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조선 10대 위인 소개의 기3(其三)

浩 根 書 堂 2009. 5. 8. 09:27

개벽 제16호(1921년 10월 18일)

조선 10대 위인 소개의 기3(其三)


 

 

 희대의 정치가이며 또 철학가인 율곡 선생

   

 


 

一. 선생의 약력


선생의 성은 이, 이름은 이요,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아버지는 원수(元秀)며, 어머니는 유명한 여류 천재인 사임당 신씨이다. 지금으로부터 386년 전인 조선 중종 30년,(1,536년) 12월 26일 인시(새벽 3~5시 사이)에 강원도 강릉군 북평촌(외외가인 이씨 집)에서 탄생하였다.

그래서 선생의 천재는 특수하여서 13세에 진사 발해시(進士發解試 : 초시)를 마치고 14, 5세에 문장이 대성하시었다. 그러나 불행의 액운은 선생의 앞길을 어둡게 하여 선생 16세 때에 가장 사랑하고 가장 공경하시던 바로서 총명이 절륜하고 재덕을 겸비한 여중 군자이며 서화문장의 백미를 구비한 여류 예술가인 모부인 신사임당을 영결케 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끝없는 원한과 한없는 비통함을 못 이겨 19세 때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의 이치를 연구한 지 1년 만에 하산하였다. 그로부터 유교에 헌신하는 동시에 평생의 도우(道友)인 우계(牛溪) 성혼과 구봉(龜峰) 송익필 두 선생과 교분을 맺고 도의와 학문을 강마하였다. 22세에 부인 노씨를 맞아들였고 23세 때에 당대의 석학으로 선생의 선배인 퇴계 선생을 배알하였다.

그로부터 유학에 정진하기 3, 4년간이었는데, 26세 때에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운 선생은 엄부 원수공마저 영결하였다. 29세 때에 과거 조선의 유일한 출세 경로인 진사 문과를 연달아 장원급제하게 되면서 이로부터 선생의 정치적 활동시기가 되었다.

선생의 영예가 본래 전국에 진동하였으므로 곧바로 호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30세에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을 지내고, 33세에 사헌부 지평이 되어 〈동호문답(東湖問答)〉과 〈시무소책(時務䟽策)〉을 올려 시정을 격렬히 논하였다. 이로부터 39세까지 전후 6년간에 홍문관 교리, 이조 정랑, 의정부 사인, 홍문관 부응교, 청주 목사, 사간원 전한, 응교, 직제학, 동부승지, 우부승지, 병조 참지, 대사간, 황해 감사 등의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강직하고 깨끗한 선생의 천성은 시론(時論)과 서로 용납하지 못하므로 마침내 파주ㆍ해주 등지로 물러난 시일이 많았었다.

선생의 40세 때에 부제학으로 임명됨을 받고 해주 시골로부터 다시 한양에 들어오자 300년래에 온 천지에 참혹함을 극도에 이르게 한 대정쟁 폐해의 근원인 동ㆍ서인의 당쟁이 처음 일어나 대립각을 세우고 맞서 싸움이 격렬하였다. 선생이 그들을 조화하는데 진력하매 조야가 다 선생에게 의지하여 두텁게 여기고 선조도 또한 크게 경애하였다. 이로부터 우부승지, 대사간, 이조 참의, 전라 감사, 호조 판서, 대제학, 병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나 마침내 허봉(許篈), 송응개(宋應漑), 박근원(朴謹元) 등 소인배의 배척으로 인하여 사퇴하였다. 다음해 곧 선생의 49세 되던 해 정월 16일에 천하를 다스리려는 큰 뜻을 다 펴지 못하고 갑자기 서거하였다.


 

二. 선생의 천재와 품성


독자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선생은 참으로 희대의 대 천재이다. 「산하(山河)의 빼어난 기운을 타고난 삼대(三代)의 인물이다」라고 함은 성혼의 찬탄이오, 「산으로 보면 풍악산이 으뜸이요, 인물로서 보면 율곡 선생이 으뜸이다」라 함은 만퇴(晩退) 신응구의 숭앙이며, 「누가 율곡을 뜻은 크나 재주는 어설프다 하였는가? 그 재주를 쓰지 않고 어설프다 말하는 것이 옳은가? (중략) 구름이 높은 하늘을 지나는 것처럼 흔적이 없으니 진실로 이른바 세상에 드문 자질이다.」라 함은 사암(思菴) 박순의 정평이다.

선생의 천재성은 정말 생이지지(生而知之 : 학문을 닦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안다는 뜻으로 성인(聖人)을 가리킴)에 가깝다. 그러므로 겨우 언어를 말하면서 문자를 알게 되었으며 따라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아름다운 시구도 흔히 즉석에서 읊으셨다. 선생의 3세 때에 외할머니인 이씨 부인이 선생을 업고 석류를 따주면서 시를 짓도록 명하자, 선생은 곧 거침없이 「석류 껍질 속에 빨간 구슬이 부서져 있네」라 하였다. 이것으로만도 그의 천재성이 어떠함을 알만 하겠도다.

4세 때에 고을 선생에게 사략(史略) 첫 권을 수학하다가 고을 선생의 구두에 잘못됨을 교정하였다. 7세에 이웃 마을 사람인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재미삼아 썼는데, 「겉으로는 너그러운 듯하지만 안으로는 원망을 품고 있으니 이 사람은 소인이다. 만약 이 사람이 뜻을 얻게 된다면 반드시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다」 하더니 그 후에 과연 그와 같았다. 아! 7세의 어린 아이로서 관찰이 어찌 그리 예리하였으며, 문장이 어찌 그리 유창하였을까? 참으로 그가 천재가 아니라 할 수 없도다.

그로부터 선생의 문장은 날로 진취하여 8세에 「산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었네」라고 하는 화석정시(花石亭詩)를 지었고, 10세에 「서리 바람이 땅에 떨치니 만 리에 칼과 창을 울리고, 눈꽃이 창공에 나부끼니 천 리에 옥가루가 흩뿌려지네」라 하는 유명한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어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다.

13세에 진사 초시를 마쳤으며 15세에 문장이 크게 이루어졌다. 아! 선생의 심오하고 정미한 철학적 사상은 다음 장에서 소개하려니와 선생의 문학적 천재성만도 이렇듯 숙성하였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도다.

나는 왕왕히 듣고 보았노라. 천재는 흔히 자기 멋대로 하는 데에 흐르고 교만에 빠지기 쉬우나 선생은 총명 영달의 천재로서 좋은 옥과 순도 높은 금과 같은 고귀한 품성을 겸하시었다.

「그 문장은 천마(天馬)가 하늘을 나는 듯하고 그 마음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도다」 하고, 「천품은 매우 고결하여 충후(忠厚)하고 단아하며 용모는 뛰어나서 정신과 풍채가 사람을 감동시켰다. 관용이 있으면서도 절도가 있고, 온화하면서도 절제가 있으며, 기쁘거나 노여워하는 빛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성내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라 함은 사계(沙溪) 김장생의 기록이오, 「풍모와 법도가 간결하나 언어는 호탕하였다. 고을 사람들을 접하는 데에 어리거나 늙거나 어리석거나 지혜로운 자들에게 각각 환심을 얻었다」라 함은 기암(畸菴) 정홍명의 잡록(雜錄)이다. 「남의 말을 수용하면서도 특히 남을 뛰어넘는 것이 있으며, 남을 그르다 하면서도 내 기상의 평화로움에 저애됨이 없으니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함은 구봉(龜峯) 송익필의 칭찬이요, 「자질이 매우 높은데 학식을 쌓음에 더욱 돈후해졌으며, 성품은 깨끗하고 온화하며 평안하면서도 총명하였다.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대함에 오로지 정성과 믿음에서 나왔으며, 예뻐하고 싫어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한 터럭이라도 개의하지 않으니 어리석거나 지혜로운 사람 할 것 없이 마음을 귀속시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라 함은 택당(澤堂) 이식의 찬탄이다.

선생은 천품이 원래 까다롭지 않고 화락하고 충후하며 단정한 군자인데 학문 수양과 도의 탁마의 성취에 따라 더욱 원숙하고 더욱 노성하여 일대의 스승이 되었고 백 대의 모범이 되었다. 위로는 효도하고 공경하며 아래로는 자애롭고, 국가엔 충성하고, 벗들에게 정성과 믿음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노형(老兄)이 공경히 따르고 서모(庶母)가 감화하였으며, 임금이 믿고 벗들이 귀의하여 가정이 화락하고 온 나라가 믿고 우러르며 국가의 동량이 되고 사회의 중추가 되었다.

아! 선생이 남긴 글을 읽을 때마다 선생의 천재성에 경탄치 아니할 수 없으며 선생의 품성을 숭앙치 아니할 수 없도다.


 

三. 선생의 진리 연구의 동기


누구든지 위대한 사업이나 학문을 성취하는 자는 가장 최고조인 감격적 충동의 동기가 없이 된 자가 없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최고조의 감격적 충동의 동기가 없는 그의 일생은 곧 사막이 되고 말 것이다. 특별한 충동이 아니면 특별한 사업을 이루지 못할 것이요, 특별한 동기가 아니면 특별한 위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세계의 장미꽃이요 우리나라의 금강석인 대 철인 율곡 선생의 위대한 진리적 생활의 동기도 또한 특별한 감격적 충동이 없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러하다. 그러하다. 꽃 같은 선생의 어릴 적 생애의 앞길에는 거듭된 재앙이 얽히고 참담한 슬픈 비가 내리도다. 보시오. 독자 여러분이시어!

가장 사랑의 원천이요 기쁨의 덩어리이며 총명과 재덕을 구비하고 은애와 무육(撫育)을 아울러 갖추었던 선생의 어머니를 영결케 되었도다. 때는 마침 선생의 나이 겨우 16세로서 어머니의 품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을 때이다.

아! 하늘의 이치가 원만하지 않고 사람 일에 한스러움이 많도다. 밝은 달이 어찌하여 세상일에 참여하여 문득 달님을 향해 지난 생을 돌아보게 하는고! 내가 선생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이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고 통탄에 동정의 뜨거운 눈물을 뿌리지 아니할 수 없도다. 하물며 하늘에 뿌리를 둔 효성으로 그 슬픈 지경을 몸소 당한 선생의 심리적 고통이야 그 어떠하였을까? 선생의 마음에는 끝없는 원한과 한없는 비애로 차고 말았을 것이다. 더구나 설상가상으로 역경에 역경을 더하여 절륜의 패악을 구비한 그의 서모가 집에 들어오면서 더할 데 없는 곤욕이 선생의 몸에 날로 더하게 되었도다.

아! 선생의 불운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유유한 하늘아, 이 분이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 내가 선생을 위하여 동정의 뜨거운 눈물을 뿌리고 선생을 위하여 동정의 통탄을 마지않노라.

선생과 같이 겸양의 덕성과 굳건한 인내의 기운을 가지고도 안팎으로 충돌을 받는 그의 슬픈 운명에는 참으로 인내키 어려웠다. 그러므로 선생의 심리 상태에는 날로 이상이 생기어 인생의 무상함과 세상 고통의 복잡다단함을 깨닫는 동시에 선생의 심리에 유일한 위안을 준 것은 오직 불교철학뿐이었다. 이것이 선생의 일생에 가장 대서특필할만한 감격적 충동이요 진리적 연구의 입문 동기였다.


 

四. 선생의 불교적 생애


선생의 진리적 생애의 서막은 이로부터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그것에 더할 데 없는 취미를 붙이자, 세월이 무상하고 시간 그림자도 빨라져 3개의 햇수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은혜를 갚는 상복을 벗게 되자 겹겹의 속세 티끌을 명쾌히 떨치고는 더할 데 없는 큰 용기를 분발하여 19세 되던 해 봄 3월에 이미 만들어놓은 봄옷을 떨쳐입고 표연히 금강산에 들어가 면벽 정좌하여 깊이 명상에 잠기는 수도를 계속하기 1주년이었다.

그래서 삼계(三界)가 허위요 만법(萬法)이 유심(唯心)인 대총상불이법문(大總相不二法門)의 묘장진체(妙藏眞諦)를 깨달은 바가 있었던 듯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면 선생의 철학적 이상은 이 시대에 벌써 공고한 기초를 세운 듯하다. 선생이 친히 그것을 증언하신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에 환경의 공격을 염려하여 진의를 토로하지 못함인 듯하다. 그러나 몇 마디의 남긴 말씀을 종합하여 보면 그러한 단서를 넉넉히 증명할 수 있다.

「맹자가 성선(性善)을 말하면서 반드시 요순(堯舜)이라고 일컬었으니 어찌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와 다름이 있겠는가」고 하며 「물고기 뛰고 솔개가 날아다니니 아래와 위 한 가지로, 이는 색(色)도 아니고 또 공(空)도 아니도다」라 하고 「언설(言說)이 있을 것 같으면 경계(境界)가 있다」라 하였도다.

이 어찌 만 길의 세상 먼지에 매몰된 속된 유자들의 언설이며 이 어찌 삼계를 초월한 혜안자의 소견이 아니랴? 내 아무리 「한 구석을 들어서 세 모퉁이를 돌이키지 못하는(擧一隅而反三)」 지식이 없더라도 한 점을 보아 전체의 모양 빛을 알만하며 한 조각 고기를 맛보아 솥 안의 맛을 알만하도다. 이 아무리 조각조각의 짧은 문구일지라도 선생이 불교 요체를 깨달은 더할 데 없는 증거품일 뿐 아니라 유불 양교의 정신상 공통점을 연결하는 데에 비길 데 없는 교량이요 연결 사슬인 동시에 전고에 없는 큰 안목임을 찬탄치 아니할 수 없도다.

그러나 선생이 입산한 지 1주년 곧 다음 해 가을철에 환속하였다 함에 대하여서는 누구나 의문 중의 의문이다. 그와 같이 가장 위안과 취미를 줄만한 불교 생활을 버리고 다시 먹구름 낀 고행의 세속으로 돌아왔음은 일종의 난해한 수수께끼이다. 선생은 그의 환속케 된 동기를 설명함에 「생각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하지 말라(勿作增減想)」고 한 한 구절에 마음이 움직이게 되어 환속하였다고 언명하였다.

그래서 후대 사람의 해석에서는 선생이 그 허무함을 후회하여 환속하였다고 한결같이 단언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의 참 뜻을 오해함인 듯하다. 과연 불교 공정(工程)의 요체는 「생각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하지 말라(勿作增減想)」 다섯 글자에 있을 뿐이다. 「생각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하지 말라」만 하면 선(禪)을 행하는 것도 가하며 시선(市禪)도 가할 것이다.

만일 「생각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하지 말라」의 요체를 이행하지 못하면 아무리 10년의 오랜 세월을 면벽 좌정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하는 데에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적 깨달음의 법문(法門)은 면벽하는 생활에 있음이 아니요, 방편(方便)의 어떠함과 위치의 어떠함을 물론하고 「생각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하지 말라」에 있을 뿐임을 깨달은 동시에 우리 사람의 세상을 구제하는 교화의 첩경이 유교적 현실사회에 존재함을 확연이 깨닫게 된 선생은 불교적 깨달음에 유교적 교화를 아우르려는 결심 아래 적막하고 무료한 금강계(金剛界)를 버리고 세상 티끌에 둘러싸인 한양을 향하게 된 것인 듯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면 불교적 공정은 어떠한 위치에 있던지 「생각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하지 말라」만 하면 쉬울 것이고, 아울러 유교를 오로지 숭상하고 불교를 크게 배척하던 당대 사회에 있어서 유교의 문호(門戶)를 놓고는 현재의 인심(人心)을 지도하고 세상을 구제하려는 이상을 실현하기 곤란함을 깨달은 선생은 마침내 환속하게 된 것이다. 


 

五. 선생의 유교적 생애


그래서 선생은 이로부터 유교적 생애에 헌신함을 확정하였다. 동시에 생을 마칠 때까지의 도우(道友)인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 두 선생과 막역한 교우를 맺고 밤낮으로 도의(道義)를 강마하고 유학을 전력 연구하기에 왕왕히 시공을 초월하고 침식을 잊어버렸다.

그러구러 선생의 연령이 23세가 되자 당대의 석학으로서 선생이 가장 앙모하던 퇴계 이황 선생을 배알하게 되었다. 당시에 퇴계 이황은 선생보다 연령으로도 35세 이상의 선진 어른일 뿐 아니라 학문으로도 과연 학덕이 높은 노학자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의 앙모와 숭배함은 물론이거니와 퇴계 이황도 묘령의 선생을 한번 보매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랜 친구 사이처럼 더할 데 없는 경애의 사귀는 정을 다할 뿐만이 아니었다.

「고매한 재주를 가진 젊은이가 정로(正路 : 유교)를 처음 시작하였다」라 하며, 「그대가 와서 마음을 풀고 얘기를 나누니 심신이 상쾌하다.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도다」라 하여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문인과 교우를 대할 때마다 선생을 찬양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후진 소년일지라도 얼마나 그의 인격을 공경하고 애중히 여기며 재덕을 총애하였음을 알만 하겠도다. 선생도 이로부터 퇴계 선생을 크게 숭앙하는 동시에 전후 십여 차례의 서간과 면담을 통해 「주일무적(主一無適)」 「거경궁리(居敬窮理)」, 「용학집주(庸學輯註)」, 「성학십도」 등의 문제를 들어 왕복하며 논변하였다. 그래서 퇴계 선생의 훈도와 감화를 받음이 적지 않았었다.

선생의 생애는 이로부터 유교 방면에 전적으로 전념하였다. 그래서 침식을 잊어버리며 시공을 초월하고 그것의 철학적 방면에 전심을 다해 연구하기 5, 6년간이었다. 아마 선생의 철학관은 노성(老成)한 시기에 다소의 윤색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 근본적 사상의 토대는 이 시기에 거의 쌓아올려진 듯하도다. 아! 아무리 나이 어린 영재일지라도 그의 위대한 독창적 개척적 이상이 30세 미만의 청년의 두뇌 속에서 건설됨은 참으로 경탄치 아니할 수 없도다.


 

六. 선생의 정치적 생애와 정치적 이상

 

선생의 정치적 생애의 서막은 29세 때에 출세 경로의 첫 과정인 문과를 마침으로부터 전개되었다. 선생의 인격, 식견, 문장, 재능의 발군적 영예가 조야에 진동하므로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 등의 청요직을 차례로 거쳤으나 선생의 천성이 강직하고 고결하여 권신 윤원형의 발호함을 논척하고 당시 사람들이 일시의 편안함을 구하는 것을 비판하며 「병인삼책소(丙寅三策䟽)」, 「기사동호문답(己巳東湖問答)」, 「경오육책소(庚午六策䟽)」, 「갑술만언소(甲戍萬言䟽)」 등 직언을 여러 차례 올려 당대의 폐단을 통렬히 진술하고 개혁을 주창하였다. 이로써 당시에 구습에 빠져있어서 구태의연하고 안일한 군주 선조와 대신 이준경이 그를 꺼리고 싫어하여 나이 어리고 어리석은 청년배의 일 좋아하고 바꾸기를 좋아하는 망상으로 의아해하는 동시에 기꺼이 믿어 맡기지 않으므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물러났다 하면서 권세도 없이 어영부영 10년간에 세월만 흐르고 큰 뜻은 어그러졌을 뿐이오.

선조 8년 을해(선생 40세)로부터 같은 임금 13년 경진까지 전후 6년간에는 동ㆍ서인의 당쟁이 매우 위태로워지므로 그를 조정하는데 분주하여 혹은 김효원(金孝元), 심의겸(沈議謙) 등을 지방으로 내쫓고 혹은 정철(鄭澈), 이발(李潑) 등의 논쟁을 조화하여 옳고 그름을 따져 논란을 분명히 하는데 전력하였으나 마침내 거둔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선조가 점점 선생의 재능을 인식하야 14년(선생 46세) 신사년부터 선생을 크게 신임하여 戶 조 판서, 대제학, 병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의 중직을 연달아 제수하여 국정을 크게 위탁하였다. 그리하여 선생도 또한 임금이 알아주는 것에 감격하여 국가의 일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애쓰기 3년간이었으나 마침내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 등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평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퇴하자 병마(病魔)의 침략을 받아 끝없는 한만 남기고 갑자기 별세하였다.

선생의 정치적 생애로는 앞에 쓴 바와 같이 불우하고 어려운 생애로서 위대한 성공이 없었으나 선생의 정치적 이상은 남긴 저서와 소차(䟽剳)로부터 그 개략적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곧 병인년에 올린 삼책소(三策疏)에는 「마음을 바르게 하여 다스림의 근본을 확립하며, 어진이를 등용하여 조정을 맑게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여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한다」의 세 개의 대책(大策)이 그의 강령이오

기사년 진강(進講)에서의 동호문답에는 「힘껏 실행하여 자기 몸을 닦고, 간사한 이를 분별하여 내쫓고 어진 이를 등용하며, 폐단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제하고, 학문을 장려하고 사람들을 교화시키며 정명(正名 : 명분에 상응하여 실질을 바르게 함. 이를테면 군신이나 부자에게는 그에 어울리는 윤리와 질서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으로 근본을 삼는다」이 그의 주장의 요지이며

경오년의 시무소(時務䟽)에는 「어용(御用)을 줄여 백성의 힘을 펴게 하고, 사전(祀典)을 줄여서 번거롭고 정성스럽지 못한 폐단을 고치며, 관사(官司)를 줄여 쓸데없는 관원을 없애고, 헛된 잡비를 줄여서 국용(國用)을 도우며, 외직(外職)을 중요히 여겨 지방 수령들에게 권한을 맡기고, 억울하고 잘못된 옥사를 풀어 뭇사람들의 마음을 흔쾌히 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오

갑술년의 만언소(萬言䟽)에는 「뜻을 바로 세우고 학문에 힘쓰며 사사로운 사람들을 멀리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 하여 수기(修己)하고, 성심(誠心)을 열어 공안(貢案)을 개혁하고,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선상(選上)을 변통하며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것이 그의 강령이며

임오년의 시폐소(時弊䟽)에는 「세도(世道)는 시속을 따르는 데에서 나빠지고, 공적은 작록만 탐내는 자를 먹여주는 데서 무너지고, 정치는 헛된 논의를 일으키는 데에서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은 오랫동안 쌓인 폐단으로 곤궁해졌다」의 4대 시정 폐단을 들어 격렬히 논하였고

계미년의 육조의(六條議)에는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임용할 것,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재용(財用)을 풍족하게 할 것, 국경 수비를 굳건히 할 것, 전마(戰馬)를 준비할 것, 교화를 밝힐 것」의 여섯 가지 정책을 들어 그것의 실행을 선조에게 강력히 요청하면서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10만의 대병을 양성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마침내 졸렬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원려(遠慮)가 없는 조정 신료들의 반대로 인하여 실행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정론은 군주 전제정치인 당시에 있어서는 유일무이한 정책이며 졸렬한 주위의 속된 무리들의 소견보다는 한층 뛰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마는 현대적 정론가의 안목으로 비평하자면 그다지 놀랄만한 선견지명으로 추앙할만한 점이 적었다.

선생의 장점 곧 우리의 무릎 꿇고 절을 올릴만한 점은 차라리 선생의 정치적 수단보다도 학자적 천재성 또는 정치적 이론보다도 철학적 사상 곧 그것에 있다고 할 만하도다. 그래서 필자는 선생을 독자와 같이 정치적 위인으로 보지 않고 철학적 위인으로 숭배하고자 하는 동시에 찬미함을 뒤로 미루고 이로부터는 선생의 사상적 방면으로 붓 끝을 돌리고자 하노라.


 

七. 선생의 철학적 사상

 

가. 선생 이전의 조선 유가사상의 발달

선생의 철학적 사상을 소개하려면 먼저 조선 유가 사상의 발달된 순서를 들지 아니할 수 없다. 중국에서도 유교의 기원이 선진(先秦) 시대부터 옴은 물론이지마는 유교철학이 정말로 조직되기는 주옹(周顒)ㆍ장융(張融)ㆍ정호(程顥)·정이(程頥)ㆍ주희(朱熹) 등 송유(宋儒)의 손에서 처음 됨과 같이 우리 조선에서도 형식적 유교가 수입된 지는 벌써 몇 천 년 전이며 송유의 학설을 수입한 것도 고려 말의 위인 역동(易東)우탁ㆍ이재(彝齋) 백이정 두 선생의 손으로부터 비롯하여 그로부터 100여 년간에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 정암(靜庵) 조광조 등의 석학이 계속 배출되었지마는, 그는 모두 수입ㆍ해석의 시대로서, 참으로 그것을 음미하고 깊이 연구하여 스스로의 독특한 우주관과 인생관을 조직해내기는 화담(花潭) 서경덕 선생으로부터 비롯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면 개척적이고 자각적인 독특한 사상가로서 송유의 결함과 모순을 제거하고 철저한 유교철학적 우주관을 조직해냈다고 할 만한 이는 서경덕 선생이 처음으로서 퇴계 이황ㆍ 율곡 이이ㆍ 노사(蘆沙) 기정진 세 선생이 순차적으로 계속 배출되었도다.

서경덕 선생은 동방 최초의 독창적 유교철학가로서 그의 사상은 《개벽》 앞 호에 소개함과 같이 철저한 유물론이오 물질불멸론의 세계적 수창자이다.

그러나 그의 뒤를 계승하여 나신 이황 선생은 서경덕 선생의 학설이 너무나 유물론에 치우쳤음을 의아해하는 동시에 정이ㆍ주희의 이기양원론(理氣兩元論)을 이어받아 그들의 결함과 미비점을 개량 또는 보충하여 자신만의 우주관을 만들어내면서 서경덕 선생의 유물론을 맹렬히 반대하였다.

이황 선생의 사상도 물론 《개벽》 앞 호에 소개한 바이지마는 그의 요점을 다시 열거하면 「대체로 사람의 몸은 이와 기가 합하여 태어난다. 그러므로 이와 기 두 가지가 서로 발용(發用)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와 기 양자 곧 심(心)과 물(物) 양자의 선천적 실재임을 단언하는 동시에 후천적 발작(發作) 변화의 세력이 그 호발적(互發的) 작용임을 역설하여 심물양원론(心物兩元論)의 기치를 우뚝 세웠다.

그 결론으로 「도심(道心)은 이에서 발하고 인심(人心)은 기에서 발한다」라 하여 주자의 「혹은 성명(性命)의 바름(正)에 근원하고 혹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긴다」라고 한 이기론(二歧論)에 부응하고 「사단(四端)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라고 하여 우리 사람의 심리에서 사단과 칠정 양자의 호발적 작용을 주장하여 철두철미하게 양원론적 우주관을 세웠다.

우리 사람의 지식적 충동의 요구는 궁극을 궁구하지 않은 양원론에 만족한 위안을 얻지 못함은 왕왕 인도 또는 서양 철학사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 후진 중에서도 고봉(高峰) 기대승 선생이 그것이 궁극을 궁구하지 않은 것임에 의심을 품고 전후 10여 차례 사단칠정론에 대해 서신을 주고받으며 변론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구구하게 요지 이외의 사소한 구절을 포착하여 변론할 뿐이러니 명철하고 정밀한 율곡 선생이 나시매 그것의 철저하지 못한 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에 의문을 품고 심사숙고하기 10여 년에 마침내 그것의 모순점을 배제하여 물리치고 스스로의 독특한 철학관을 세우셨다.

 

나. 선생의 본체론(本軆論)

선생은 서경덕의 유기론을 배척하고 이황의 이기양원론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선생도 실재적 방면으로서는 이기 양자가 이성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의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오묘한 연결처를 증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이라는 것은 기의 주재(主宰)이고, 기라는 것은 이가 타는 바이다. 이가 아니면 기는 근본하는 바가 없으며, 기가 아니면 의지하는 바가 없게 되므로 이미 두 개의 물체가 아니며, 또 하나의 물체도 아니다. 하나의 물체가 아닌 까닭에 하나이면서 둘이요, 두 개의 물체가 아닌 까닭에 두 개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는 것은 왜 그러한가? 이와 기는 비록 서로 떨어져 있지 못하지만 오묘하게 합쳐진 속에서도 이는 이이고 기는 기여서 서로 뒤섞이지(挾雜) 않는 까닭에 하나의 물체가 아닌 것이다. 두 개의 물체가 아니라는 것은 왜 그러한가? 비록 이는 이이고 기는 기라고 하나, 하나로 섞여(渾淪) 간격이 없고 앞뒤도 없고 떨어지고 모이는 것도 없어서 그것이 두 개의 물체로 나뉜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두 개의 물체가 아닌 것이다. 이런 까닭에 동정(動靜)에 단서가 없고 음양(陰陽)에 시작이 없으며, 이가 시작이 없는 까닭은 기 또한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곧 이기 양자의 자성적(自性的) 방면으로 보면 이는 이의 독립적 본성이 있고 기는 기의 독립적 본성이 있어서 아무리 「오묘하게 합쳐져 서로 떨어지지 않는」 중에서도 스스로의 독특한 개성의 실재를 유지함을 증명하는 동시에 서경덕의 「이의 실재를 완전히 부정하고 기의 동정(動靜)과 변화의 부속적 법칙으로 간주」한 사상을 반박하였고

이기 양자의 운행적 방면으로 보면 양자의 운행이 앞뒤가 없고 떨어지고 합쳐짐이 없어서 아무리 이는 이의 독립적 본성, 기는 기의 독립적 본성이 있더라도 그것의 융합함이 「뒤섞여 간격이 없어서」 곧 한 몸에 두 가지 본성으로서 독립적 행동이 절대적으로 없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이황의 「이기호발론」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곧 그것을 총괄하여 말하면 자성적 방면으로는 양원(兩元)이오 운행적 방면으로는 일원(一元)이다. 이것이 곧 양성일체론(兩性一軆論)으로서 스피노자의 일체양면론(一軆兩面論)과 유사한 사상이다. 철학적 연구에 노력하는 자에게는 고금을 막론하고 심물(心物) 양자가 다른 성질을 보이는 현상에 고통을 받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왕왕 과도시기에 이와 같이 일체양성을 주장하여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은 인도에서도 유럽에서도 철학사에서 종종 보는 바이다.

 

다. 이기통국론(理通氣局論) : 이기의 성질론(性質論)

이미 이기 양자가 독립적이고 다른 성질의 존재를 인정한 이상에는 그것의 성질상 차이점이 어떠한가 함이 곧 잇따른 의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은 그것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곧 선생 스스로의 독창적 발명이라 과시하는 「이기통국(理通氣局)」 4자를 부르짖었다. 그래서 「이는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는 까닭에 이(理)는 통하나 기(氣)는 국한된다」라는 명제를 먼저 게시하고 다시 그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가 통한다(理通)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라는 것은 본말이 없고 선후가 없는 것이다. 본말도 없고 선후도 없으므로 아직 감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먼저가 아니며, 이미 감응하였다고 하여 뒤가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기를 타고 유행하는 데에 천태만상으로 고르지 않으나 그 본연의 오묘한 이치는 없는 데가 없다. 기가 치우치면 이도 치우치나 치우친 것은 이가 아니라 기이이다. 기가 온전하면 이도 온전하나 온전한 것은 이가 아니라 기이다. 맑음(淸), 흐림(濁), 순수함(粹), 뒤섞임(駁)과 거르고 남은 찌끼(糟粕), 타고 남은 불기운(煨燼), 썩어 더러운 흙(糞壤),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汙穢) 가운데에도 이가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각각 그의 본성이 되지만 그 본연의 묘리는 그대로이다. 이것을 일컬어 이가 통한다고 하는 것이다. 

기가 국한된다(氣局)는 것은 무슨 말인가? 기는 이미 형적(形迹)에 관계되기 때문에 본말이 있고 선후가 있다. 기의 본체는 담일청허(湛一淸虛)할 뿐이니, 어찌 일찍이 조박(糟粕), 외신(煨燼), 분양(糞壤), 오예(汙穢) 등의 기가 있겠는가. 오직 기가 오르내리고 높이 떠오르며 조금도 쉬지 않으므로 천태만상으로 고르지 아니하여 온갖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이에 기가 유행할 때에 본연을 잃지 않는 경우도 있고 본연을 잃는 경우도 있으니, 이미 그 본연을 잃어버렸다면 기의 본연은 이미 존재가 없어지게 된다. 치우친 것은 치우친 기(氣)여서 온전한 기가 아니며, 맑은 것은 맑은 기이고 탁한 기가 아니다. 조박은 조박의 기이고 외신은 외신의 기여서 담일청허(湛一淸虛)한 기가 아니다. 이것은 이(理)가 만물 가운데에 그 본연의 묘리가 어디에나 있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기가 국한된다고 하는 것이다.」

복잡한 변화의 천태만상의 방면에서도 이의 본연적 성질에는 추호도 변화가 없고 오직 기의 변화와 국한에 따라 위치와 표현뿐 달라지는 것이다. 물(水)의 표현이 아무리 네모나거나 둥근 그릇에 따라 다르고, 공간(空)의 표현이 아무리 크고 작은 병에 따라 다를지라도 물의 본성과 공간의 본성은 추호도 변화됨이 없는 것과 같음을 증명하였다. 곧 우주 만물의 변화가 모두 기의 국한적 변화뿐이오 이의 본성은 어떠한 변화적 위치에 있더라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음으로써 철두철미하게 계통적이고 보편적으로 통하는 것임을 증명하였다.

곧 이(理)는 늘어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태어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보편적 실재성으로서, 기(氣)는 시간에 따라 태어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고 장소에 따라 변화하여 천태만상으로 고르지 않는 국부적 유동체임을 언명하여 이기 양자의 차이점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곧 불교의 진여무명론(眞如无明論)과 유사한 점으로서 선생의 사상이 얼마나 불교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만 하도다.

 

라. 연기론(緣起論)

가장 궁극적인 실재는 이와 기 양자로서 그것의 차이점은 불변적이고 보편적(理通)이며 변화적이고 국부적(氣局)이라고 단언한 선생의 논리상 순서는 물론 그것의 연기론 곧 선천적 실재로부터 후천적 현상계로 향하여 발작 변화됨의 원동력이 어느 쪽에 존재한가 함이 잇따른 의문이 될 것이다. 곧 이와 기 양자가 선천적이고 가장 궁극적인 실재라 할진대 발전 변화하는 후천세계의 원동력이 이에 있을까? 기에 있을까? 또는 이와 기 양자에 동일한 분배로 있을까? 이와 기 양자가 조화적으로 있을까? 함이 가장 큰 의문일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그것에 대한 해답으로

「이는 행위가 없으나 기는 행위가 있는 까닭에 기가 발(發)하고 이가 탄다(乘)」

라고 하여 형이상의 이는 일종 행위도 없고 능력도 없는 성질(無爲無能性)이며 형이하의 기는 일종 행위도 있고 능력이 있는 성질(有爲有能性)이 있으므로 기가 스스로 움직이고 행위하는 발전 변화하는 지경에 이의 「본연의 오묘함」이 따라서 타고 따라서 존재할(隨乘隨在) 뿐이라고 단언하면서 그것을 다시 해석하기 위하여

「기가 발하고 이가 탄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음양(陰陽)의 동정(動靜)에 이르러서는 기틀이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지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 음이 움직이면 이가 움직임(動)에 타는 것이지 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음이 고요하면(靜) 이가 고요함에 타는 것이지 이가 정한 것이 아니다」

라 하며

「천지의 변화와 우리 마음의 발현은 기가 발하고 이가 타지 않음이 없다. 이른바 기가 발하고 이가 탄다는 것은 기가 이에 앞선다는 것이 아니다. 기에는 행위가 있으나 이는 행위가 없어서 그 말이 부득불 그렇게 된 것이다」

라고 하여 우주의 연기적 원동력이 기에 오로지 있다고 거듭하여 설명하였다. 곧 음기(陰氣)의 고요함(靜)과 양기(陽氣)의 움직임(動)은 그 기틀이 저절로 된 것이요, 이의 명령적 부림이 아닌 동시에 음의 고요함(陰靜)과 양의 움직임(陽動)은 곧 음양 2기의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고요함으로서 그 중에 본연의 이(本然之理)가 따라서 타고 따라서 존재(隨乘隨在)하였을 뿐임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만일 이상의 결론과 같을 뿐이라 하면 이는 일종의 행위도 없고 능력도 없는(無爲無能的) 보잘것없는 존재로서 기의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행위하는 독무대에 따라서 타고 따라서 기대는 우상(偶像)일 뿐인 동시에 본체론에서

「이라는 것은 기의 주재(主宰)이고, 기라는 것은 이가 타는 바이다」

라고 하여 이기 양자의 자성적(自性的) 방면으로 이원적 실재임을 긍정한 결론과 저촉이 된다. 이에 그 모순점을 제거하기 위하여

「발(發)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게 하는 것은 이이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거니와 이가 아니면 발하게 하는 것이 없다」

라고 하며

「음이 고요하고 양이 움직이는 것은 그 기틀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나 음이 고요하고 양이 움직이게 하는 소이(所以)는 이이다」

라고 하여 다시 행위가 없고 한갓 타기만 할 뿐인 이(理)에 「소이(所以)」 두 글자의 직임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 「소이」 두 글자의 뜻이 어느 쪽에 존재하는가? 그것이 곧 의문 중의 의문이지마는 그 「소이」 두 글자의 뜻은 명령하여 시키거나 또는 일을 부린다는 뜻이 아니요 옆에서 관찰했을 때의 법칙적 의미인 듯하다. 곧 우주의 발전 변화적 원동력은 기(氣)에만 있을지라도 그 발전 변화케 되는 바의 법칙은 이(理)라 하는 의미인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 본체론에서 주장한 양성일체론(兩性一軆論)에 대한 자가당착의 모순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부득이한 설명으로서 선생의 연기론은 유기적(唯氣的) 일원론이라고 단언할 수밖에 없다. 아무려나 선생의 양성일체적 실재론은 퇴계 이황의 양원론의 영향을 받아 거기에서 일보 전진한 바요, 선생의 유기적(일원) 연기론은 화담 서경덕의 유기론과 불교의 아라야식(阿賴那識) 연기론의 영향을 받은 바가 많은 듯하도다.

그와 동시에 선생은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의 양원적 연기론 곧 우주 발전 변화의 원동력이 이기 양자의 호발에 있다고 주장한 퇴계사상을 맹렬히 반대하였다.

「이와 기 두 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 이미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으니, 그 발용(發用)은 한 가지이므로 서로 발용(互有發用)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서로 발용한다고 한다면 이는 이가 발용할 때에 기가 간혹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고, 기가 발용할 때에 이가 간혹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이와 기에는 떨어지고 합해짐이 있게 되고 앞뒤가 있게 되는 것이며, 동정에 단서가 있게 되고 음양에 시작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착오됨이 적지 않도다」라 하며

「만약 주자(朱子)가 참으로 이와 기가 서로 발용하며 상대하여 각각 나온다고 말했다면 이는 주자 또한 잘못이다」

라고 하여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론을 여지없이 공격하였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퇴계 이황의 순수한 양원론에서 일보 전진하여 양성일체론과 유기적 연기론을 주장한 선생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적 단언이라 할 만하도다.

 

마.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뿌리의 기초가 다르면 두말할 나위 없이 가지와 잎은 물론 맺는 열매도 따라서 다른 것이다. 본체론과 연기론에서 주장이 판이하게 다른 퇴계ㆍ율곡 두 선생의 사상은 사단칠정론에서도 각기 자신들의 특수한 근거에 따라 관찰이 다르게 되었다. 양원적 본체론의 결과로 이기호발론을 주장하던 퇴계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하고 기가 따른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양성일체론의 결과로 유기적 연기론을 주장하던 선생은

「우리 마음의 작용은 곧 천지의 변화이다. 천지의 변화에는 두 개의 근본이 없으므로 우리 마음의 발현도 두 개의 근원이 없다」

라고 하며

「천지의 변화는 곧 우리 마음의 발현이다. 천지의 변화에 만약 이의 변화(理化)와 기의 변화(氣化)가 있다면 우리 마음 또한 마땅히 이의 발함(理發)과 기의 발함(氣發)이 있을 터이다. 천지에 이미 이의 변화와 기의 변화의 다름이 없으니, 우리 마음이 어찌 이의 발함과 기의 발함의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만약 우리 마음이 천지의 변화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

라고 하여 맹렬한 반대론을 부르짖고 그것을 분명하게 해석하기 위하여 다시

「사단은 곧 칠정의 선(善)한 한쪽 측면이요, 칠정은 사단이 모두 모인 것이다. 한쪽 측면으로 어찌 모두 모인 것과 두 쪽으로 나누어 상대할 수 있겠는가」

고 하며

「칠정 외에는 다른 정(情)이 없으며, 사단은 단지 착한 정(善情)의 다른 이름에 불과할 뿐이니, 칠정이라고 말하면 사단이 그 안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여 사단칠정이 곧 동일한 감정으로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개의 물체가 아님을 설명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른바 기가 발하고 이가 탄다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칠정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단 또한 기가 발하고 이가 타는 것이다」

라고 하여 퇴계 이황의 호발적 사단칠정론을 반박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진 것을 본 연후에 측은지심이 일어나는데, 보고 측은히 여기는 것은 기이니, 이것이 이른바 기가 발한다는 것이다. 측은지심의 근본은 어짊(仁)이니, 이것이 이른바 이가 탄다는 것이다」

라 하였다. 이것이 곧 유기적(唯氣的)이고 일원적인 연기론의 안목으로 관찰한 사단칠정론으로서 그와 동시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문제에 대해서도

「혹은 성명의 바름(性命之正)에 근원하고, 혹은 형기의 사사로움(形氣之私)에서 생긴다」

라고 한 주자의 학설과

「도심(道心)은 이(理)에서 발하고, 인심(人心)은 기(氣)에서 발한다」

라고 한 퇴계 이황의 사상에 의거하여 미혹적인 질문을 계속하여 제출하는 우계(牛溪) 성혼의 언론을 여지없이 논박하였다. 그래서 사단칠정의 발용(發用)은 물론이거니와 인심과 도심의 발원 또한 기적 일원(氣的一元)에 있다고 단언하였도다.

 

바. 선생 사상의 장점과 단점

선생의 계통적 사상을 개괄하여 말하면 퇴계 이황이 화담 서경덕의 유기론(唯氣論)에 대한 반동으로 이기양원론(理氣兩元論)을 주장함과 같이 선생도 또한 이황의 철저하지 못한 양원론에 대한 반동으로 양성일체론(兩性一軆論)을 주장한 바이다.

인도와 서양의 철학적 사상발달에서도 자주 볼 수 있듯이 양원론의 뒤에서 일체양성론이 뒤따라 나옴은 우리들의 사상발달에서의 사실이며 순서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사상은 정자ㆍ주자와 퇴계 이황의 사상보다 일층 진보된 사상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체양성론의 결과로 주장한 연기적 일원론의 천지의 변화와 우리 마음의 발원을 물론하고 철두철미하게 일원적이라고 주장하여 이황의 이원적 입각지를 여지없이 파괴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곧 유교 철학에서 한 계단 올라간 진보이며 선생의 사상의 위대하고 빛나는 점이라 할 만하도다.

그러나 그 반면에는 모순과 결점도 또한 적지 않다. 필자와 같은 얕은 견식을 지닌 후학으로 선생의 사상을 비평하고자 함은 두말할 나위 없이 황공한 바이지마는 기왕 붓을 들은 이상에는 나의 생각되는 바를 쓰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선생의 사상에서 가장 결함되는 두 세 가지 점을 들고자 하노라.

(一) 본체론에서는 기(氣)의 자성적 방면으로 독립적 실재성을 긍정하고서 성질론에서는 기에 생멸 변화 또는 차별성을 부여함이 가장 모순된 점이다. 만일 기(氣) 그것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하면 생멸이 없고 변화가 없고 차별이 없을 것이요, 만일 생멸이 있고 변화가 있고 차별이 있다 하면 그것은 실재가 아닐 것이다.

(二) 본체론에서는 이기(理氣) 두 개의 양성일체적(兩性一軆的) 실재론을 주장하고서, 연기론에서는 이(理)는 오직 행위도 없고 단지 탄다고 하여 움직임과 고요함의 변화가 오로지 기(氣)가 스스로 가고 스스로 멈출(自行自止) 뿐인 동시에 「부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함이 두 번째의 모순점이다.

만일 연기적 원동력이 기(氣)에 있을 뿐으로서 이(理)는 행위가 없고 다만 타기만 하는 우상(偶像)뿐이라 하면 이(理)는 물론 사물(死物)이라서 실재가 아닐 것이요, 이(理)가 만일 실재라 하면 연기(緣起)에도 행위가 없고 단지 타기만 하는 우상이 아닐 것이다.

선생은 그러한 자가당착을 변호하기 위하여 「발하게 하는 소이(所以)는 이(理)이다」라고 하며 「음을 고요하게 하고 양을 움직이게 하는 소이(所以)는 이(理)이다」라고 하여 이(理)에 「소이(所以)」 두 글자의 직임을 부여하였으나 「그 기틀이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지 부리는 것이 아니다」 하며 「발하는 것은 기(氣)이다」 하며 「음이 고요하고 양이 움직이는 것은 그 기틀이 스스로 그러하다」 등 말할 때에 벌써 우주의 발전 변화가 기(氣)가 임의적으로 스스로 가고 스스로 움직임(自行自動)으로서 이(理)의 행위가 없고 관여함이 없음(無爲無關)을 표현한 이상에는 「소이(所以)」 두 글자가 아주 무의미하고 헛된 글자에 지나지 못한 바이다. 그러므로 유리론(唯理論)을 주장하던 여사(藘沙) 기정진 선생이 그 점에 대하여 크게 반박한 바이다.

(三) 선생은 서경덕의 「하나의 기가 오래 보존되어(一氣長存)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 아니며(往者不過) 오는 것은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來者不續)」이라 하며 「모여짐과 흩어짐(聚散)이 있으며 있고 없음(有無)은 없다」라고 한 물질불멸론을 반박하기 위하여 「이(理)에는 변함이 없으나 기(氣)에는 변함이 있다. 원기(元氣)는 낳고 또 낳아서 쉬지 않으니(生生不息)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요, 오는 것은 이어지는 것이며, 이미 지나간 기는 이미 존재하는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선생의 가장 잘못된 사상이다.

만일 「지나간 것이 지나간 것이요, 오는 것이 이어지는 것일 뿐이라면 지나간 氣往는 이미 존재하는 바가 없다」라고 하면 「지나간 것은 이미 없어진(滅)」 것이어늘 「오는 것이 어느 곳에서 생긴단」 말인가 함이 가장 의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나간 기가 이미 멸절(滅絶)하였다 하면 끝없이 오는 기(來氣)는 어느 곳으로부터 생겨서 올까 하는 것이 가장 의문이다. 만일 생기(生氣)가 사멸(死滅)한다 하면 순환이 없을 것이다. 순환이 없는 동시에 우주는 사멸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물론 기의 생멸 변화를 긍정한 스스로의 성질론(氣局)으로부터 온 결과이겠지마는 「움직임과 고요함에 단서가 없고 음양에 시작이 없다」라고 하며 「원기(元氣)가 낳고 또 낳아서 쉬지 않는다」라고 한 자기의 사상에도 모순 당착이 되는 바이다. 하물며 물질불멸론을 긍정하는 20세기 안목으로 보면 도리어 서경덕의 사상을 편들지 아니할 수 없다. 동시에 선생 사상의 정견(正見)에 한 가지 허물이 됨을 면치 못함을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도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선생의 37세의 청년시대이며 더구나 정치적 생애에 분망한 시기에 조립한 사상이므로 그와 같은 결점이 없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선생의 천재성으로서 서경덕의 열성적인 노력과 이황의 장수(長壽)를 겸했더라면 그의 사상적인 성취가 참으로 위대하였을 것임을 추측하는 동시에 선생의 위치적 불행(반면으로)과 짧은 생애에 대해 유감스러운 한탄이 없지 않도다.


 

八. 결론


선생은 희대의 대 천재이며 돈후한 군자요, 충성스러운 애국자이며 재치 있는 정치가요 깨끗하고 사리를 꿰뚫는 대 문호이며 예리하고 독창적인 철학가이다. 선생과 필적할 자 그 누구일까? 중국으로는 왕양명, 유럽으로는 괴테를 놓고서는 그와 같이 다종 다방면으로 구비한 인격을 구할 곳이 없을 듯 하도다.

아! 위대하도다. 철인이여? 철인이 병들면 태산도 기울어지며 철인이 없으면 나라도 끊기고 병에 걸린다 함은 옛 사람이 말한 바이다. 철인은 문화 발전의 개척자이며 사회생활의 지도자로서 철인이 일어나지 않으면 역사는 사막이 되며 사회는 방향을 잃고 말 것이다.

아! 500년 세월에 빛이 찬란하고 삼천리 전역에 아름다운 무궁화가 흐드러지게 된 것은 그 누가 준 것이며 그 누구의 공로라 하겠는가? 물론 선생과 같은 대 철인의 개척적ㆍ지도적 문화의 공덕이다. 내 어찌 그를 찬송치 않으며 그를 숭배치 않으랴?

나는 지금 나의 오체를 투지하여 그에게 절을 올리며 붓과 혀를 모두 놀려 그를 찬미코자 하는 동시에 20세기 우리 청년계에서 제2 율곡인 대 철인이 다시 일어나서 우리의 가시밭길과 같은 고생스러운 앞길을 개척하고 암흑과 같은 검은 구름을 흩으려버려 우리의 마음속에 광명의 서광을 다시 주고 우리의 역사에 찬란한 무궁화 꽃이 다시 피게 하여 주기를 빌고 바라면서 글을 그치노라.(끝)

출처 : 주희의 엉성한 이야기
글쓴이 : 버들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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