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는 平壤城에 도읍하였는데, 이는 "長安城"이다. 산을 따라 굽이가 많고 남으로는 패수(浿水)에 임하고 그 뒤에는 國內城과 漢城이 나란히 있다..." (都於平壤城亦曰長安成.., 南臨浿水復有國內城漢城 隋書81卷,列傳46) 우리의 사학자들은 남쪽에 浿水에 접해 있으니, 浿水는 大同江이고 지금의 북한의 浿水가 그 大同江이고, 그러니 지금의 平壤이 朝鮮, 高句麗의 平壤이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북한은 그들 나름대로 정통성 운운하며 北韓이 高句麗의 계승자라는 것을 만들기 위해 지금의 平壤이 高句麗의 수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朝鮮과 高句麗가 半島에 있었다는 가정(假定)에서 나온 것이고, 浿水의 위치도 지금의 大同江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대동강(大同江)"이란, 여러 개의 강물이 모여서 흐르는 강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위수(渭水)"에 해당합니다. 또, 國內城과 長安城과 漢城이 나란히 있었다는 기록을 봐도 半島에서 지목하고 있는 平壤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압록수(鴨綠水)는 國內城의 서쪽으로 흐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 얼마나 지금의 역사가 엉터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역사 대로라면 鴨綠水는 國內城의 동쪽을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재 사학자들은 이 기록이 잘못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함부로 기록이 틀렸다고 하는 것은 참 우습기까지 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틀렸다는 것인지... 鴨綠水의 물줄기는 白山에서 흘러나오는데, 鴨綠水가에 平壤이 있습니다. 중앙 아시아의 天山으로 부터 흘러나오는 강이 鴨綠水이고, 이 鴨綠水가 험한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흘러가는 곳, 지금의 西安(옛 長安)에서 洛陽으로 흐르는 강을 "압록수(鴨綠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鴨綠水가 험한 산길을 돌아 나오는 곳에 高句麗, 百濟, 新羅가 하나같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北韓의 鴨綠江이 당시의 鴨綠水라면, 鴨綠江 북쪽에 高句麗, 남쪽에 百濟와 新羅가 나뉘어져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지.. 당연히 국사시간에서는 설명안합니다만... 高麗史 현종때의 기록에는 "..... 이 달에 교서 내리기를 高句麗, 百濟, 新羅王陵, 廟堂과 그 소재지 州縣에 영을 내려서 수리를 깨끗이 하고, 나무하기를 금하고, 지나가는 자는 말에서 내려가도록 했다..." 是月敎: "高勾麗新羅百濟王陵廟 令所在州縣修治禁樵採過者下馬." 高麗 현종(顯宗)때라면 현 사학계에서는 高麗가 韓半島라고 하니까 北韓의 鴨綠江이 高麗의 북쪽 끝인데 高句麗 王陵이 高麗 강역안에 있었는지.. 또, 高麗때까지 관리되었던 삼국의 왕릉이 왜 지금에 와서는 제대로 없는 것인지.. 특히 百濟의 王陵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우리는 통구(通溝)에 있는 고분들을 高句麗 王陵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역사대로 라면 만주지방에는 高句麗 이외에도 女眞族이 세운 金나라, 후에는 後金, 淸나라..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遼나라, 渤海, 그 위치를 모른다고 주장하는 정안국(定安國)등 수많은 고대왕조가 있었는데, 그들의 고분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찌해서 만주에 있는 고분군은 모두 高句麗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까? 만주가 우리땅이 아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장이 高句麗를 반도근처로 한정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주는 백제의 영역이였습니다. 新羅末 신라왕족이었던 김헌창(金憲昌)이 長安에서 반란을 일으켜 長安國을 세웁니다. 그 長安은 어디이며, 왜 長安國이라고 국호를 지었을까요? 지금의 역사대로라면 平壤은 西京 이었을텐데. 당시 高麗의 수도라는 지금의 開城의 북쪽에 위치한 平壤이 어째서 西京이 될 수가 있을까? 北京이면 몰라도.. 東西南北 하나 맞는 것이 없는 것이 지금의 역사입니다. ▲평양 성벽각자 그렇다면, 半島에 있는 지금의 平壤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래의 것은 平壤城 성벽에서 발견된 각자(刻字)입니다. 분명히 "平壤"이 아닌 "漢城"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알고 있는 平壤城에 "漢城"이라고 적혀 있는지..지금의 北韓의 平壤이 高句麗의 수도이자, 高麗의 西京이라면, 과연 900년 왕조 高句麗의 宮城은 어디에 있으며, 王의 집무실은 어디고, 왕비의 거처는 어디에 있으며, 황태자의 거소는 어디인가? 또한, 대신들이 정사를 의논하던 곳은 왜 없는가? 단지 성벽만 있고, 그 성벽에는 이곳이 "平壤城"이라기 보다는 "漢城"이라고 적고 있으니, 과연 이곳이 高句麗의 서울 平壤인가? 아니면, 長安 서쪽에 있는 平壤이라고 하면, 상대적으로 서쪽에 있어 西京인 平壤, 지금도 "西安"이라고 불리는 그곳이 고구려의 서울 平壤인가? 관련 내용<☞ 패수와 서경>
▲北韓의 平壤城에서 출토된 刻字에 대한 발굴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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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울산대체의학봉사회
글쓴이 : 천부쥬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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