온 세상에 두루 펴면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모두 동방에서 학자가 나왔음을 알게 되리라」 함은 선생이 사생인귀론(死生人鬼論)을 박이정(朴頤正)ㆍ허태운(許太輝) 등 문인에게 부탁하던 말이다. 선생의 자부심이 또한 어떠하였는지 알 만하도다. 이 어찌 구멍만한 얄팍한 소견으로 의기양양 자부하는 천박한 무리에게 비길쏘냐?
선생의 정신적 훈도 아래 생장한 우리로서, 선생의 혈통적 후손인 우리로서, 선생이 개척한 토대에 집을 짓고 선생의 김맨 좋은 밭에 여름을 거듬은 고사하고, 그 토대에 가시넝쿨이 얽히고, 그 좋은 밭에 잡초가 뒤덮였다. 박옥(璞玉)이 들에 묻히고 진주가 티끌에 쌓여 그의 빛이 사라지고 그의 값을 잃게 되었도다. 아! 선생의 정중한 부탁을 받은 우리로서 선생의 가치를 천하에 알리기는 고사하고 선생의 사상이 어떠하였는지 우리도 이해치 못하게 된 우리 사회야말로 참으로 크게 탄식하고 통한하지 않을 수 없도다.
필자와 같이 졸렬한 학식으로 선생의 사상을 외람되이 소개한다 함은 너무나 송구하온 중에 더구나 짧은 시일과 간단한 참고로 문장을 다듬고 어휘도 적절한가를 살피고 할 여가도 없이 얼기설기 엮었으므로 황망한 점이 매우 많을 뿐 아니오라 최초의 예정은 『선생의 학설에 대한 조선사상계의 영향과 반동』 『선생의 학설에 대한 여러 선배의 비평』 『선생의 사상과 동서 철인의 사상과의 비교』 『결론』의 4장을 편 끝에 서술하려 하였더니 촉급한 연고로 인하야 이만 그치고 후일에 독립의 책자로 『화담선생전』을 발행하여 독자 여러분에게 사과코자 하노이다. (필자는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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