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漢文書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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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생성은 여섯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한나라 때 허신(許愼)이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序)에서 주례(周禮)를 근거로 하여 육서(六 書)라고 지칭하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 ||
가)상형(象形) : 실체의 형을 본떠서 만듦 : 日 月 山 川 |
이와같이 분류되는 한자는 중국의 전설시대(傳說時代)인 황제시대( 潢帝時代)때 창힐(蒼?)이라는 사관(史官)이 성형문자를 창안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후 상은시대(商殷時代)로부터 周 宣王이전까지(BC2590-827) 갑골문(甲骨文), 金文), 석문(石文), 도문(도문)이 생겼다고 하는데 이러한 문자들을 고문(古文)이라고 칭한다.
그 후 대전(大篆), 소전(小篆)등의 서체가 생기고 그후 한 대(漢代)에 이르러서 예서(隸書), 장초(章草), 초서(草書), 해서(楷書), 행서(行書)등이 순서대로 발생하였다고 한다.
시기는 414년으로 중국에서는 해서가 상용되고 예서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것인 년두루묘지도 해서를 쓴 것으로 보아 역시 해서를 상용하였을 것이며 왕릉에서 예서를 쓴 것은 특별히 정중과 장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생 각된다. 이 예서는 파임과 삐침이 없고 고구려에서 형성된 독특한 서풍을 이룬 자체이다. 얼마전에 발견된 중원비는 글자의 짜임 해는 능비(陵碑)와 공통된 것이 많으나 자체는 해서였고, 년두루묘(年頭婁墓)의 벽서(壁書)는 필력에 박력이 넘쳐흘러 생동함을 보여주었다. 평양석각은 성벽에 있는 것으로 행서인데 자체는 육조(六朝)의 특징을 잘 살린 힘찬 명품이다. 이는 상무적(尙武的) 이고 진취적인 고구려인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나) 백제(百濟)
백제는 서법을 살펴볼 자료가 거의 없는 형편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공주 무녕왕릉의 {매지권(買地券)}과 부여지방에 서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2종 뿐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북조의 문화를 받아 들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남 조와의 접촉이 많았다. 무녕왕릉비는 순수한 남조풍을 띤 명풍이다. 그러나 사택지적비는 북조의 풍미가 있기도 하다.
이로 미루 어 백제는 남북조문화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유려하면서 기품있는 왕릉지(王陵誌)의 필치는 당시의 수준높은 문화 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밖에도, 불상명(佛像銘), 와전명(瓦塼銘) 등이 유물로 남아있다.
다) 신라(新羅)
신라가 본격적으로 중국와 왕래를 시작한 것은 6세기 초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비교적 많은 유적이 금석문(金石文)에 남 아 있다. 율주에 있는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있는 암벽 하부의 마애기(磨崖記)는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인데 법 흥왕 때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진흥왕 때 세운 창녕척경비(昌寧拓境碑)와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3 군데의 순수비(巡狩碑) 가 있으며 진평왕 때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최근에 발견된 단양 적성비가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순수비로서 이 비는 신라에서 한문화를 받아들인 이후 법에 맞는 글자 글씨로 작성된 최초의 작품이다. 문장이 병려체(騈儷體)의 형식을 사용하면서 도 전중건엄(典重健嚴)하여 왕가의 품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였고 글씨도 육조풍을 띠고 있다.
신라의 서법은 자유분방하게 운필 한 가운데에도 장중하면서 유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신라 특유의 유연하고 견인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시대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고구려는 웅건강용(雄健剛勇), 백제는 우아유려(優雅流麗), 신라는 전중질실(典重質實)함을 알 수 있다.
2. 통일 신라 시대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을 전후하여 신라와 당에 의해 망하고 신라가 통일된 왕조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당의 문화 를 받아들이면서 학술, 문화, 정치, 제도 등 모든 분야에서 당의 색채를 띠었다. 또한 당으로 유학을 가는 승려, 관료의 자제들 도 많았으며 그 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 시기에는 서법(書法)도 발달하여 많은 유적을 남겼다. 남 북조시대는 자체가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였기 때문에 그 서풍(書風)이 자유분방하며 고박(古朴)한 맛이 짙어 예술적인 풍격은 매우 높지만 자획(字劃)과 결구(結構)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초의 명가들에 해법( 楷法)의 규범이 정립되었고 서가들이 개성있는 독자적 서풍을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서적으로는 최근에 발견된 사본화엄경(寫本華嚴經)과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전해오는 고문서가 있을 뿐이다. 금석문(金石文)은 상당수가 남아있다. 초기에는 대체로 남북조시대부터 내려오는 왕희지체가 주축을 이루었고 뒤에는 당의 구양 순체를 많이 썼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가로서 제일로 꼽을 수 있는 김생(金生)은 당시 서적(書蹟)으로 남은 것이 없다. 고려 초 기에 와서 그의 글씨를 집각(集刻)한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가 김생의 글씨로 유일한 금석인데, 그의 서법의 전형은 왕희지에서 나왔다 할 것이나, 왕의 글씨는 온화한데 비하여 김생은 그 전서가 유동미(流動美)와 여율감(旅律感)이 생동하는 변화를 여러모 로 살려서 한 획을 긋는 데에도 굴곡과 거세(巨細)를 달리하였다.
또한 자의 결구(結構)에 있어서도 상호조응(相互照應), 음양향 배(陰陽向背)의 묘를 마음껏 섭취하는 등 그의 천재적 예술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말 신품의 세계를 독점하고 있다. 김생의 글씨는 낭공비 이외에 법첩으로 전하는 전유(田遊), 엄산가서(嚴山家序), 당시첩(唐詩帖) 등이 전한다.
말기의 최치원(崔致遠)은 시문(詩文)에서 뿐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도 한 시기를 대표하는 명가(名家)이다. 그의 자선자서(自選自書)인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는 구양순(歐陽詢)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의 도인법사비(道因法師碑)와 비슷한 신품이다.
통일 신라시대는 비록 고려시대에 비하여 양적으로 미치지 못할지라도 격에 있어서는 단연 우리 서예사상 결정에 달한 시기라 할 수 있겠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과거제도가 당에서 도입되었다. 제술(製述)과 명경(明鏡)이라는 두 개의 과(科)를 두었는데 제술(製述)은 시(詩), 부(賦) 등 문학작품으로 응시하는 것이지만 글씨도 따라서 선을 보이게 되므로 서학(書學)의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상황이 었고 이외에 잡과(雜科)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서업(書業)이라는 서사전문직(書寫專門職)이 있어 설문(說文), 오경(五經), 자양( 字樣)의 기본과목 외에 진서(眞書), 행서(行書), 전서(篆書)의 실기과목이 있어서 그야말로 서예의 발전과 보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진적은 극히 드물어 금석(金石)은 비갈(碑喝)과 묘지(墓誌) 등이 많이 남아있다. 이 시대의 서법은 당 초기 대가의 필법을 주로 따랐으며 특히 구양순체(歐陽詢體)가 많았다.
구양순체는 자획이 방정건엄(方正健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데 순간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짐을 용인하지 않는 율법적(律法的)인 서법이므로, 특히 구체(歐體)가 많이 쓰인 듯하다. 고려시대의 명가로는 구족달(具足達), 한윤(韓允), 민상제(閔賞濟), 안민후(安民厚), 임현(林顯), 오언후(吳彦候) 등이 있고 우 세남(虞世南)에 능한 이로서 이원부(李元符), 장단설(張端說) 등이 있으며 이 외에 김원(金遠), 채충순(蔡忠順) 등이 있다.
고려시대 중엽에 이르러 탄연(坦然)(1070 1159)이라는 대서가(大書家)가 출현했다. 탄연은 고승인 동시에 명필가인데 그의 법명 은 대감(大鑑)이고 속명은 손씨이다. 일찌기 유학의 경전에 통하였고 불법에 들어가서 뒤에 왕사(王師)까지 되었다.그는 고승이 었지만 서예로서 그 이름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그의 글씨로는 문수원비(文殊院碑)가 있는데 행서로서 왕희지의 성교서(聖敎書) 와 일맥상통하는데가 있으면서 일면 당대 이후로 전승되어 온 사경풍(寫經風)의 필법(筆法)이 합하여 새로운 일체(一體)를 형성 한다. 그의 서는 유려하면서도 강철같이 굳센 골(骨)이 있다고 하여 김생과 더불어 신품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무렵의 서가로 승혜소(僧慧素)가 있는데 그는 당대로 부터 전해져 온 사경(寫經)에 바탕을 두고 세해(細楷), 대자(大字)에 모두 뛰어났는데 대표적 작품으로서 영통사(靈通寺) 대각국사비음기(大覺國師碑陰記)가 있다.
고려시대 후반 무신난이 일어난 뒤에는 정권이 무인(武人)의 손에 넘어 갔고 문인들은 도피하거나 무인에 붙어사는 처지로 전락 되었다. 그리하여 전반적인 문화, 예술은 퇴보하게 되었고 글씨도 마찬가지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고려말기 원나라와의 밀접한 관계가 생기면서 활발한 교류가 전개되었다.
충선왕은 원의 북경에 만권당(萬券堂)을 지어놓고 있을 때 당시 서가중 최고인 조맹 부와의 교류가 많아서 당시 왕을 따라 원에 간 문인들은 조의 서체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군해(李君孩), 이제현(李齊賢) 같 은 이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말기의 서가로는 예서에 능한 권중화(權仲和), 한수(韓脩) 등이 있었으나 초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려 시대에는 비갈(碑喝)외에도 경판(經板), 사경(寫經)등이 적지 않은데 특히 묘지(墓誌)는 200여점을 헤아리고 있다. 연대로 는 초기에서부터 말기에 이르기 까지 400여년에 걸친 모든 것이 나타나 있어 더욱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묘지(墓誌)들은 일반 비석과는 달리 자유스럽게 행필하여 친말감을 갖게 하고 서체도 다양할 뿐 더러 공굴(工掘)의 차도 심하고 정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시대에 따른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커다란 가치가 있다.
4. 조선시대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는 문화적인 면에서 고려의 말기적 폐단을 척결하고 학자를 우우(優遇)하고 문치(文治)를 국시(國是)로 하여 서(書)의 왕성한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서(書)는 고려시대의 서풍을 이어받아 조맹부의 서풍이 풍미하 였다. 조맹부는 원나라의 서예가로 호를 송설(松雪)이라 하여 그의 서체를 송설체라 하였다. 이는 충선왕때에 직접적으로 그에게 서 배워온 관계도 있고 그의 진적(眞蹟)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그대로 교본이 되었고 법첩(法帖)으로 간각(刊刻)한 것도 적지 않 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정도전, 권근, 황희, 맹사성 등이 있으나 이중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었다. 안평대군은 고려의 계승과 유습(遺習)을 새로운 기운(氣運)으로 쇄신하려는 기세와 고유한 민족기질을 농후케 하려 는데 집중하고 계속적으로 서(書)의 연원을 탐구하는 한편, 진수(眞粹)를 체득하여 구현하려 하였따. 또한 안평대군은 서(書)에 만 능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통달하여 시에도 능하였으며 박식(博識)은 고금에 통철(通徹)하고 도덕과 도량과 풍채에 뛰어났으 며, 사리에 통하여 많은 이의 존경과 귀감이 되었다.
중기에 이르게 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서예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먼저 송설체의 쇠퇴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송설체가 균정미(均整美)에 치중한 결과, 힘이 유약하고 여러가지 자형(字樣)이 판에 박은 듯이 변화가 없기 때문이 다. 그리고 왜란 동안에 많은 힘을 입었던 명나라의 서풍이 많이 받아들여지게 됨에 따라 문징명, 동기창, 축지산 등의 서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유학의 복고사상에 따라 왕희지의 서법으로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 왕희지의 법첩으로 전하는 것은 모두 위작이거나 몇 차례의 모필을 겪은 것이어서 진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기의 서법이 현저하게 쇠퇴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석봉(石峰) 한호(韓濩)를 들 수 있다. 한석봉은 왕희지의 글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 공을 쌓아 능 숙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서품(書品)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 다듬는데 그쳤다. 이것이 그대로 궁궐의 서사정 식(書寫程式)을 이루어 중국에서 말하는 천록체(千祿體)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영향은 오랫동안 후대에 미쳐서 석봉체를 본받은 사람의 수가 많았고 서법이 쇠퇴하게 되었다.
후기의 서(書)를 알아보면 영조 이후에 일어난 자아각성으로 문예부흥적 기운이 농후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의 서(書)는 한국 서예의 원천으로서 또 그 방향과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백하 (白下), 윤순(尹淳)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각체에 능하였고 특히 행서에서는 각 서예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서 스스로 일가 (一家)를 이루었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국의 신진 학자들은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그 곳 학자들과 지식을 교환하는 가운데 많은 지식을 넓 혔다. 서법에 있어서도 청나라의 새로운 사조들을 많이 받아들여 올바른 서법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청대의 학술은 다양하 였으나 주축을 이룬 것은 고증학이었다. 이 때문에 금석학이 발달되었고 전서와 예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특히 비(碑)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졌다. 당시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완원(阮元), 김정희(金正喜), 신위(申緯)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김정희 는 그의 독특한 서체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시대 이래로 한글 서예는 한문 서예에 밀려 그 연구와 발전이 저조했었고 요즈음에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녀자나 글을 모르는 서민들이 쓰는 글로 생각했었고 일제의 수난기를 거친 후에도 사대사상에 밀 려 겨우 명목만을 이어왔었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동양의 전통적 문자 표현의 재료와 도구 및 방법이 급격히 변화됨에 따라 자연히 글씨 를 쓰는데 대한 인식과 가치가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 한글의 예술성과 실용성이 이원화되면서 이른바 한글서예라는 전통적 근 대미술을 배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글서예 근대화의 결정적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금세기의 전반은 일제의 침략과 6.25동란에 다른 미군정의 영향으로 인하여 전통 서예문화에 많은 왜곡과 굴절을 초래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경재적 재건과 더불어 부흥되기 시작한 서예문화는 주로 국전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통하여 급속히 발전한 반면 학교 교육에 있어서는 사실상 형식에 그쳤을 뿐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받침없이 오늘에 이르러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단적으로 공적인 교육기관이나 연구기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80년대 후반에 들어 공적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예관의 건립, 대학에서의 서예과의 신설, 그리고 사회적인 서예학술단체의 활동 은 21세기 한국서예의 확고한 위상정립은 물론 한글 서예계 발전의 획기적 요인이 될 것으로 기대 되나, 현재에는 아직 필체 및 서체의 명칭통일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이르러 내세우는 몇몇 서체명칭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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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김응현: 정음체, 판본체, 정자, 반흘림, 진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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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김일근: 반포체, 효빈체(모방체), 궁체(남필, 여필), 잡체, 조화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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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박병천:
*한글서체-전서체, 예서체, 해서체(정자), 행서체(반흘림), 초서체(흘림)
*인쇄체-판본고체, 판본필서체, 인서체
*필사체-정음체, 방한체, 궁체, 혼서체, 일반체 -
1979 중학 서예 : 판본체, 국한문혼서체, 궁체(정자, 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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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윤양희 : 핀본체, 혼서체, 궁체(정자, 흘림(반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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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김양동: 정음 고체, 언문시체(선비언필체, 궁체(정자, 흘림 진흘림))
위와 같은 분류들은 아직 분류개념 및 분류 위계도 불분명하다.

이상의 분류를 정리하여 한글 고전 자료를 분석해 보면 판본서체에도 전서, 예서, 정자, 반흘림, 흘림체가 있을 수 있고 궁중에 서도 전서체, 정자체, 반흘림, 흘림체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서체형만의 판본체와 정자 흘림체만의 궁체라는 개 념이 고쳐져야 한다. 그런데 한글 고전자료에서 순수한 예서체형의 글씨는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다.
한글 서예는 크게 나누어 훈민정음의 창제와 더불어 생성된 판본체와 궁중에서 체계화되고 여성사회에서 발전시킨 궁체 그리고 가장 긴 생명력을 가지고 독특한 개성을 충분히 살려 우리 민족의 얼과 더불어 오랜 세월동안 숨쉬어온 민체 등으로 구분해 생각 할 수 있다.
한글서체와 한문서체를 비교해 보면 판본체에 있어서 원필과 방필은 한문서예의 전서와 예서에 해당하고, 궁체의 정자와 흘림 은 한문서예의 해서와 행서 그리고 봉서 혹은 서찰은 초서에 해당된다.
판본체는 문자의 효용면에서 그 기능을 다했을 뿐 서예술로서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 판본은 판각된 형태이므로 각공에 의해서 판각되는 과정에서 글씨의 생명력이 상당히 저하되고 판각되기 이전의 원글씨가 지녔던 생동감이 거의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성격이 다소 상실되어 그 형태와 획이 도식적이고 단순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글서예는 판본체의 획의 묘를 살려서 쓴 고체와 궁궐안에서 쓴 궁체 그리고 (서)민체가 있다. 이중에서도 궁체는 한국적 고유미를 가장 잘 표현하고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그 조형미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궁체의 발달은 약 35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필사된 서찰과 서책의 유품에 의해 증명된다. 서찰은 주로 왕후와 상궁 그리고 궁녀들의 필적 인데, 능숙한 필치로 단아하고 자유분방하게 씌여진 것이 그 특징이다. 서책은 궁중의 내서인데 미려하고 우아하며 한결같이 고 르다. 궁체가 발달된 이유는 왕실과 외척사이에 편지 왕래가 잦았기 대문에 봉서를 쓸 기회가 많았으며 또 왕후와 공주의 교양서 로 책을 많이 필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궁중의 문화가 외부로 나와서 귀족계급에 파급되었다. 그리고 한문을 모르던 여성들에게 파급되어 보존되고 닦여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수 있는 궁체가 정제되어졌다.
궁체는 그 글자 구성이 한문 문자에 비해 단순한 만큼 서선내의 함축미와 글씨 짜임에 있어서 고차원의 균형미를 요구한다. 필 법에서 중봉행필을 엄수하고 붓털의 오묘한 탄력을 활용할 수 있을 때 까다로운 궁체의 균형에 틈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궁체는 너무 곡선미가 짙고 여성적이며 지나친 기교로서 미서에 이어지는 흠이 있다. 또한 서법이라는 준비된 질서 속 에 구속되어 일률적이고 개성이 없으며 그 조형성과 예술성의 격조가 낮은 느낌이 있다.
민체는 궁체와 더불어 필사본으로 되어있는 한글류의 책들에서 나타난 서체이다. 이는 서예작품으로 쓴 것이 아니고 소설, 가사 , 서간 등 읽고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이다. 글씨로 쓴 민체는 필사자, 필사연대를 간혹 밝힌 것도 있으나 대부분 명시되 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궁중 이외의 백성들에 의해서 필사되었다는 것과 조선 중기에서 말기에 간행된 것이라는 정도 밖에 추측할 수 없다.
민체의 특징은 각기 개성이 뚜렷하며 자유분방하게 서사(書寫)함으로써 우리민족의 넋과 얼이 살아 있다는 것이며, 고구려의 광 개토왕비와 울진 봉평비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우리민족의 예술성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민체의 형식은 자유롭고 구속됨이 없이 작자의 시간별로 달라지는 슬픔과 기쁨 넉넉함과 배고픔의 뜻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자신의 표현인 즉 통일성, 강조, 균형, 비례, 선, 형태, 재질감, 공간의 환영리 등의 조형성이 잘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민체는 민간에서 정립되지 않은 채 기록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체(體)'라 일컬을 만한 기준이 서 있었다고 보기는 어 렵다는 의견도 있다.우리나라 고유의 민화가 우리서민의 감정과 생활상을 깊숙히 반영하고 있다고는 하나, 이를 하나의 통일된 기준으로 정립된 화풍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조선 중.말기에는 서사상궁의 글씨 쓰기 교육용으로 연습교본이 있었으나 한글 글씨쓰기를 정식으로 교본화 한 것은 1910년에 한서 남궁억이 쓴 신언문체법이 최초인 것으로 알려진다.
1958봄에 갈물 이철경은 갈물 한글 서예 단체를 발족하고 가을에 제1회 갈물한글서예회 회원전을 열었는데 이는 행사 이전에 많 은 후학들에게 한글 궁체쓰기를 지도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59년에 동방연서회(이사장 김충현)가 창립되어 후진양성에 치중하는 한편 서예 특강, 학생휘호대회 등을 통하여 한글 서예 보 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글 서예에 대한 연구는 70년대에 이르러 비교적 깊게 이루어 졌으나 일부인만이 참여하는 실정적인 것인데 반해 80년대에는 많은 서가들이 다양한 형태로 한글서예 교본을 출간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알아본 한글서예에는 많은 과제가 남겨져 있다.
현대문 표기가 가로 행을 하고 있으므로 장법에 있어 가로 쓰기를 연구해 보아야 겠으며, 한글 서예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 는 그 내용이 되는 문학성(국문학)에 대한 연구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조형성(미술)에 대한 이해가 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한글서예는 자칫 조형화하기 쉬운 한문서예에 비하여 많은 과제와 함께 가능성과 장점을 갖고 있는 우리글이다.
라. 中國書藝
- 한자의 기원부터 각 체의 성립까지 -
1. 머리말
인생의 취미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 은 예술을 감상하고 창작하는데 있다고 본다. 서예(書藝)는 고대 중국에서 처음으로 창조된 동양의 문자 - 한자(漢字) - 를 수사 미화(手寫美化)한 정신적 조형예술이고, 다른 외부의 영향이 없이 중국 문화권 특유의 예 술로서 회화와 밀접하게 관련하며 극히 미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 기원은 무릇 5천년, 즉 서양 회화사보다도 오래된 전통 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면, 서예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지혜가 있고 감정표현의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따라 문자( 文字)나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중국에서 일찍 발달했다. 문자(文字)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 최초의 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 서예의 예술성은 순순한 정신을 필묵에 의탁해서 표현하는데, 각 개인의 개성과 지역, 시대에 따라 상이하다. 이러한 상이한 추세와 변화를 알아 보는 것이 서예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중국역사의 시대구분에 맞춰 서예의 역사를 서술해 보고자 한다. 그 대상이 되는 시기는 한자의 기원에서 부터 한나라에 해당하는 각 서체의 성립기까지 다루어 보겠다.
2. 한자(漢 字)의 기원과 문자 자료의 등장 이전
한자(漢字)는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갈고 닦아 내려온 문자이다 . 이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 서예이다. 서예가 중국에서 특수한 예술로서 발달한데는 한자 그 자체가 가지는 특성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한자는 서예의 발달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한자의 기원에서 서예의 출발을 엿볼 수 있으며, 그 변천과정에서 서예의 흐름을 느낄 수가 있다.
1)한자이전
인간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언어 생활을 함으로써 의사의 전달이 비로소 제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말이란 직접 서로 상대해 있지 않으면 할 수가 없 고, 서로 상대해서 말을 주고 받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오래 기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이 말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문자'라는 것이 필요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문자는 이상적인 방법으로 구체화해서 어떤 의사라도 모두 표현할 수 있도록 꾸며져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체적인 방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중국에서는 한자이전에 결승(結繩), 서계(書契), 팔괘(八卦)등이 있었던 것으 로 전해온다. 결승이란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글자 그대로 풀어 쓴다면, 노끈의 맺음이라고 보아진다. 대소(大小), 장단(長短), 다과(多寡)의 매듭으로 의사표현을 했다. 서계란 것도 역시 어떠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書)자는 '쓰다' 또 는 '긋다'의 뜻이 있고, 계(契)는 '새기다'의 뜻이 있으니 서계도 역시 문자이전에 긋고 새기고 해서 수를 헤아리던가 또는 믿 음 의 표시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팔괘는 결승, 서계와는 달리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주역에 전해지 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음양의 변화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의 부호를 기초로 하여 자연물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팔 괘는 어디까지나 그림에 속할지언정 문자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2)창조적인 문자의 정리 (한자의 발명)
황제(黃帝) 시대에는 문물이 점차 번잡해져서 문자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사관 창힐로 하여금 상형문자(象形文字)를 만들 게 하였다. 이 전 설적인 말을 믿을 근거가 없으나, 대개 이 시대에 상형문자의 체계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금수의 발자국과 거북등의 무늬에서 착상하여 초보적인 문자의 체계를 잡았다. 이로써 한자구성의 육법(六法)의 시조를 터 놓았고 여기 서 오늘날 한자의 형 태로까지 변천해 왔다.
3)채색토기(彩色土器)의 발견
문자자료가 등장해서 역사를 조금이나마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은( 殷)나라 22대 반경(盤庚)이라는 왕 이후의 일이다. 앞 에서 얘기된 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어떤 사료도 발견된 것이 없다. 그런데 , 1921년 이래 수년에 걸쳐서 중국의 하남(河南), 산 서(山西), 협서(협西), 감숙(甘肅)의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신석기 유적에서 다수의 채색토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그 당시 에 사용하고 있던 일종의 기호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각입한 채색토기가 이 따금 있다. 물론 어느 것이나 문자라고는 할 수 없 지만,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나 인물, 조수 등을 볼 때 중국 원초의 그림 문자 의 형태를 엿볼 수가 있다. 그림문자는 상형문자보 다도 더 그림에 가깝고 쓰는데 불편하며 간단한 구상물(具象物)밖에 표현할 수 가 없다. 아마도 한자는 문자로서의 이러한 결함 이 있는 그림문자를 추상화하고 단순화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 그림과 글씨도 분화돼 각자의 독자적인 예술로 발전했을 것이다.
3. 문자자료의 등장과 대전(大篆)의 성립
우리가 오늘날 확실히 알 수 있는 중국 최고의 문자는 은왕조(殷王朝)의 것이다. 그 이전의 것은 아직 도 발견되 지 않았다.
1)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
갑골문은 현재 잔존하는 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에 속한다.
1899년 북경 한약방에서 왕의영(王懿榮)과 그의 식객 유악(劉顎)이 발견한 이후 수집과 연구, 발굴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현 재는 상당한 수의 자료가 모아졌다. 연구 결과에서 출토지가 하남(河南)의 안양현(安陽縣) 서북 소둔(小屯)이라는 마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골문은 은인(殷人)이 점복(点卜)에 사용하고, 전쟁, 수렵, 벼농사 등에 관한 복사(卜辭)를 칼로 각한 것인 데, 좌반(左半), 우반(右半)을 대(對)로하여 같은 문자를 각입(刻入)했다. 예리한 칼날로 귀갑(龜甲)이나 짐승 뼈에 새겨 넣었기 때문에 필획이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획은 생략이 많고 안제(按提)가 없다. 그리고 갑골문의 서체나 서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 그 곳에는 몇 가지 다른 유형이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다. 또, 갑골주서(甲骨朱書), 수골묵서(獸骨墨書)등이 최근에 발 견되었음에 비추어 당시에 이미 붓(筆)이 존재하여 필사(筆寫)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갑골문이 처음 발견되고 학자의 관심을 집중하게 한 것은 그다지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 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 왔 지만,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2)금문
*은왕조의 금문
문자자료는 앞서 지적했듯이 은왕조 22대 반경왕 이후부터 등장했다. 이 때는 청동기 시대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 서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많은 동기(銅器)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의 동기는 위로는 조종(祖宗)을 기념하며 아래 로는 유급자손(留級子孫)하기 위해서 주조(鑄造)된 것으로 거의 일상기물이다. 금문이란 이들 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말하 는 것이다. 거의가 은말이후의 각으로 갑골문보다는 뒤에 것으로 갑골문에 비해서 문자로서의 조형이 한층 뛰어나고 또한 필력( 筆力)도 능히 엿볼 수 있다. 또, 은기의 명문은 동시대의 갑골문 보다는 획이 많고 자형(字型)이 복잡하다. 은왕조의 동기에는 명문이 있는 것이 적다. 그리고 이때의 명문은 회화적인 성격이 뚜렷하고 상형(象形) 또는 그에 가까운 것이 많고, 일품(一品)의 잣수가 적다.
*서주(西周)의 금문
은망주흥(殷亡周興)에 미쳐 갑골의 사용은 급격히 쇠하고, 반대로 동기 제작이 성행하여 명문이 갑골과 자리를 바꾸어 문 장기록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주(周)로 와서는 동기제작의 사유도 확대되어 여러 씨족들이 무공, 훈공을 세워서 왕실에서 은상 을 받음을 기념하는 내용 등 세속적인 내용이 동기에 새겨졌다. 그리고 은대와는 달리 명문이 장문화(長文化)되었다.
이 시대의 금문은 초기에는 주(周) 특유의 의례적인 엄숙함이 있는 가운데 은대의 서풍(書風)을 이어 비후(肥厚)함이 있어 생명 의 약동이 보인다. 또, 자체가 차차로 정제되고, 자간, 행간이 정해지고 상하좌우의 자연스러운 구성이 좌우편방의 균형을 가져 오게 하여 자형은 고정화 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접어들수록 점차로 생기를 잃어가고 형식화해 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주(周) 왕실의 쇠퇴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고문의 정리
금문이 통용하던 시대 (서주(西周) 선왕(宣王)때로 추정)에 사관 주가 사주편(史?篇)을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문자를 정연 하고 획일적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서체를 결합, 정리하기 위하여 점획을 증익(增益)하여 혼돈하지 않게 하였다. 이를 주 문이라 하는데, 획이 복잡하고 문체는 방정하다. 주문의 번중(繁重)함은 당시 문자의 필연적인 현상이지 사주가 인위적으로 글 자 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사주'에 의한 문자 정리를 기점으로 그 이전에 통용되었던 모든 서체는 고문(古文)으로 통칭 되 었고, 주문은 진(秦)제국의 서체인 소전(小篆)과 구별하기 위해서 대전(大篆)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4. 서체의 혼란과 문자 통일
춘추 전국시대는 중국에서 이때까지 오래토록 계속되어오던 고대 사회가 크게 변화를 일으킨 시대이다 . 산업의 발달과 상공업의 발흥, 그리고 자유로운 언론의 성행과 이에 따른 제자백가(諸者白家)의 등장 등 사회적, 경제적, 문화 적으로 눈부신 발 전을 이룩했다. 시대의 상황에 걸 맞게 서예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 시대의 서예의 자취는 금문(金文), 석각(石刻), 죽간(竹簡), 백서(帛書) 둥에서 엿볼 수가 있다. 이 때의 금문은 서주 시대 의 금문이 정제되고 고정화되어 가는데 배해서 그와는 역으로 지방적인 특색을 지닌 것으로 분화해가는 경향으로 변화해갔다. 그 자체는 주문(?文)이다. 전국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청동기 문화가 급속히 쇠퇴하고 새로운 철기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동기의 수가 갑자기 적어져서 발견되는 금문 또한 아주 적다.
1) 춘추 전국시대의 석각(石刻)
석고문 이전에 존재했으리라고 여겨지는 석각류들은 신빙성이 낮기 때문에, 석고문을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석각으로 인 정한다. 석고문은 수말 당초(隋末 唐初) (AD 7 C 경)에 섬서(陝西)의 진창현(陳倉縣)의 들에서 발견되었는데, 큰 북의 모양을 한 돌이며 모두 열 개가 있다. 언제 만들어진 것 인지에 대해서는 의론(議論)이 구구하지만 춘추시대말기나 전국시대초기가 유력하 다. 석고문은 사언구로 내용은 인민애물(仁民愛 物)의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글자 크기는 4cm 정도로 주문의 대자(大字)를 볼 수가 있다. 자체는 주문으로서 동기의 명문 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필획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돈되어 있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곳이 있어 주문에서 소전으 로 옮겨가는 동안의 변화를 읽을 수가 있다.
또, 이 시대의 석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조초문(조楚文)이다. 전국시대 진(秦)의 혜문왕(惠文王) 12년 [B.C. 313]에 각입된 것 으로 내용은 초왕이 여러 번 맹약을 어기어 진나라가 그를 저주한 것이다. 북송때 발견되었으나 곧바로 없어졌으며 원석(原石) 이 없다. 자체의 크고 작은 변화가 한결같지 않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으며 서사체(書寫體)의 맛이 있다. 석고문과는 유사 한 점이 많으나 더 간략하게 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2) 춘추, 전국시대의 죽간과 백서
죽간(竹簡)은 춘추 무렵부터 일반적 으로 서적이나 문서의 기록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실물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근년 에 여기저기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1953 년 호남(湖南)의 장사(長沙)에서 발견된 43편의 전국시대의 죽간과 1957년 하남(河南) 의 신양(信陽)에서 발견된 전국시대의 죽간 과 모필(毛筆), 칼, 죽관(竹管)등 죽간에 문자를 쓰는데 사용된 공구가 바로 그것이 다.
위의 죽간은 전국시대에 초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이들이 죽간을 쓴 것은 은인(殷人)이 갑골에 각(刻)한 것에 비하여 편리하고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체는 고문(주문)에 가깝고, 간편하고 독창성이 풍부하며, 체세(體勢)는 편장(扁長)하고 횡획에는 비수 (肥瘦)가 심한 것이 많다. 필의(筆意)가 이미 한예(漢隸)에 가까워졌고 주문에서 예서에로의 변천을 엿볼 수가 있다. 초의 죽간 에서 진 이전에 이미 예서(隸書)가 싹트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 1954년 6월 장사(長沙)교외의 전국 시 대의 묘에서 좋은 토호(兎毫) 모필이 발견되었는데, 초인(楚人)의 필사용구(筆寫用俱)로 밝혀졌고 그 우수함은 놀랄 만하다. 이 는 죽간에 사용되었으리라 믿어지는데, 모필(毛筆)에 묵(墨) 또는 옻으로 썼음을 알 수가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백서(일명 繪書)는 죽간과 더불어 춘추전국시대부터 일반에서도 널리 사용된 것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유품도 적 지 않다. 1934년 장사 근교의 고묘에서 출토한 초의 백서(帛書)는 둘레에 세가지 색깔로 신물(神物)을 그리고, 가운데는 좌우로 나누어 장편의 문자가 쓰여있다. 이들 문자는 필획이 잘 정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힘차고 일치(逸致)가 있어 옛 맛을 더 해주고 있다.
3) 진(秦)의 소전(小篆) (문자통일)
진은 하(夏), 은(殷), 주(周)의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하고 따라서 서법 도 또한 획일하게 정리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전( 小篆)이다. 서체의 변천은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르기 마련이지만, 소전은 국가 통제상의 필요에서 의식적으로 연구하여 고치고 변화시킨 서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던 고문(古文)을 폐지하고 진나라의 전통서체인 주문 을 약간 간략화하여 새로운 자체인 소전을 만든 것이다. 소전의 구조는 정사각 형에서 장방형으로 되었으며, 획도 처음과 끝의 굵기가 같고, 사이와 포백이 고르고 형태는 좌우가 대칭을 이루었으며 중심을 잡 아서 평행을 이루도록 하였다. 당시의 서체를 전하는 자료로는 각석(刻石)과 와당(瓦當), 권(權, 저울추), 양(量, 되)의 명문이 있다. 또 최근에 발견된 다수의 죽간도 있다.
진의 각석은 여섯 군데에 칠석(七石)이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태산(泰山)과 낭야대(낭야臺)의 두 각석뿐이다. 이들도 훼 손이 심해서, 엄정하고 중후하여 소전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태산각석은 원석에 9자만 있을 뿐이고, 낭야대각석도 글자가 대부 분 뭉그러지고 희미하여 읽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소전의 둥글고 힘차며 중후한 맛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진의 권량명(權量銘)은 소전의 자료로서 청동제 또는 철제의 권(權)이나 양(量)에 각입한 명문(銘文)을 뜻하는 것이다. 진시황 은 도량형의 통일을 위해서 관제(官製)의 원기(原器)를 만들어서 민간에 배포하였고 그릇 옆에 그 취지를 알리는 소서(소書)를 새겨 넣었다. 훌륭한 소전으로 쓰여진 것이기는 하나, 문자도 작고 각석의 문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 점점 간소화되어 필획을 생략, 점진적으로 후대의 예서와 같이 되어버린 것도 있다.
1975년 호북(湖北)의 운몽(雲夢)의 고묘에서 천 점이나 되는 많은 양의 진대 죽간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전서가 차차로 예서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과정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4) 예서의 출현
급속한 인지의 발달은 여러 가지 사무의 복잡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서사(書寫) 기록도 변모해 가야만 했다. 이전 의 대전(大篆)이나 새로 만들어진 소전(진전)에는 아직 상형문자의 특징인 곡선적인 필획이 많기 때문에 서사에 불편하고 비 능 률적이었다. 이에 따라 곡선을 직선으로 바꿔 필사를 쉽 게 하고 그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 예서(隸書)라는 새로운 서체가 생겨났 다. 예서는 소전을 간략화한 것이나, 소전과 같이 국가가 제정한 자체가 아니라 민간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것이다. 그 예서 라는 명칭은, 소전이 국가가 제정한 바른 서체인데 대해 서 예서는 일반 민간에서 사용되던 간략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천하게 취 급해서 '도예(徒隸)의 서(書)'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예서는 전서가 변화된 서체로서 전서에 내포되어 있던 모든 서법이 밖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로부터 해서와 초 서가 발생한 근본이라 할 만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리하여 예서의 필법은 중요하며 모든 서법의 기초가 된 다.
전서의 간략체로서 자연발생한 예서는 진대 이전부터 발생의 징조가 엿보였으며 그런 대로 불충분했던 진을 거치면서 차차로 사 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널리 일반 민간에서 사용되고 한대에는 소전과 위치를 바꾸어 통용서체가 되어 더욱 발전하였다.
5. 예서의 진전(秦篆)과 초서(草書)의 등장
한 제국을 세워 올린 전한 때에는 광대한 국토와 비견되는 문화적인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상 대적 으로 서예에 있어서는 시대에 걸맞는 진전이 없었다. 이 시대의 서예자료는 대단히 부족하다. 앞선 시대에서와 같은 훌륭한 금문 은 전연 그 자취가 없어졌으나, 남아 있는 몇 개의 금문에는 진대의 전서의 풍취가 있고, 또 다른 것들은 모두 옆으로 길어 서 전서와 예서의 중간 형태를 띠었다.
이 시대의 각석은 몇 개가 지금도 전하지만, 아직 전서의 영향을 완전히 탈피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예서로 쓴 것들은 예서의 완성된 형태인 파책이 있는 글씨가 아니다. 이 이외에도 당시의 서예자료로는 거울의 명문이나 동인(銅印)의 문자나 와당의 문자 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둥근 맛을 가진 전서를 도식화한 것이며, 모두 전서의 풍취가 있다.
1) 전한의 한간(漢簡)
금세 기 초두에 들어서 발견되기 시작하여 50년대와 70년대에 많은 양이 발굴된 목간(木簡)류와 백서(帛書)들은 한대의 서 예자료로서 의 서체의 변천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는 것들은 마왕퇴(馬王堆) 1호묘의 한 간(漢簡)과 돈황(敦煌), 누란(樓蘭) 한간, 그리고 거연(居延) 한간이다.
먼저 마왕퇴 1호묘 한간은 문자 자료가 적은 전한대의 글씨로서 서체의 변천기의 중요한 출토품이며, 그 서체의 특징은 결구와 획의 곳곳에 전서의 풍치를 남기면서 상당히 진보된 예서의 필법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전서가 예서로 넘어가는 과도기 의 서체를 아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다음으로 돈환, 누란한간과 거연한간은 기존의 학설을 뒤엎을 만큼 귀중한 자료이다. 이것들에 의해서 파책의 서법이 이미 전한 때 존재하였으며, 예서를 간략화하여 빠르게 쓰는 초예(草隸), 일종의 초서(草書., 장초(章草))가 쓰이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 다. 이 한간들의 내용은 주로 변방의 기록들이므로 초서체가 일반 민간에 널리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의 정식서 체로는 대부분 예서(파책이 있는)가 사용되었고, 일상의 서사체로는 예서의 속서(速書)로 장초(章草)와 초예(草隸)가 쓰이고 있 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한대의 서체에 대한 연구는 돌에 새겨 영구히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에서 엄격하게 쓰여진 한비(漢碑)가 주종을 이루어 왔지만, 한간(漢簡)의 발굴로 그 연구영역은 한층 더 확대된 셈이다. 한간은 대부분 필세가 자연스럽고 억지로 붓을 돌리지 않 았으며 붓으로 쓴 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서 한비와는 대조적인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또 전서에서 예서로, 예서에서 초서 로 변화되는 전환기의 서체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데에서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2) 새로운 움직임
아무리 전한시기 가 서예에 있어서 미약한 시대이기는 하였지만, 그 말기가 되자 차차로 서예가 일종의 예술로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이때까지 의 원시적인 서예 예술시대에서 자각적인 서예술로 옮겨가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의 원제(元帝), 성제(成帝)때 [B.C. 49 B.C. 7] 일반 사회에서도 글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글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 게 되었다. 이는 과거 에 제왕이나 권력자들이 자신의 의도에 의해서 서예술을 이끌어가고, 그 문자를 쓴 당사자도 전문인인 것 에 비추어 볼 때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가 있다. 일반 민간의 관심 고조가 찬란한 후한의 시작을 재촉하고 있다.

후한 시대는 중국서예사 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원시 서예술이 참다운 서예술로 욺겨가는 일대 전환기 이다. 또,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다른 형태의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후한의 전반기 약 120년간은 아직 그 다지 대단할 것은 없었고 그 때의 서예자료로는 각석( 刻石), 석궐(石闕), 마애(摩崖)등의 석각문자가 전한다.
이 때의 각석은 비의 형식을 구비하지 않은 것이 많았으며, 비(碑)라고 지칭하기에는 타당하지 않다. 당시의 서귈은 사천(四川) 과 산동(山東)에 많았으나 마멸이 심한 것이 대부분이고 또 새겨진 문자는 적다. 마애는 천연의 암벽에 직접 문자를 각입하는 것 인데, 이 당시부터 시작되었고 여기에는 자연의 맛이 더욱 돋보인다. 중국의 서예술은 후한의 말기 즉, 환제(桓帝), 영제(靈帝) 때 [147 189]에 눈부신 진전이 있엇고, 이에 따라 본격적인 서예술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 이유는 석비의 유행과 종이의 발 명으 로 대표되는 필기구의 급격한 개량에 의해서다.
1) 석비의 유행
돌에 문자를 새겨 기념하는 것은 주대(周代)에 시작되었지 만, 소위 비(碑)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후한대(後漢代)이고, 말기에 이르러 갑자기 유행하여 많은 유품들이 남아 있다. 비석 의 성행으로 한예의 각석입비(刻石立碑)가 수없이 많아졌다. 특 히 환제, 영제의 연간 [147 189]의 40년간은 그 전성기로 근 2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원석이 백점이상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서예의 발전을 촉구하게 되었다.
비석의 문자로는 한대에 들어와 완성되어 통용서체가 되었던 예서가 새겨졌고, 예서는 예술적으로 점점 그 아름다움을 발휘하였 다. 일반적으로 비석은 인물의 공덕을 표창하여 널리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당시 유교사상의 도덕주의에 기인한 것 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그 문장이나 서법에도 충분한 주의가 기울어져 훌륭한 문장과 아름다운 글씨가 추구된 것은 당연하다. 한 비는 어느 것이나 독자적인 서풍을 가진 뛰어난 것 뿐이고, 전형적인 한예(漢隸)로 쓴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비석의 유행도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처음의 입지취지와는 동떨ㅇ져서 거짓 행적을 기록하는가 하면, 가문을 과시 하는 호화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되자 현제때 [205] 에 석실(石室), 석수(石獸), 비명(碑銘)등의 제작을 모두 금지시켰다.
2) 종이의 발명
서기 105년에 환관인 채륜(蔡倫)이 종이를 발명하였는데, 그동안 실용적으로 문자기록에 사용하던 목간이나 비단 의 단점으 로 인하여 종이는 이것들에 대체하여 서서히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종이를 사용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편리하기 때문에 일반 민간 에 빠른 속도로 번져갔을 것이다. 종이가 발명되면서 척독(尺讀:짧은 편지)에 이를 사용하는 일이 생겼으며, 대체로 여 기에 초 서로 서사를 한 것 같다. 이로써 초서가 종이의 보급과 함계 발달하였는데, 이는 예서가 한비의 유행으로 발달한 것과 맥 락을 같이한다.
3) 서가(書家)의 등장
진 이전에는 글씨의 공졸(工拙)을 비교하지 않았으므로 서학(書學)이나 서법의 설이 없었으나, 한대에 이르러 비석이 성행 하면서부터 글씨의 심미적(審美的) 요구가 이어져 서법의 전승(傳承)에 계통을 찾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전문적 인 서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조희(曹喜)와 두도(杜度)이다. 두 사람은 장제(章帝) [75 88] 때 활동하던 인물이며, 조희 는 전예(篆隸)에 능하고 두도는 초서에 능했다고 한다. 이들 이후에 나타난 서가를 보면 두사람중의 어느 한편에 속해있다. 그래 서 전자를 전예파, 후자를 초서파(혹은 행초파)라 했는데, 전예파는 채옹(蔡邕)이, 초서파는 장지(張芝)가 대표하고 있다. 두세 력으로 구분되어있던 것이 점차로 시대가 지날수록 초서파가 세력을 증대해갔다. 종이의 보급과 함께 초서가 새로운 혁신적인 글 씨로서 일반 민간에서 환영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한대에 서가가 전예파와 초서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남북 조사대의 북파의 비(碑)(예서, 해서), 남파의 첩(帖)(행, 초서)이 두파의 원류가 될 수 있었다는 데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 다.
4) 설문해자(說文解字)
후한때에는 중국 언어학사상 불후의 명저일 뿐만 아니라 고문 연구에 뻬어놓을 수 없는 기초 자료가 되어 서예사에서도 귀 중한 책이 되는 '설문해자'가 편찬되었다. 설문해자는 허신(허愼)이 서기 98년에 초안을 잡아 100년 에 완성하였는데, 모두 14편 으로 9,353자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만든 목적은 학자들의 그릇된 견해를 풀어주고 성인들이 문 자를 만든 신성한 목적을 알 리기 위해서다. 설문해자에는 완전하게, 그리고 계통적으로 소전을 보전하고 있고 당시 통용하던 고 문, 주문 속체(俗體)가 포함 되어 있다. 설문해자는 설문내의 소전과 일부 주문의 형체로 더 오래된 문자를 해독할 수가 있으며, 오늘날 현존하는 고서를 정 리, 주석하는데 있어서도 반드시 갖추어야할 책이다. 또, 서예 자료에 있어서는 갑골복사(甲骨卜辭)와 종정관지(鐘鼎款識)를 연 구할 때, 설문해자의 도움을 받아야 할 뿐아니라 진한이래 간책백서(簡冊帛書)의 정리, 해독에도 설문 해자는 사용된다. 실례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마왕퇴 출토의 백서죽간은 설문해자를 적용하여 해독할 수 있었다.
5) 각 체의 성립
후한대에 들어서자 많은 서가들은 서예의 여러가지 변형체를 발전시켰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오늘날 통용되는 모든 서체 가 성립된 것 같다.
앞서 이야기됐지만, 초서는 진의 예서가 간략화되어서 이룩된 것으로, 원래 한자의 발전으로 인한 자연적인 산물이다. 진대에는 소전을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통용되던 글씨는 오히려 초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돈황의 한간(漢簡)에서 발견할 수가 있 다. 따라서 당시의 초서를 정확히 부른다면 초예(草隸)라고 할 수있으며, 그 후의 초서를 금초(今草)라고 할 수 있다. 후한의 장 제(章帝)때 이르러 초예에 능한 '두도'가 나왔으나 그의 유품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후 '장지'가 초서를 더욱 발전시켜 금초 를 이룩하였다.
또, 한대의 말기가 되어서는 우로 삐치는 파책의 필법이 대단히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싫증을 느끼게 되었 다. 그래서, 전서와 예서의 둥근 맛이 있는 형을 받아들여서 해서를 만들었다. 해서는 예서의 사각형과 정확성이라는 기본 성격 과 장초의 간결성과 속필(速筆)을 결합한 서체이다.
그리고, 해서의 출현과는 전후구분이 어려운 행서가 등장하였는데, 행서(行書)는 후한의 유덕승(劉德昇)이 간편하고 쉽게 쓰고 자하여 만들었고, 예서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난 진보된 형태이다. 예서의 모난 각(角)이 죽었고 운동감과 경쾌한 맛이 가미되었 다. 행서의 획과 자형은 해서와 동일하나 속필로 썼다는 사실이 다르다. 아마도 해서와 행서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 유행했을 것 이고, 해서가 발전하고 분화됨에 따라서 그 변형체는 해서와 행서의 혼합체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서체들은 한대에 이미 모두 만들어졌다. 그만큼 한대 특히, 후한시기는 중국서예사상 매우 중요 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7. 맺 는 말
한자는 중국에서 끊임없이 진보해왔고 발전해 오기를 몇천년, 그러는 동안에 한자는 여러 번의 변화를 가져왔다. 갑골문으로부터 금문, 대전, 소전, 예서, 초서, 해서, 행서에 이르기까지 비록 발전의 속도는 느렸으나 추세로 보아 서는 점점 간단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시대마다의 이러한 추세와 새로운 서체의 출현은 한사람의 힘에 의해서 이 룩된 것은 아니고, 일반민간의 심리 즉, 번잡하고 귀찮은 것은 누구든지 싫어하고 간단하고 알기쉬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 는 인정( 人情)에 의해서다. 새로운 서체의 발명의 근거가 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있어 끊임없이 생각하고 개선해 나가려고 한 다는 점 과 일반 민간들의 잠재력이다. 서예의 긴 흐름속에서도 그것을 이끄는 주체는 일개 특정인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인 것을 알 수 가 있다.
본 글은 문자의 시작부터 다루어 현재 통용하는 서체가 성립되기까지의 긴 서예사의 흐름을 짚어보았다. 물론 이것이 그 모든 것을 포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앞으로 새로운 자료와 연구가 축적된 이론들이 공급된다면 역시 많은 부분들이 수정이 가 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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