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대장부(남이)

浩 根 書 堂 2012. 7. 22. 14:53

 

3. 대장부(남이)

 

 글씨 樂而忘憂

 

 

大丈夫(원명은 北征歌)

                                                                                                          -- 南怡--

白頭山石磨刀盡이요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라                두만강의 물을 말을 먹여 없애리라

男兒二十未平國이면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 하면

後世誰稱大丈夫리오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남이 [南怡 / 1441~1418 ]

 

    이 시는 남이 장군이 백두산에 올라 지은 시인데 웅장하고 기세가 넘치는 시로 장부다운 기백이 잘 나타나 있다 . 그렇지만 이 시가 나중에 후환이 되어 거열형에 처하게 된다.

 

    남이장군은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의 증손자이며, 태종의 외손자로 (어머니가 정선공주貞善公主:태종의 4녀임)태어났으며.  좌의정 권람(權擥)의 사위이다.

    1457(세조3)년 17세의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 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역임하였고, 1466년에는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여, 공조판서거처 1467(세조13)년 이시애의난을 평정하고, 27세의 젊은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평소 남이장군의 영특함과 왕(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견제하던 유자광, 한명회, 신숙주, 강희맹, 한계희등은 남이장군이 역모를 꾀한다고 밀고해 28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남이의 용맹을 높이 평가한 세조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방을 책임지는 병조 판서라는 중책을 맡겼다. 한계희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이 외척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세조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남이를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형조 판서 강희맹과 한계희 등이 남이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해직되었다.

 

    이 무렵 남이는 궁궐에서 숙직을 서다가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무심결에 '옛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했는데, 평소에 남이를 시기하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는 남이가 역적 모의를 꾸민다고 모함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은 서얼 출신으로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등용되었는데, 모사에 능하고 계략이 뛰어난 자였다. 더구나 남이의 유명한 시 男兒二十未(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男兒二十未(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고쳐서 남이는 참수 당한다. 유자광은 그 후에도 자신의 출세와 부귀를 위해 남을 모함하나. 결국은 귀양 가서 소경이 됐으며 궁하게 살다가 죽고 만다.  이 일로 남이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예종은 촌수로 당숙뻘이나 되는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훈구 대신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오자 즉시 병조판서 직위에서 해임시켜버렸던 것이다. 예종은 나약한 몸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남이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고 남이를 제거하고자 했다. 예종은 아버지 세조가 자신을 위해 키워놓은 신진세력을 제거한 셈이다. 이후 신진세력들은 사라지고, 훈구세력들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남이를 전격 처형한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 만에 약관(弱冠.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백두산에 평정비 있는 곳을 몇 번이나 사신을 보내 비문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한결같이 ‘미득국(未得國)’이라고 증언했다. 고문 끝에 남이의 발이 부러졌다.  고통을 못이긴 남이는 이시애 난 평정 때의 대장이자 당시의 영의정인 강순(康純)을 같은 공범으로 지목하여 자백하였다. 강순은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1468년 10월, 남문 외형장 (南門 外刑場)으로 가는 수레에서 강순이 남이에게   "왜 나를 억울하게 죽게 하느냐" 고 묻자,  

"당신은 영의정 자리에 있고 나이 80으로 함께 평정을 간 부하의 억울함을 보고도 몸을 사려 한마디 변호도 하지 않은 불의를 범해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다.

 

    남이가 젊을 때 길을 가다가 보니까, 한 처녀가 상자를 보자기에 싸서 가는데, 그 보자기 위에 하얗게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남이가 그 소녀를 따라가니, 소녀는 한 재상(宰相)의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집안에서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남이가 물으니 재상 딸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이가 말하기를, 자신이 들어가서 살릴 수 있다고 말하니, 처음에는 믿어주지 않다가 한 참 후에 들어오라고 허락했다. 남이가 들어가서 보니, 그 귀신이 처녀 가슴을 누르고 있다가 남이를 보고는 달아났다. 그러니까 처녀는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남이가 방에서 나오니 또 처녀가 죽고, 남이가 들어가니까 처녀는 다시 살아났다. 곧장 남이는 그 보자기에 싸여 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으니, 홍시 감인데 처녀가 그것을 잘못 먹어 병이 났고 곧바로 죽었다고 했다. 남이는 자신이 봤던 귀신 얘기를 하고, 귀신 쫓는 약을 구해 와서 귀신을 다스려 처녀를 완쾌시켰다. 이 처녀는 재상(권람)의 넷째 딸이었고, 이렇게 해서 남이와 결혼했다. 딸을 살려준 은혜를 고맙게 여긴 권람은 남이를 사위로 삼았는데, 권부인은 그가 화를 당하기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 400여 년이 지난 1818년(순조18)에 남이는 억울한 누명을 벗고,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뒤에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 용산의 용문사(龍門祠)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남이장군의 시조한수

(이 시조는 남이장군이 이시애의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길에 손수 백두산에 올라 평정비를 세우고 그 비에 새긴 시조로 그 천재성과 기개를 엿볼수 있다.)

 

장검을 빼어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대명천지에 성진이 잠겼에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 볼까 하노라

 

대명천지(大明天地) : 환하게 밝은 세상.

성진(腥塵) : 싸움으로 인한 먼지.

남북풍진(南北風塵) : 남만(南蠻)과 북적(北狄)의 병란

 

장검을 빼어들고 해발 2천 5백 미터를 넘는 백두산에 올라 보니,

환하게 밝은 세상에 싸움으로 인 먼지가 가득히 잠겼구나.

언제나 남만과 북적의 병란을 말끔히 쓸어낼꼬

 

 

   청평댐건설로 섬이 된 남이장군 묘역 남이섬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있는 남이섬은 본래는 섬이 아니었으나 청평댐 건설로 인해 물이 차 만들어진 북한강의 섬이다.  섬의 둘레는 약 6Km이고 넓이는 13만여평인데 섬의 중앙부에 8만여 평의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고 섬 둘레에는 밤나무, 포플러나무 등이 병풍처럼 서 있어 산책하기는 그만이다.  남이섬 선착장에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섬으로 들어가 보면 이 섬의 이름이 유래된 남이장군의 묘소가 있다. 남이장군은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조선조 세조 13년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세조가 죽고 예종이 등극한후 역적으로 몰려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훗날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라는 귀에 익은 시 한수가 남이장군의 시로 전한다. 남이섬에는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밤나무,자작나무,은행나무,단풍나무,소나무등을 심은 숲을 가꾸고 각종 놀이시설, 숙박시설, 동물원, 식물원, 유람선까지 완벽하게 조성하여 종합휴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남이섬은 사계절 자연의 아름다움과 운치를 간직한 곳으로서 젊은이들에게는 낭만을, 연인들에게는 추억을, 가족과 직장인들은 따사로운 정을 듬뿍 담아가는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2002년 TV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내국인뿐만 아니라 일본등 동남아 지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는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출처 : 說文解字(재미나는 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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