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字는 歷史的으로 볼 때, 意味의 集成體인 문화 구조의 심층부에서 강력하게 기능하여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文字를 그 主體的 表現의 장에서부터 절단하여 人爲的으로 制約하려고 하는 시도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反文化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文字는 言語나 마찬가지로 自律性을 가지고 있다. 自律性 속에서만 문자는 언어나 마찬가지로 운동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現代의 法家 부류는 秦始皇帝의 文字統一을 革命의 과감한 偉業으로 칭찬해 마지않는다. 하지만 그의 文字政策에 대한 칭송은 실은, 「秦篆」에 의한 文字統一을 政治的 統一의 성공에 상응한다고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 정책의 방향으로 볼 때는 오히려 復古的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 만일 간략한 글자체가 좋다면, 六國의 古文 쪽이 「篆體」의 글자보다도 훨씬 간략하다. 그 뒤 文字政策에 개입한 사람으로는 則天武后가 유명하다. 이 희대의 垂簾政治家는 스스로 ‘聖母神皇’이라 일컫더니만 마침내 唐나라 황실을 빼앗아 女帝가 되어, 45년에 걸쳐서 專制 權力을 휘둘렀다. 당시 만들어진 「則天文字」는 지금 19자가 전하는데, 그 문자에는 어딘가 주술적 신앙이 기능하고 있었던 듯하다. 본명 武照의 照는 空자 위에 日과 月을 나란히 두어 ●라고 적고, 國은 지역을 限定的으로 표시한다고 해서 그 안을 八方으로 바꾸어 ●이라고 적었다. 뒤의 이 글자는 중국에서는 유통하지 않고, 日本에서는 수이도 미쯔구니(水戶光●)의 이름 때문에 친숙하다. 則天武后는 그나마 한때 취미로 文字를 만들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王安石(1021~1086)은 文字學을 정치 권력의 도구로 삼아서 그 둘을 결합시켰다. 이 新法改革者는 자기 방식대로 경서를 해설하여 『三經新義』를 만들어 그것을 國學에서 교과로 학습하게 하였다. 그는 字形 가운데서 聲符를 인정하지 않고 문자를 구성하는 요소는 모두 意符라고 해석하였다. 이를테면 ‘覇’의 윗부분은 ‘西’로, “서방은 오행에서 肅殺(만물의 죽음)을 주관하니, 그것이 곧 覇者가 하는 일”이라고 풀이하였다. 어떤 사람이, 覇의 윗부분은 西가 아니라 雨라고 주의를 주자, 이번에는 “패자는 時雨가 萬物을 變化시키듯 百姓을 休息하게 하는 자”라고 누누이 설명하여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로 정견이 없는 이야기이다. 사실은 覇는 동물의 시체가 비바람에 노출되어 변색해서 표백한 자국을 남기는 것을 말한다. 비에 노출될 때에는 覇라고 하고, 해에 노출될 때에는 暴이라고 한다. 시신을 魄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覇는 雨 아래에 革을 적는 글자였다. 그러다가 뒷날 달빛을 가리키게 되어 月을 추가한 것이다. 王安石의 新法을 비판하였던 蘇東坡는 자주 王安石의 文字說을 야유하였던 것 같다. 王安石은 “竹鞭을 말에 가하는 것이 篤(독실하다)이다.”라고 하였는데, 蘇東坡는 “그렇다면 竹鞭을 개(犬)에 가하는 것이 어째서 笑가 되는가.”라고 물었다. 또 王安石이 “蘇東坡의 坡는 흙으로 만든 가죽”이라고 말하자, 蘇東坡는 “그렇다면 滑은 물로 된 뼈인가.”라고 되물었다. 지금도 漢字는 漫畵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지만, 그런 사람의 字說은 王安石의 그것과 흡사하다. 한때는 國學에서 가르치던 敎科目이었던 王安石의 字說도 지금은 몇몇 우스개 이야기를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顧野王은 『玉篇』에 1만 6,917자를 수록하고 각각에 대하여 出典이나 訓?를 제시하고 자신의 說을 가하였지만, 그 뒤의 字典들에는 出典도 분명하지 않은 문자가 함부로 증가하여 字數가 쉴 새 없이 증가하여갔다. 宋나라의 『廣韻』에는 2만 6,194자, 明나라의 『字彙』에는 3만 3,179자, 淸나라의 『康熙字典』에 이르러서는 4만 2,174자라고 하는, 전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수가 증가하였다.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의 『大漢和辭典』에 제시된 문자 번호는 4만 8,902로, 최다 자수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 3분의 2는 거의 用例가 없는 불필요한 글자이며, 또 나머지 반수도 사용 頻度數(빈도수)가 극히 낮은 것들이다. 필요한 문자의 실제 수는 대체로 8,000정도라고 보아도 좋다. 그것은 主要한 古典에 사용된 字數들로부터 대개 추정할 수 있다. 주요 古典 가운데 『論語』와 『孟子』의 경우를 보자. 『論語』는 총 자수가 약 1만 3,700자인데, 실제로 사용된 글자 수는 1,355자이다. 『孟子』는 약 3만 5,000자인데, 실제 사용된 글자 수는 1,889자이다. 이 『論語』와 『孟子』에 『大學』과 『中庸』을 합한 四書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된 글자 수는 2,317字이다. 또 經書로서는 『시경』의 총 자수가 약 3만 9,000인데, 사용된 글자의 수는 2,839자이고, 『書經』의 총 자수는 약 2만 5,800인데, 사용된 글자의 수는 2,924자이다. 모두 5,000글자라고 일컬어지는 『老子』에 사용된 글자의 수는 802자에 불과하다. 文學의 예를 들어보자. 李白의 詩는 모두 994수에, 총 자수가 7만 7,000자인데, 실제 사용된 글자는 3,560자이다. 杜甫의 詩는 약 1,500수로, 실제 사용된 글자는 4,350자이다. 기이한 글자를 많이 사용하여 長篇詩를 지은 韓愈는 詩만 약 400수를 남겼는데, 실제 사용된 글자는 4,350자이다. 즉 杜甫에 필적한다. 또 詩를 3,000수 가까이 지은 白樂天의 경우, 詩는 총 字數가 18만 6,000자에 달하지만 실제 사용한 글자는 대략 4,600자이다. 작가 한 사람으로서 사용한 글자의 수가 5,000자에 달한 예가 없다. 漢ㆍ魏ㆍ六朝의 表現主義的인 詩文 가운데 유행하였던 작품을 망라한 『文選』의 경우도, 사용한 글자 수는 단지 7,000에 머무른다. 메이지 이후 일본의 漢字 使用 상황으로 볼 때, 常用하는 글자는 이 3분의1 정도에 불과하다. 교양으로 알아야 할 자수는 약 3,000정도이니, 『廣辭苑』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通用漢字 2,953자가 우선 적당하다고 하겠다. 中國은 국민 교육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文字改革을 懸案으로 삼아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簡體字의 보급을 추진하였다. 中國科學院에서는 한때 字數를 3,200, 常用 1급자 2,067, 2급자를 합하여 3,004字, 나머지는 그 밖의 글자로 두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그 방침으로 文字의 表音性을 철저히 活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極端化하면 저 방대한 文化遺産은 끝내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漢字의 量이 尨大하다는 병통은 權威主義에 빠진 字書들이 쓸모 없는 字數를 자랑하는 바람에 너무 誇張되어 있다. 그러나 讀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얼마 간 知的 모험이나 긴장을 수반하지 않는 책읽기란 讀書란 이름에 값할 만하지 못하다. 日本의 內閣이 고시한 漢字表에는 李白의 李, 杜甫의 杜와 같은 시인의 이름도 없고, 일본의 바쇼(芭蕉)의 芭와 蕉, 부손(蕪村)의 蕪, 오가이(鷗外)의 鷗, 소세키(漱石)의 漱는 물론, 류노스케(龍之介)의 介조차 없다. 內閣 告示表는 固有名詞를 완전히 제외하였기 때문이다. 대체 그 表를 告示한 사람은 이렇게 애당초부터 拘束力을 갖지 않는 表에다 어떠한 권위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일까.
文化는 意味를 集成한 構造로서 蓄積되어, 傳統으로서 機能한다. 文字도 意味를 集成한 構造라는 것은 文字가 文化의 形成과 展開에 土臺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文字와 동떨어져서 文化가 발전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文字의 없고 있음이 未開와 文明을 구분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文字는 그저 언어의 表記手段이 아니다. 文字는 民族의 精神史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文化의 擔持者이다. 漢字는 성립 당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본래의 특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유일한 文字이다. 그런 의미에서 文化의 擔持者인 漢字는 歷史의 通時性을 입증해주는 유일한 證人이라고 하겠다. 이를테면 오리엔트로부터 그리스ㆍ라틴을 거쳐 현대에 이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文字의 創世記에 해당하는 3,000 수백 년 전에 이루어진 자료를 특별하게 飜譯하는 조작을 가하지 않고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漢字로 적힌 資料 이외에 달리 없다. 또 漢字를 사용하는 日本人들은 중국 사람과는 상이한 방법으로, 그러면서도 충분히 自國語로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日本에서 甲骨文ㆍ金文을 연구하는 것은 中國에서 하는 硏究와 水準이 비등할 수가 있다.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대개 漢字가 지닌 通時性 때문이다. 漢字는 歷史라는 이 복잡한 生命體의 大動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日本의 경우 漢字의 國字化는 中國 문헌을 日本語 語法으로 읽는 訓讀法이라는 독특한 수용 방식에서 기원하였다. 訓讀法에 의하여 中國 文獻도 日本 國語의 영역 속에 들어오게 되어, 日本은 文化的 蓄積의 범위를 中國 文獻으로까지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中國의 主要 文獻은, 西洋의 古典學에서처럼, 지난날에는 일본의 독서인 교양의 범위 속에 있었다. 일본인은 중국의 주요 문헌을 국어의 영역 속에 받아들임으로써, 中國의 詩人까지도 쉽게 공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ㆍ다이쇼 시대에는 漢詩ㆍ漢文의 敎養이 文學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漢詩에 한해서만 말하더라도,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은 詩社가 있었고, 新聞이나 雜誌에도 漢詩欄을 둔 것이 많았다. 郭沫若과 함께 創造社를 일으켜 中國 新文學運動의 선구자가 되었던 郁達夫도 일찍이 雅聲社의 핫도리담푸(腹部?風)에게 詩 선정을 요청한 일이 있다. 제2차 世界大戰 이전까지는 여전히 몇몇 詩社가 존재하여 漢詩 創作을 시도하였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지금은 漢詩 創作은커녕, 過去의 體驗을 가지고 漢詩를 서로 이야기할 사람마저 수가 너무도 적어서 적막하기 짝이 없다. 늙은 마르크시스트인 가와가미 하지메(河上肇)의 漢詩를, 譯註를 붙여야 읽을 수 있게 된 시대이다. 中國에서도 民國 5년, 胡適이 文學 改革運動을 일으켜 舊時代의 文學을 공격한 이래, 古典語는 文學語로서의 地位를 상실하였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대담한 文字改革 때문에 字形이 일변하여, 舊文學의 중요한 요소였던 漢字의 美學이 상실되었다. 字形學的인 意味를 지니지 않는 簡體字를 한없이 만드는 것은 그 수만큼 일본 글자인 ‘가나’를 치졸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이 프라그마티즘의 소용돌이 속에서 文字의 規範性도 글씨의 美學도, 모두 상실되고 말 것이다. 民衆을 위해서라고 외쳐대는 文字改革은 결국 모든 文化遺産을 民衆으로부터 隔離시키는 愚民政策으로 전화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白川靜의 『漢字 백가지 이야기』(황소자리)에서 발췌 수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