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고죽과 홍랑의 사랑

浩 根 書 堂 2016. 3. 29. 07:51

고죽과 홍랑의 사랑

  파주군 교하면 다률리(옛 청석리)에는 조선 선조 때 당대의 문장가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 고결한 사랑을 나눈 함경도 홍원(洪原) 기생 홍랑(洪娘)의 묘가 있다. 남존여비사상에 투철한 조선시대에 그것도 혈육 한 점 없는 기생의 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자체가 문학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일이다. 고죽은 세종 때 학자 최만리를 비롯하여 당당한 문벌을 자랑하던 해주 최씨(海州崔氏) 가문에서 태어났고, 또한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가 선생의 손자이다. 이러한 가문에서 일개 기생의 묘를 선영에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올린다니, 홍랑이 어떠한 여인인지는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고죽(孤竹)과 홍랑의 사랑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은 전라도 영암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박순(朴淳)과 양응정(梁應鼎)에게서 글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고, 퉁소를 잘 불었다. 1555년 17세 때 을묘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영암을 포위하고 청년들을 붙잡아 가자, 어린 고죽은 배를 타고 달아났다. 그러나 이내 왜구가 배를 포위하였고, 고죽은 옥퉁소를 꺼내어 '사향가(思鄕歌)'를 불렀다.
마침 달 밝은 밤이라 그 소리를 들은 왜군은 모두 고향 생각에 젖게 되었고, 아울러 신선이 하강한 것으로 착각하였다. 넋을 잃고 듣느라고 포위망이 허술해지는 틈을 타 재빨리 달아나 살아날 수 있었다 한다.

  20대 초반에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최립(崔 )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수창(酬唱)하여 세상으로부터 8대가란 평을 들었고, 또한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었으며, 그의 시는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얻었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정철(鄭澈)·송익필과 삼청동(三淸洞)에서 어울려 세칭 28수(宿)에 오르내릴 정도로 그의 재주는 하늘이 내린 듯하였다.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 을과(乙科)에 합격한 문신이었으나, 급제 후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어 함경도 경성(鏡城)에서 여진족을 무찔렀다. 이 후 1576년 영광군수로 좌천되어 일시 벼슬을 그만두었으나, 1582년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승진하였고, 갑작스런 특진을 대간(臺諫)에서 문제 삼자, 다음해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어 한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종성 객관에서 객사(客死)하였다.

  홍원의 관기(官妓)였던 홍랑(洪娘, 생몰년 미상)과는 고죽이 경성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어 갈 때 잠시 홍원에서 만났는데, 이 때 두 사람은 처음 만나 사랑을 불태웠다. 홍랑은 평소에 시를 즐겨 읊었는데, 그 중에서도 고죽의 시를 몹시 좋아하였다. 마음 속으로 사모하던 고죽을 만나니 홍랑은 일순간에 사랑에 빠졌고, 고죽 또한 아름다운 미모와 규범있는 홍랑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홍원을 떠나며 그녀를 데려 가려 하였으나, 변방의 막중한 임무를 띠고 가는 그로써 차마 데리고 갈 수 없어 기약만 하고 먼저 떠났다. 초조한 마음에 하루가 열흘처럼 속을 태우던 홍랑은, 마침내 남장(男裝)을 하고 천리 길을 걸어 경성으로 갔다. 서로 그리면서도 보지 못하다 만난 두 사람은 한동안 행복한 시절을 보냈고, 막하(幕下)에서 조석으로 고죽을 돌보아 둘 사이는 어느 부부보다도 짙은 사랑과 믿음이 생겼다.
  휼륭한 공을 세우고도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고죽이 한양으로 불리어 가자, 그녀는 쌍성(雙城)까지 따라가 작별하며 이내 이별이 서러워 시조 한수를 읊었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거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홍랑이 시조를 읊자, 고죽은 이를 한시(漢詩)로 한역하여 서로 나누어 가지며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折楊柳寄與千里人
  爲我試向庭前種
  須知一夜新生葉
  憔悴愁眉是妾身


  쌍성을 떠나 한양에 온 고죽과 3년간 소식이 끊겼다가, 병석에 있다는 소식이 홍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곧 행장을 차리고 그 날로 밤낮 7일을 걸어 낭군에게 당도하여 극진히 병간호를 하였다. 이 때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서로 왕래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그 후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고죽의 벼슬이 면직되자 홍랑은 홍원(洪原)으로 돌아갔다.

  고죽이 진종일 격무에 시달리어 피로한 몸으로 돌아오면 홍랑은 거문고와 노래로 피로를 풀어 주었고, 봄과 가을에는 보약을 손수 달여 건강을 돌보아 주었다. 그러나 고죽의 급작스런 출세를 못마땅히 여긴 반대파의 모함으로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임명되었고, 종성부사로 간 지 1년만에 한양으로 돌아오다 종성 객관에서 객사하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낭군의 죽음이 알려지자 홍랑은 영구를 따라 상경하였고, 파주군 월롱면에 그가 묻히자 홍랑은 무덤 옆에 묘막(墓幕)을 짓고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렸다. 9년간 시묘를 살던 홍랑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죽이 남긴 시고(詩稿)를 정리하여 등에 지고 홍원으로 돌아가 재난을 막았으니, 고죽의 시가 오늘에 전하는 것은 모두 홍랑의 덕이다. 홍랑은 임종할 때에,
  "나를 낭군 곁에 묻어 주시오."
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에 고죽의 후손이 그의 정절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기리어 고죽의 묘 아래에 장사지내었고,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묘를 가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록 시조 한 수만을 남기고 죽었지만, 홍랑의 지순고절(至純高節)과 청아(淸雅)한 성품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전혀 그 빛을 잃지 않고 오히려 광채를 더한다.

  아랫집에 모신 홍랑의 유택
  해주 최씨의 선영과 홍랑의 묘는 청석국민학교 못미쳐(약 60m) 오른쪽 야산에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고죽 시비(孤竹詩碑)는 네모난 기단에 오석으로 세웠는데, 비 정면에는 고죽(孤竹)이 지은 번방곡(蒜方曲)이, 뒷면에는 '홍랑가비(洪娘歌碑)'라 하여 홍랑이 지은 시조가, 측면에는 1981년 문중의 협조로 고죽의 진적(眞蹟)을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밭두렁을 따라 산에 오르면 '해주 최씨 선세제위 이장비(海州崔氏先世諸位移葬碑)'가 있다. 본래 이 묘들은 파주군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는데, 그 곳이 군용지로 징발되어 부득이 이 곳으로 옮겼다는 내용과 해주 최씨로서 벼슬을 한 분에 대한 업적을 적었다.

  이곳에서 두 번째에 있는 홍랑의 묘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이고, 오른쪽에 '詩人洪娘之墓'라는 묘비가 큼직하게 서 있다. 방형의 기단에 오석으로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옥개석을 얹은 묘비는, 측면과 뒷면에 .홍랑과 고죽의 만남에서부터 서로 시를 지어 나눈 일, 그리고 고죽이 죽자 시묘를 살았던 일들이 자세히 적혀 있다.
  묘는 호석 없이 봉분만이 둥근데, 잔디도 잘 가꾸고 모양 또한 예뻐 생전의 홍랑을 보는 듯하다. 가져온 술로 명복을 비니 무덤 위에 피어 있는 온갖 들꽃이 반기며 수줍은 듯 보라색 향기를 뿜어낸다.

  홍랑의 묘 바로 위에는 그가 그토록 사모하던 고죽의 묘가 있다. 묘비에는 '贈吏曹判書 行鐘城府使 孤竹先生 海州崔公諱慶昌之墓. 贈貞夫人 善山林氏 左'라고 쓰여 있는데, 비록 홍랑과 몸은 따로 묻히었으나 혼은 낮이나 밤이나 아랫집에 놀러와 꿈에도 그리던 님과 함께 할 것이 분명하다. 홍랑을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지만, 임씨의 질투는 어떻게 당해낼지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홍랑은 낭군을 혼자 독차지 하지 않고 가끔은 낭군에게 눈을 흘겨 본부인에게도 머물도록 아량을 베풀고 있을 것이다.
  일찍이 고죽은 고려의 시인 정지상이 님을 보내며 읊은 대동강(大同江) 이라는 시를 좋아하여 그 운자를 따서 시를 지었다.

  길고 긴 언덕에는 버들도 많은데 (水岸悠悠楊柳多)
  멀리 있는 조각배에선 채릉가를 부르네 (小船遙唱採菱歌)
  붉은 꽃 떨어지니 가을 바람 일어 (紅衣落盡秋風起)
  날 저문 나룻가엔 흰 물결 이네 (日暮芳洲生白波)


  「사기(史記)」에 '백두여신 경개여고(白頭如新 傾蓋如故)'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백발이 되도록 함께 살아도 남이요, 마음이 통하면 금방 만났어도 정인(情人)이라는 뜻이다.

출처 :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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