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선비, 유학적 이상의 실천 주제 / 정순우 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浩 根 書 堂 2013. 9. 19. 08:56

선비, 유학적 이상의 실천 주제 / 정순우


1. 왜, 다시 선비인가? ……………………………………………………… 67
2. 선비, 그는 누구인가? …………………………………………………… 71
3. 선비의 이상과 삶의 철학 …………………………………………………75

                                                                                                                                     

 

선비, 유학적 이상의 실천 주제
                                                                                                   _ 정순우


1. 왜, 다시 선비인가?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선비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학계와 문
화계는 선비에 대한 다양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근대화 이후 오랜 기
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선비’가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 사회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쉽게 풀기
어려운 시대적 모순과 갈등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 새로운 해답의
한 부분을 선비 문화 속에서 찾고자 한다.
근대화 이후 우리 사회는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으나, 이에 걸 맞는 건강한
공동체 윤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교육도 양적으로는 괄목할 만한

총론편 | 선비, 유학적 이상의 실천 주제 _ 67


성장을 이루었으나, 막상 그 내면의 실상은 참혹하다. 오늘날의 학교는 과
연 어떤 인간형을 길러 낼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광
적인 입시 열 속에 표류하고 있다. 조선조 사회는‘선비’라는 도덕적 집단을
양성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지금의 학교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결여된
체, 단지 무서운 입시경쟁의 볼모로 전락한 실정이다.
그럼 지나간 시대의 선비문화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선비 문화는 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던 것일까?
역사 속에서 선비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절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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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수업 장면
유교적 인격을 상징하나, 동시에 보수적이고 퇴영적인 인물상이라는 부정
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선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기인된다. 그 한 가지
는 조선 성리학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에 기인한다. 18세기 조선의 천재적
시인이었던 이언진굃彦은 주자학이 너무 답답한 인간, 자신의 철학을 말하
지 못하는 속유俗儒만을 양산해 낸다고 질타한다. 말하자면 조선의 선비들
이란 너무 규범적인 인간, 형식 속에 갇힌 재미없는 인간 유형이라는 것이
다. 이언진은 대 놓고“앞 시대의 성인(前聖)이 가던 길을 가지 않아야 비로소
후대에 참 성인이 되리”1라고 갈파한다. 그가 보기에 조선의 선비들이란 스
스로의 주체적 특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범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왕양명의 만인성인설(萬街人都是聖人)을 차용하여 모든 사람들은 이미 성인의
자질을 함유한 양지겵知, 양능겵能의 천부적 품성을 타고 났다는 사실을 강조
하고 주자학적 선비상을 질타한다. 선비에 대한 이언진의 이러한 비판 태도
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개화와 함께 이 땅에 등장한 서구문명은 선비 문화에 대해 오랜 기간 매우
냉담하였다. 개화기 이후, 서구문화의 유입은 전통 문화의 내용과 형식 일
체를 문제시하는 반전통주의反傳統主義의 흐름을 형성하였고 선비도 부정의
대상이었다.2 서구문화에 압도당한 개화론자 중 일부는 조선사회의 후진성
의 원인을‘선비문화’에서 찾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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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는 흔히‘양반’이라는 계급적 개념과 동일시되고, 역사의 진보를
방해하는 수구적 집단으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선비’문화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시대의 사표가 될 만한‘큰 어른’과‘큰 스승’이 급격히
사라지는 역사적 경험을 갖게 되었다. 한국사회는 각자의 이기적 생존 전략
을 정의로 주장하고, 공적인 정의는 급격히 그 힘을 상실하는 문화적 아노
미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각 개인은 스스로가 법의 판관 역할을 하면서 각
자 자기주장만이 선이고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가치의 사유화 현상
(privatization of the good)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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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사회상. 서양 사진사와 신기해하는 사람들
이러한 혼란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사회를 함께 살아 갈 유기체(organic
order)로 이해하고, 각 개인의 도덕적 역할과 기능을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
속에서 찾고자 하는 전체론적 사유(holistic thinking)를 요청한다. 선비 정신
에 대한 재해석이 요청되는 이유이다. 선비문화 속에는 오늘 우리의 상처를
보듬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잉태할 수 있는 인문학적 자산이 풍부하게 녹
아 있다는 사실을 각성할 필요가 있다.


2. 선비, 그는 누구인가?


역사적으로‘선비’라는 개념
은 언제쯤 정착된 것일까? 단재
신채호는 조선 시대 선비의 기원
을 멀리 신라의 화랑, 또는 그 이
전의 상고 시대의 무사에까지 연
결한다.3 그에 따르면, 상고의 수
두 교도의 일단을‘선배’, 혹은
‘선비’라 일컫고, 이것을 이두자
로‘선인仙人’혹은‘선인先人’이라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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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중국 여순감옥 수감시

재의 가설은 상당 부분 학문적인 엄밀성이 결여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역사의 고유성과 선진성을 강조하던 단재가 선비의 개념을 고대사까
지 확장하고자 한 학문적 의욕에서 기인된 것이 아닌가 한다. 통상적으로
선비라는 말의 어원은 한자어‘선배先輩’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4 선비
라는 단어가 한글로 처음 표기된 것은 이미 최초의 한글 기록인『용비어천
가괟飛御天歌』에서비롯된다.『 용비어천가』에서는‘션비’라는단어가 등장하
는데 이는 한자의‘유儒’에 대한 한글 표기어다. 이미 이 시기부터 유(학)와
선비는 동일 개념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 후‘션비’는‘유儒’와 함께
‘사士’를 지칭하는 낱말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조선 초기까지는
‘사士’를‘선비 사’라고 부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사士’를 (됴사朝士)라 했고 그 뜻을‘학문을 해 지
위에 오른 사람’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다가 비로소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서야‘선비 사’의 용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588년에 간행된『석봉천자문
石峰千字文』에서‘사’를‘선비 사’로 부르면서 그 후 안정된 개념으로 정착
되기 시작하였다.5
그러나‘선비’개념에 대한 이러한 자의字意적인 해석도 경청할 만하지만,
좀 더 중요한 문제는‘선비’집단이 조선조 사회에서 차지했던 문화적 의미
라고 할 수 있다. 선비들은 역사적 경험을 축적하면서, 동시에 역사에 능동
적으로 개입하면서 특유의 문화지형을 만들어 내었다. 우선 그들은 조선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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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과정과 일련의 사화士禍를 통하여 정론正걩은 반드시 피력하는 절의의 전
통을 만들어 냈다. 그 첫 물꼬를 튼 인물로 선산을 무대로 하여 영남 사림파
를 태동시킨 길재吉再(1353~1419)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고려에 대한 절의 정신은 이후 영남 사림파들의 정신적인 지향을 결
정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절의 정신은 사승관계를 통하여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사림의 도통의 계
보도가 형성된다. 도통의 계보는 조선조의 선비 정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금석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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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서원. 충남 금산군 부리면, 조선 숙종기에 길재 야은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
선비들은 도통의 계보도를 제시하
면서 누가 과연 올바른 성인의 삶을
따랐고, 누구의 학문이 정학인가를
자리매김 하였다. 그런 점에서 길재
가 권력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지 않
고 지조를 지킨 선비상을 남겼다는
것은 도통의 계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이러한 절의 정
신은 정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정치 성향과 맞물리면서 더욱 확고한
선비 정신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15세기 말부터 급성장한 사림세력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훈구세력에 맞서
는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자임하면서 전제적 왕권에 맞서고자 하였
다. 사림세력들은 이러한 과도한 도덕의지로 인해 사화士禍라는 역풍을 맞
았으나, 의義를 숭상하는 선비문화를 이 땅에 착근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
당하였다. 그런 점에서 문묘의 도통道統을 선초에는 절의節義로, 후대에는 도
학道學으로 정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6
조선조 선비들의 도통道統을 도학道學의 계보로 자리 잡게 한 인물은 퇴계
이황이다. 16세기 퇴계학파의 출현은 사림파들이 확실한 자기 정체성을 확
보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는 한국사회에 독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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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영정. 정홍례 작, 1750년경

선비 문화를 만든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퇴계가 생전에 가장 심혈을 기울
였던 점은 유학의 도통론을 확립하는 문제였다. 그는 주자의 도를 자임하고,
육왕학과 선학禪學에 대한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선비들에게 당대에서 요청
되는 올바른 정학正學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제시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그
는 전대 조선 유학자들, 예컨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양촌 권근, 점필제
김종직 등의 선현에 대해서도 도학에 근거한 냉철한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퇴계의 노력은 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발아한 보편이론으로서의 성리학을 조선 사회
의 특수한 조건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해 보고자 한 것이다. 조선 사회에 가
장 적합한 엘리트층으로서의 선비상을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3. 선비의 이상과 삶의 철학


성인聖人을 향한 구도의 길
모든 선비들의 이상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본성本然之性을 되찾아 참된 나를
회복하고, 마침내 성인聖人의 세계에 다
다르게 되는 것이다. 선비들은 일상에

총론편 | 선비, 유학적 이상의 실천 주제 _ 75

          장현광의 영정. 영천시 입암서원, 1633년


서 성인을 본받는 것法聖賢을 제일 큰 미덕으로 삼는다.
유자들은 삶의 목표를 내성외왕內聖外王에 둔다. 즉, 안으로는 성인의 세계를
꿈꾸고 밖으로는 왕도정치를 실현하여 유가적 유토피아를 이루는 것을 최
후의 목표로 삼는다. 장현광이“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스스로 천지
사이의 사업을 담당해야 한다.”7고 한 것은 성인의 세계를 지향하는 유자들
의 마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선비들은 성인됨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였기에, 단순한 지식의 축적은
매우 낮은 단계의 공부로 여겼다. 이것저것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
니라 무엇을 아는가 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선비들은 지식과 덕德을 분리
하지 않고 언제나 통합된 형식으로 이해한다. 공부하는 행위가 곧 덕성을
쌓는 일이었다. 선비들의 공부는 지혜로운 인간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지식의 형식을 흔히‘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공부가 삶과 분리된 상태에서, 파편화된 지식을 주워 모으는 것과는 대비
된다. 지금의 학교교육에서 지식이 덕성과 분리된 채 따로 떠돌아다니는
것은 데카르트적 사유에 근거한 근대 문명의 폐해다. 인격의 참다운 실현을
위한‘참 공부’를 퇴계는 이렇게 정의한다.
선비의 학문의 목표는 오늘날의 학문은 자신을 위할 따름이다. 이른바
‘자신을위한다.’는것은장경부의이른바,‘ 아무런작위가없으면서저절로

76 _76 _ 경북의 유학과 선비정신


그러한 것’이다. 예를 들면, 깊은 산 수풀이 무성한 가운데, 한 떨기 난초가
피어 있다고 하자, 하루 종일 맑은 향기를 토하건만, 난초 자신은 그것이
향기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군자가 하는, 자신을 위한 학문이란
뜻에 정확하게 합치된다.8
선비들은 산 속의 한 떨기 난초처럼 맑은 향을 스스로 내뿜는 군자가 되기
를 원했다. 군자는 성인의 길로 나아가는 선비를 일컫는다. 선비들은 꿈꾸는
‘성인’이 되기 위한 학습의 과정, 즉 공부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유학
적 공부론의 핵심은 일상생활에서 삶의 의미(굊)를 투철하게 이해하고, 그
앎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에 있다. 선비는 성인을 꿈꾸면서 부단히 극기
복례克己復禮하는 인물이다.
선비는 극기복례를 실현하여 마침내 인간과 세계의 합일을 지향한다.
따라서 유가의 공부론은‘존천리尊天理거인욕去人欲’의 논리체계 위에 자리
하고 있다. 즉 마음 속에서 환하게 밝은 하늘의 참 뜻을 회복하고, 어느 순간
불쑥불쑥 일어나는 개인적인 욕망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퇴계는,“ 성인聖人
이란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어서 순수한 천리가 마음 속에 환히 들어와 있는
상태”9의 인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선비들은 순선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현실세계를
결코 도피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것이 선비들이 불교와 도교의 세계를
배척하는 주요 이유의 하나였다. 선비들은 도와 성인을 지향하는 공부를 하

총론편 | 선비, 유학적 이상의 실천 주제 _ 77


되, 그것이 일상의 세계를 결코 벗어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공부론의
핵심은 평범한‘일상日常’의 세계와‘도道’의 세계를 어떻게 연결하는가 하
는 점에 있다.
이렇게 두 세계를 결합하기 위해서는 사욕을 버리고 이 세계를 깨어 있는
의식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수행과 수양이 필요하다. 그 방법이 곧 선비들이
가장 중요시한 경敬공부이다.10
경의 철학을 한 차원 높은 삶의 철
학으로 승화하고, 조선 고유의 철학으
로 이끌어 간 인물이 퇴계 이황이다.
매순간 스스로를 극기하는 경敬의 자
세로 일관한 것이 그의 삶이다. 그는
이러한 종교적인 차원의 수양 속에서
저 높이 있는 상제上帝의 현존을 경험
하였다. 그는 유자들의 올바른 공부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을 이단적인
사상으로 지목하였다. 퇴계가 볼 때, 기존 유학은 노불이나 사장학詞章學, 그리
고 기학氣學등 이단 말류에 너무 많이 오염되어 있거나, 지나치게 공리적功利
的인 경향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영남 선비들의 공부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78 _ 경북의 유학과 선비정신
퇴계의 성학십도 중 제7 인설도
학문적 엄격성은 사림의 성격을 너무 심학적인 성격으로 제한한 한계도 나
타낸다. 선비들은 경세학을 표방하는 여조겸겾祖謙의 절동학파나 실무적 일
을 중시하는 사공학파事功學派등에 대해 그 사상이 정일精一하지 못하다하여
배척하였다. 퇴계학의 이러한 특징이 영남 사림파들에게서‘실학’이라는 학
풍이 등장하지 못한 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영남의 선비들도 국가경영(nation building)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선비란 기본적으로‘천하를 잊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선비
는 세상 밖으로 물러난 은자가 아니라, 항상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을 지니
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선비들의 우환의식憂患意識이라고 한다. 퇴계는 말하
기를,“ 공자가 경쇠를 친 것(擊磬)은 천하를 잊지 못하는 마음(有겘忘天下之心)
에서 친 것이다. 만약 경쇠 소리에 탓하고 원망하는 뜻(怨尤之心)이 들어 있었
다고 한다면, 어떻게 공자를 공자라고 할 수 있으랴.”11라고 하여 선비는 세
상을 걱정하는 우환憂患의식을 지닌 자들임을 말하고 있다.
퇴계의 이러한 정신은 후학인 학봉이나 서애, 혹은 한강 정구에게 연결되
어 임란을 당하여 적극적인 구국활동으로 이어지는 정신적인 계기가 되었
음은 명백하다. 한강에 따르면, 지식인은 모름지기 이윤과 주공처럼 권력을
잡고 나라를 도우며 마음을 세우고 도를 행하는 것을 소임으로 삼아야 할
것을 주장한다.12
특히 한말의 위기상황에서는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던 안동 유림들 속에

총론편 | 선비, 유학적 이상의 실천 주제 _ 79
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순국자와 절의인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은 주목
해야할 사실이다. 이것이 내성외왕內聖外王을 꿈꾸는 선비들의 힘이다.
이렇게 영남의 선비들은 주리철학을 꽃 피움으로써 시공을 초월하는 참다
운 진리를 찾아 나서는 구도자의 길을 자임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상의
순수성을 강조하여 주자학 이외의 타 학설을 거부하는 이른바‘닫힌 철학’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퇴계의 경 철학은 일본에 전달되어 그들의 무사계급으
로 하여금 명치유신을 가능하게 한 사상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영남의
경 철학은 국난을 당하여 향산 이만도, 석주 이상룡과 같은 비범한 인물은 배
출하였다. 다만 시대의 한계로 인해 개화의 새로운 길을 활짝 열어젖히는 열
린 철학으로의 변화를 획득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80 _ 경북의 유학과 선비정신
향산고택. 순국의사 향산 이만도의 옛집
선비, 유가적 휴머니즘의 실현과 한계
서구의 근대 휴머니즘의 사상이 중세의 신 우위의 세계로부터 힘겹게 벗어
난 인간중심의 논리라고 한다면, 동양의 사상은 선진先秦시대 이후 줄곧 인간
중심의 철학이 역사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공자가 지닌 철학사적 의미는 그
가 종래의 샤머니즘적 원시신앙이나 천신사상天神思想등으로부터 인간중심
의 철학으로 과감하게 사고의 전환을 이룬 것에서 우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선비에게 있어 철학함은 곧 피안의 초월세계보다는 차안의 현상세계에,
신에 대한 물음보다는 인간의 문제에, 죽음의 영역보다는 삶의 영역에 관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논어에서‘인仁이란 곧 애인愛人’13이라고 하여 타인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궁극적 가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 휴머
니즘으로서의 유학을 목도하게 된다. 유학에서 인의 실현을 법이나 제도 등
의 타율적 강제력으로 성취하고자 하지 않고 인간내면의 자율의지로 이루
고자 한 점은 인간에 대한 도덕적 신뢰감의 표현이다.
선비들은 유가적 휴머니즘으로서의 인仁의 실현은 종국적으로 개인의 이
기적 욕망을 극복하고 이타적 행위의 실천 속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소인유小人儒와 군자유君子儒의 구별을 확
실히 하고자 하였다. 본능적인 욕구와 이익을 좇는 소인과 의를 살려 나아
가는 군자의 분별(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서원에서의
교육의 목표는 극기복례에 두었다.‘ 극기하여 복례하여야 인이 실현된다(克

총론편 | 선비, 유학적 이상의 실천 주제 _ 81
己復禮爲仁)’14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선비들은 학문을 탐구하는 것 보
다는 사랑(仁)을 실현하는 것이 더욱 귀한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퇴계는 말하기를,“ 학문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오히려 범연히 말할 수 있으
나, 도리를 목표로 한다는 것은 이미 좇을 바를 선택한 것이며, 인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다시 한 단계 친절하고 구체적인 것이다.”15라고 인의 실현을
선비가 지닌 최상의 가치로 삼았다.
그러나‘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의 예의 본질을 과연 무엇으로 규정하고 있
는가 하는 점은 시대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이에 따라‘인仁’의 해석도 다양
한 편차를 드러낸다. 선비문화가 꽃핀 지역은 위계적인 종법사회宗法社會를
근간으로 하는 양반 중심의 계급사회였다. 우리의 전통사회는 예를 종법체
계를 유지시키는 지배이데올로기로 분식하여 왔고, 이것이 유학에서의 인
을 폐쇄적 논리체계 속에 가두는 한계점으로 작용하게 하였다.
유교적 휴머니즘인 인의 실현도 양반 중심의 계급적 한계를 완전히 돌파하
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조선 선비들의 시대적 한계로 지적된다. 그러나 조선
조에도 각성된 선비들에 의해 이러한 중세적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노력들
이 부단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보편적인 인의 실현으로 반상班常의 계급적인
차등을 벗어나고자 한 의지였다. 조선 중기의 현신인 서애 류성룡은“천하의
공공公共한 이치로 말한다면 사삿집 종이라고 해서 국민이 아니겠는가?”16라
는 말을 남기고 있다. 상촌 신흠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초립을 쓴 서민의 시

82 _ 경북의 유학과 선비정신
를 인용하면서,“ 공론은 민간에 있다”17고 갈파한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신
분제가 허물어져 가던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예견된 일이기도 하였다.
반계磻溪유형원은 문벌, 족벌의 혁파를 주장하고, 귀천은 타고 난 것이 아
니라고(天下無生而貴者) 강조한다. 그는 서당을 세우는 것은 오로지 사족만을 위
한 것이 아니라, 천하의 모든 백성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고자 한 것임을 밝히
고 있다.18 그는 노비제에 대해“어찌 사람이 사람을 재산으로 할 수 있겠는
가.”19하고 그 폐해를 통박한다. 성호星湖이익도 비록 천인이라고 하더라도
발군의 재능이 있으면 뽑아 쓸 것을 주장한다.20 그가“우리나라의 노비제는
천하고금에 없다”21 라고 개탄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신분제가 안
고 있던 비윤리성을 극복하고, 계층의 장벽을 허무는 인仁의 실현이 조선조
의 각성된 선비들이 지닌 시대적 과제였고 소명이었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선비문화는 차츰 근대에 걸 맞는 새로운 해석 체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총론편 | 선비, 유학적 이상의 실천 주제 _ 83
반계서당.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집필한 곳,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84 _ 경북의 유학과 선비정신
1이언진『, 松穆館集』, < 居室>
2『독립신문』,제 1권 80호,1896년 10월 8일
3신채호『, 단재전집』권상, 조선상고사.
4이동환「, 선비정신의개념과전개」, 대동문화연구제38집, 2001.
5이성무「, 선비와선비사상」『, 남명학』제17집, 2012.3. 10쪽
6 이성무, 위의 책, 33쪽
7 이성무, 위의 책, 33쪽
8『퇴계언행록』, 권1
9『退溪先生全書』, 卷21, <屛銘發揮>
10정순우『, 공부의발견』, 현암사, 2007.
11『퇴계 언행록』, 권1, 유편
12『寒岡續集』권1, 논 <問牛喘>
13 <걩語> 顔淵篇
14 <걩語>, 顔淵篇
15『퇴계언행록』권2, 유편
16『연려실기술』별집, 제13권, 政敎典故, 奴婢“以天下公共之理言之則私賤獨非國民乎”
17『象村稿』卷34, 答白沙續稿“, 大抵季世危갺之後. 겢多此般民謠. 所謂公걩在草野者是也”
18「磻溪隨걧」, 卷九, 敎選之制上“, 夫旣設곆塾庠則非獨爲士者有敎天下之民無겘敎之人矣”
19「磻溪隨걧」, 卷26, 續篇下奴婢條.
20「星湖先生文集」, 卷三十, 論奴婢.
21 我國奴婢之法天下古今之無所有也一爲臧獲百世受苦猶爲可傷況法必從母役(上揭書, 人事篇卷3, 親屬門奴婢條

출처 :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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