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여행사진] 자운서원과 화석정 이야기...(율곡의 흔적)

浩 根 書 堂 2016. 3. 28. 07:34
[여행사진] 자운서원과 화석정 이야기...(율곡의 흔적)

 

2007 . 2 . 10 (土)

 

( 자운산 아래 자리잡은 자운서원 전경...) 

 

자료 준비차 황희정승 유적지를 둘러보려고 파주땅을 밟은김에 이율곡의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자운서원과 화석정을 찾아 나섰다.

 

( 자운서원 입구 정문 자운문...)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 5-1번지에 있어서 통일로에서 문산 IC로 빠져 나오

면서 잘 되어있는 이정표만 보면 쉽게 찾을 수가 있다.

 

( 자운서원 입구에 있는 설명서...) 

 

자운산 자락에 넓직하게 자리잡은 자운서원(紫雲書院)은 광해군(光海君) 7년(1615년)

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 선생(栗谷 李珥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

하기 위해 지방유림들로 하여금 창건되었다.

 

( 율곡 기념관...팔각정 모양의 2층 건물...) 

 

효종(孝宗) 원년(1650년)에 '자운(紫雲)'이라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그 뒤 숙종(肅宗)

39년(1713년)에 그의 후학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현석(玄石) 박

세채(朴世采 1632~1695) 두 분을 추가로 배향해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 율곡 기념관 현관에 있는 율곡과 신사임당 유품 안내판...) 

                              

그러나 조선 후기 고종(高宗) 5년(1868년)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毁撤 : 헐어 내어 걷어 버림)되어 빈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있다가 1970년 유림들

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1973년 경내 주변을 정화하였다.

 

       ( 자운서원 정문,외삼문...양 옆의 느티나무는 수령 360년 20m 높이의 느티나무다... )           

 

경내 건물로는 팔작지붕(네귀의 추녀가 위로 휘어 오르기 때문에 외관상 가장 위용있게

보이는 지붕)으로 된 사당(祠堂)과 삼문(三門)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 자운서원 묘정비...)

 

( 묘정비 설명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높은 대지위에 세워져 있다. 사당내부에는 이이

선생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가을에 열리는

율곡문화제 행사때 제향을 올리고 있다.

 

( 자운서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정면 측면 3칸 규모의 사당...) 

                

최근에 사당 아래에 강당과 동재, 서재,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 자운서원 주강당...)

 

( 자운서원 처마 단청과 360년 수령의 느티나무의 조화...)

 

( 자운서원 왼쪽 돌담 주위의 고풍스러운 모습...)

 

( 율곡 이이선생 신도비 : 향토유적 제6호...)

 

( 이이선생 神道碑 설명서...) 

  

조선중기의 대표적 학자이자 경세가로 알려진 이이 선생은 사헌부 감찰 원수(元秀)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 율곡 초상화...평생 9번의 과거시험에 9번 모두 장원급제해 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짐...)

 

(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 초상화...)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

주는 것을 보았다하여 어릴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하였으며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

龍室)이라 부르고 있다.

 

( 강릉 오죽헌 :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또 신사임당이 율곡을 출산한 곳...)

           

《격몽요결(擊夢要訣)》은 율곡 선생이 42세 때 해주(海州)

석담(石潭)에 있으면서 초학자들의 학문하는 방향을 일러주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책 제목의 격몽(擊蒙)은 「주역(周易)」 몽괘(夢卦) 상구(上九)

효사(爻辭)의 말로, '몽매하여 따르지 않는 자를 깨우치거나

징벌한다' 는 뜻이다.

 

이 내용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율곡전서》

인용하였습니다.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곳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릉

오죽헌이고, 둘째 처가가 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의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栗谷)은 율곡리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

성은 대단히 크다 하겠다.

 

( 철학사상...)

 

( 경제사상...)

 

( 사회사상...)

 

( 국방사상...)                           

    

1564년 호조좌랑이 된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에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사간원대사간, 황해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대제학, 호조 병조 형조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 문학사상...) 

 

율곡선생의 학문은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조선 유학계에 영남

학파의 거두인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며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 주도하여 조선

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율곡의 이러한 학문경향은 정치 경제 교육 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여

경세가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사창설치(社倉設置), 대동법(大同法)실시, 십만양병설

주장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 선견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 선영 입구 연못... 입춘이 지난 2월 겨울 모습...) 

 

( 율곡 이씨 일가 묘역 배치도...) 

 

( 선영 입구 如見門...)

 

( 묘역 오르는 길...) 

 

1584년(선조 17) 음력 1월 16일 49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파주시 법원읍 자운산 기슭의

선영에 예장되었다.

 

저서로는 [학교모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

전서]가 있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의 자운서원(紫雲

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파주시 파평면 율곡1리 100-1번지...

 

( 화석정...경기도 유형문화제 제61호...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 글씨...)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도달하니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그 임진

왜란 당시의 왜군들의 함성과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통하여 많은 고난과 고초를

겪었을 정자의 모습이 안스러워 보이는건 어쩔 수 없나보다...

 

( 화석정과 임진강...)

 

450여년전...율곡이 이곳에서 바로 이 정자 마루에서 수양을 했다는 얘기는 까마득

하고 오로지 현실적으로 눈 앞에 펼쳐진 임진강 상류 북한의 모습과 참상들이 눈앞을

아른거려 현기증을 느낄 정도다...

 

( 벼랑 아래 임진강은 오늘도 말없이 흐른다...) 

 

그 당시 율곡이 주장한 십만양병설을 선조가 받아들여 국력을 강하게 하였더라면

선조가 이 강을 건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역사는 이어져 구한말의 아픈 역사에

의하여 오늘의 현실은... 눈 앞에 보이는 저 북녁땅을 못밟고 있지 않는가  말인다...

 

( 팔작지붕을 한 단아한 화석정...) 

 

이 정자터는 원래 고려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나

자세한 문헌 기록은 없다. 그 후 1443년(세종 25) 율곡의 5대 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이 세운 것을 1478년(성종 9)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몽암(夢庵) 이숙함이 화석정(花石亭)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 느티나무와 화석정과 관광객...)

 

( 큼지막한 예석에 새겨진 율곡의 詩...) 

 

이후 율곡이 6살 때에 외가인 강릉에서 이곳 친가로 와서 이곳 화석정에서 수양을 했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하며 그가 8살에 지었

다는 시가 지금도 화석정 안에 편액으로 걸려있다.

 

( 화석정內 편액으로 걸려있는 율곡의 시...시의 해석 내용은 위 예석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얘기는 유명하나 실은 사실무근이며 다만 율곡을 예언가로

까지 높이 받들려고 하는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믿는 것이 옳을법하다.

 

그 근거로서는, 당시 임금을 모시고 가던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징비록 : 서애 유성룡(1542~1607)지음 , 국보 제132호...]   

 

[.....중략.....나루를 건너 서니 이미 날이 어두워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옛 승청(丞廳)이 있는데, 혹시 왜적이 거기에 있는 재목을 가지고 뗏목을 만들어

건너올까 해서 임금의 명령으로 불을 붙여 태우니 그 불빛이 강 북쪽에까지 비쳐 길을

찾아 갈 수가 있었다.....]

 

또한 선조 [수정실록]등 여러 기록에도 똑같은 기사들이 있는 것으로 보더라도 그러

하다. 뿐만아니라, 실제로 지형 상으로도 동파(東坡)로 건너가는 임진강 나루터와 율곡리

에 있는 화석정과는 서로 떨어져 있어서 상관이 없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화석정앞 주차장 한켠에 다소곳이 있는 간이매점의 모습...)

 

정자에서 임진강을 내려다 보며 꽤나 긴 시간을 흘려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 말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역사도 흐르는 강물처럼 지금도 흐르고 있듯이...

 

대학자의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의 능력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의 후손을 위하여...

 

부끄럽지 않기 위해...

 

영원토록...

 

 

- 끝 -

 

어느날인가 서풍이 부는 날이면
누구든 나를 깨워주오

무명 바지 다려입고 흰 모자 눌러 쓰고
땅콩을 주머니에 가득 넣어가지고
어디론가 먼 길을 떠나고 싶어도
내가 잠 들어 있어 못가고 못보네

그래도 서풍은 서풍은 불어오네
내 마음 깊은 곳에 서풍은 불어오네
아~~ 서풍아 불어라 불어라

 

 

 

 

 

 

      

 


출처 :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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