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근 서당.

[스크랩] 경북의 정체성과 선비정신

浩 根 書 堂 2013. 10. 24. 20:07

경북의 정체성과 선비정신

 

 

장윤수(대구교육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교수)

 

 

 

. 경북지역의 특징

 

1. 인문지리적 배경 : 󰡔택리지󰡕(擇里誌)와 경상도

 

이중환(李重煥)이 지은 󰡔택리지󰡕(擇里誌)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학서로 유명하다. 그는 이 책에서 조선 팔도(八道)의 지리와 인심과 풍속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였는데, 경상도 사람의 기질에 관해서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다. 핵심적인 몇 부분만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이중환은 경상도가 팔도 중에서도 지리적 조건이 가장 좋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인재(人才)의 풍부함을 역설한다. 지리(地理)가 가장 좋다는 언급은 현대적 관점에서는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나, 과거 전통 사회에서 요구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리조건,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갖춘 향반(鄕班)사회 형성과 관련한 조건들을 고려한다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중환은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경상도, 그 중에서도 경북 북부지역에서 장상(將相)공경(公卿)문장(文章)덕행(德行)으로 이름난 선비와 공훈을 세우고 의리를 실천한 인물과, 선교(仙敎)나 불교(佛敎)나 도가(道家) 등의 여러 파가 많이 나와서 인재의 곳간이라고 하였다. 특히 조선에 있어서는 선조(宣祖) 이전에 국정을 잡은 자가 모두 경상도인이었고, 문묘(文廟)에 배향한 사현(四賢) 또한 모두 경상도인이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인조(仁祖) 이후 경기지방의 서인세력을 지나치게 등용하는 것과 이에 반해 영남인재의 활용이 저조함을 한탄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이 지역에 옛 선배들이 남긴 풍속과 혜택이 남아 있어서 민속은 예양(禮讓)과 문물을 숭상하였고,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자가 전국 최고 수준임을 칭송하였다.

한편 좌도(경북)와 우도(경남)를 구분하여 말하기를, 좌도(左道)는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빈곤하여 비록 검소하고 인색하나 학문을 하는 선비가 많다고 평하였다. 반면, 우도(右道)는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여 호사(豪奢)를 좋아하고 게을러 학문에 힘쓰지 않는 고로 신분이 높게 출세한 선비가 적다고 하였다. 특히 그는 예안, 안동, 순흥, 영주, 예천 등 경북 북부지역을 가리켜 ()이 가르쳐 준 복지(福地)’라고 했다. 이 다섯 고을은 서로 이웃하여 가까운 지방인데, 사대부가 가장 많은 지역이며, 모두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인 또는 자손들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지역 사람들은 사람된 의리를 밝히고 도학(道學)을 중하게 여겨 비록 외떨어진 촌락이나 보잘 것 없는 부락에도 글 읽는 소리가 들리며, 해어진 옷을 입고 좁은 창을 내고 살더라도 모두 도덕과 성리학(性理學)을 말한다고 칭송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말싸움을 좋아하는 이 지역 사람들의 풍속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중환은 팔도의 인심을 비교하면서 경상도의 인심을 질실(質實)하다고 보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다. 여기서 질실하다고 하는 것은 진실하다, 순박하다, 정성스럽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인심과 관련하여 대단히 좋은 평가이다. 이중환 자신이 경상도와 별다른 연고를 갖지 않은 타지인이며, 또한 그가 당시 대표적 지식인의 하나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평가는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경북 북부지역 학자들에 대한 일반적 평가와 그다지 차이나지 않을 것이다.

 

2. 자연지리적 배경 : 태백소백산맥과 낙동강

 

영남지역은 태백산맥의 태백산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활모양을 그리며 뻗어내려 충청전라지역과 자연적 장벽을 이루고 있으며, 이 지역의 중앙을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이처럼 양대 산맥에 의한 뚜렷한 경계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 지역을 고립시키고, 또한 그 지역 안쪽은 낙동강의 한 유역분지로 통합되어 독립된 한 지형구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이 지역은 고려시대 이래 경상도라는 한 행정단위로 되어왔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다른 지역과 큰 소통 없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어왔으며 그 나름의 문화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한 곳에 정착해 사는 토착민들이 많고, 그러다보니 생각의 틀도 고정되기 쉽다.

특히 낙동강은 영남문화권 형성의 중요한 여건이다. 이 강은 영남의 중앙부를 관류하면서 그 본류의 전후와 좌우에서 흘러내리는 여러 물줄기를 합류시킴으로써 한 도()로서의 통일성과 일체감을 가져 특색 있는 문화권을 형성하게 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나라 큰 강의 대부분이 두 세 개 이상의 도역(道域)을 거쳐 흐르고, 또한 경기충청전라도는 두 개 이상이 큰 강이 지나가고 있는데 반해 경상도와 낙동강은 서로에게 있어서 유일한 존재이다. 즉 경상도를 흐르는 유일한 큰 강이 낙동강이며, 또한 낙동강은 경상도에서 비로소 낙동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또한 경상도에서 끝나는 그야말로 영남만을 그 유역범위로 하고 있는 강이다. 낙동강의 발원지를 강원도에서 잡고 있기는 하나, 본류를 형성하고 낙동강의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 경상도 상주 이후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낙동강=영남이라는 말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낙동강의 성격은 영남의 문화를 다시 낙동강을 중심으로 경상도를 좌도와 우도와 나누는 기준이 되게 하며, 또한 낙동강 또한 영남인에게 다름 아닌 우리 강이게 하였다. 특히 경북 북부지역은 낙동강을 배경으로 하여 큰 마을을 이루었으며, 조선시대 경북 북부지역을 대표했던 대부분의 명문거족들의 집성촌이 낙동강의 본류와 지류에 자리 잡았다.

태백소백의 양대 산맥이 가져오는 지리적 폐쇄성은 영남과 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문화가 독자문화를 이루게 하는 하나의 조건이 되었으며, 이러한 조건은 후일 이들의 의식을 보수적으로 형성하는 주요소가 되었다. 특히 낙동강은 영남인들에게 있어서 우리 강이라는 의식을 크게 심어주어 이 지역 사람들의 우리라는 동류의식, 연고의식 형성에 일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3. 학문적 배경 : 영남학파

 

한국성리학사에 있어서 영남학파는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통상 영남학파란 영남을 지역배경으로 삼는 학문상의 유파(流派)로서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 남명학파(南冥學派), 퇴계학파(退溪學派), 한려학파(寒旅學派)를 총칭하는 명칭이다.

첫째, 영남사림파란 김종직(金宗直)을 영수(領袖)로 하는 학파로서 고려 말의 대유(大儒)인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학맥을 계승한다. 이 학파는 연산군 시대에 이르러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갈등으로 그 세력이 크게 꺾였다.

둘째, 남명학파란 영남우도(嶺南右道)를 지리적 배경으로 삼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식과 덕행을 존숭하여 이를 추종하던 학파를 일컫는다. 이 학파의 특징적 학풍은 반궁체험(反躬體驗)지경거의(持敬居義)충신진덕(忠信進德)독행수도(篤行修道)로 요약될 수 있다. 조식은 경의’(敬義) 두 글자에 힘을 쏟아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배격하고 󰡔소학󰡕(小學)의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하였다. 제자들 또한 스승의 학덕에 영향을 받아 기절(氣節)과 의리(義理)를 숭상하고 실천궁행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임란(壬亂)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들이 많다.

셋째, 퇴계학파는 영남좌도(嶺南左道)를 지리적 배경으로 삼아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식과 덕행을 존숭하여 이를 추종하던 학파를 일컫는다. 이 학파는 이황을 존숭하고, 그의 철학사상 중에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사칠이기분개설(四七理氣分開說)을 강조하였다. 퇴계 후학들은 자신들의 학통을 강조하기 위해 퇴계학의 심학적(心學的) 특성을 강조했는데, 특히 학봉계에서 이황(李滉)-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도통관(道統觀)을 제기하였으며, 이러한 전통은 17세기 이후 영남학파의 주류로 평가받아 왔다.

넷째, 한려학파(寒旅學派)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학식과 덕행을 존숭하여 이를 추종하던 학자들을 함께 지칭하는 명칭이다. 물론 한강과 여헌 두 사람의 학문적 특색을 한려학파라는 공통적 학파로 묶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엄밀한 의미에서 사제 간이 아니고, 또한 양인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들 간에 동일한 학파로 취급할만한 충분한특징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한강과 여헌 양인이 지리적으로 가까이 살았으며, 또한 양인 간에 상당히 긴밀한 교유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점, 그리고 양인의 학풍은 다른 지역의 학자들에 비해 상당한 접점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문하생들 간에도 밀접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한려학파로 병칭(竝稱)해도 크게 무리가 없으리라고 본다.

 

 

. 퇴계 이황과 선비정신

 

1. ‘선비란 무엇인가?

 

- 우리말 어원으로 선비어질고 지식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다.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선비의 은 몽고어의 어질다는 말인 ‘sait’의 변형인 ‘sain’과 연관되고, ‘는 몽고어 및 만주어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박시의 변형인 에서 온 말이다.

- 선비는 선비다움의 자질과 특성 및 태도가 있어야 가능했다. 선비는 유학자로서 학문과 예술을 기본 소양으로 삼아 수양(修養)을 생활화하여 도덕적 실천능력과 도학(道學)정치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며(박병기), 공인(公人)의 입장에서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하는 이상적인 인간이다(윤사순).

 

- 선비를 판단하는 대체적인 기준은 성리학의 이상적 인간 즉 성인(聖人)이나 군자(君子)가 되고자 노력하는 인물들로서 수기치인(修己治人)과 내성외왕(內誠外王)을 실천한 유학자들을 의미한다. 선비는 학덕과 고매한 인품, 실천(力行)을 중시한다.

- 선비정신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비정신은 성리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상적인 인간을 지향하는 정신이다. 둘째, 선비정신은 완결상태가 아니라 지향성으로서 과정의 상태이다.

셋째, 선비정신은 평생에 걸친 수양과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넷째, 선비정신은 사회적 존재 즉 관계적 존재로서 삶을 자각하고 사회적 역할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과정에 도달할 수 있는 상태이다.

 

2. 선비의 삶 : 퇴계 이황과 경()의 삶

 

- 선비정신을 구현한 퇴계(退溪)에 의하면 성인이 되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며, 궁리(窮理), 성찰(省察), 거경(居敬), 존양(存養)을 초지일관(初志一貫)하게 실천하면 이상적인 성인의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 퇴계에게 있어서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공부는 바로 경()공부이다. 그렇다면 선비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이란 무엇인가?

- 퇴계는 성인을 지향하는 인격형성의 출발에서부터 성인을 성취하는 종결까지 의 수양론을 일관성 있게 적용시켰다. 즉 그는 유가(儒家) 전통에 따라서 성인을 최고의 이상인간으로 보았으며, 성인이 되고자 하는 군자학’(君子學)의 원리를 밝히려고 하였다. 여기서 군자란 인()을 배우고, 사색하며 체인(體認)하는 사람이다. 퇴계는 인()을 체인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적 원리가 바로 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선조에게 올리는 차자(箚子)에서, “이 십도(十圖)는 모두 을 위주로 합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성학십도󰡕9경재잠도(敬齋箴圖)에서는 ()이 성학(聖學)의 시작과 끝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 퇴계 또한 주자의 경우처럼, 거경(居敬)과 궁리(窮理)가 서로 머리와 꼬리의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상호 유기적 관계임을 밝히고, 이 두 가지가 서로 이원화시킬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퇴계는 궁리(窮理)의 공부가 효과적일 수 있는 방법이 에 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퇴계는 거경(居敬)하면 궁리(窮理)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 퇴계는 의 의미를 규정하는 네 개의 조목을 주일무적’(主一無適), ‘심수렴불용일물’(心收斂不容一物), ‘상성성’(常惺惺), ‘정제엄숙’(整齊嚴肅)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중에서 단서로 잡아야 할 조목은 정제엄숙(整齊嚴肅)이라고 보았다. 즉 퇴계는 정제엄숙을 경공부의 가장 소중한 착수점으로 보았다. 그는 일상생활상 평이한 덕목들을 성실하게 실천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경공부의 단서라고 보았다.

- 일찍이 주자(朱子)소학(小學)서문에서 쇄소(灑掃)응대(應對)진퇴(進退)를 소학()에서 가르쳐야 할 세 가지 예절’[三節]이라 강조하였다. 즉 마당에 물 뿌리고 빗질하고 응하고 대답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이러한 기본 생활예절이야말로 󰡔소학󰡕의 기초 사상이자, 소학교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쳐야 할 내용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이후 대부분의 유학자들에 의해 생활신조로 받아들여졌으며, 특히 주자학적 사유에 철저했던 조선조 성리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금과옥조로 여겨졌다.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잇는 학자들이 모두 󰡔소학󰡕의 가르침을 존중했으며,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퇴계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으니, 퇴계의 평생을 일관했던 ()의 삶이란 다름 아닌 쇄소응대의 생활화요, 그 의미의 확장인 것이다. 퇴계선생의 수제자로 평가받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퇴계의 일상 생활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곳은 조용하고 정돈되어 있었으며, 책상은 반드시 깔끔하게 정리되었었다. 벽에 가득한 책은 언제나 가지런히 순서대로 있어서 어지럽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향을 피우고 정좌하였으며 하루종일 책을 읽어도 게을리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退溪先生言行錄󰡕)

 

- 퇴계의 경()의 삶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의 고종기’(考終記)를 읽어보면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의연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리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기록에 따르면, 퇴계는 1570119일 병세를 느끼기 시작한 후 128일에 작고한다. 그런데 그는 인생을 마감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평정심을 흩뜨리지 않고 절제된 삶을 보여주었다. 병석에 누워서도 제자들에게 답서를 보내고, 자제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 온 서적을 잊지 말고 돌려주라고 명한다. 그리고 자신이 교정한 서적의 잘못된 곳을 고치라 말하고, 자신의 장례를 어떻게 치룰 것인지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지시한다.

- 퇴계의 여상(如常)함은 작고하던 날의 기록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8일 아침에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셨다. 이날, 날씨는 맑았다. 유시(酉時: 오후5-7) 초에 갑자기 흰구름이 지붕 위로 모여들고 눈이 한 치쯤 내렸다. 잠시 뒤에 선생은 와석(臥席)을 정돈하라 말씀하셨는데, 부축하여 몸을 일으켜드리자 앉아서 돌아가셨다. 그러자 구름은 흩어지고 눈이 개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약해진다. 평소 강했던 사람일수록 더욱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퇴계의 경우에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의연했다. 요즘 유행어로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말이 있다. 진정한 유학자에게 있어서 삶은 죽음의 순간에 완성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결코 이분법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평상과 일상의 모습으로 맞이한 퇴계의 죽음이야말로 삶의 완성이자 인격완성으로서의 선비정신의 최종 실현이다.

 

. 경북사람들의 자기의식

 

1. 중심()의식

 

경북 북부지역 학자들의 자기의식을 읽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코드가 바로 중심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중심의식은 크게 두 가지, 즉 자신이 중심이라는 중심자 의식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중심이라는 중심부 의식으로 표현된다. 다른 대부분의 의식과 마찬가지로 이 의식 또한 이중적인 가치를 지닌다. 자부심, 자신감으로 표출되어 생활세계에 엄청난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자신과 자신의 생활환경을 중심부에 설정하고 다른 집단을 주변부, 주변부 사람, 주변부 문화라고 폄하하는 차별적 편견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 가치가 된다. 그리고 이 의식은 경북 북부지역 학자들의 자기의식으로 확인되는 몇 가지 요소, 즉 정통성, 순수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이 지역 학자들의 기질로 여겨지는 몇 가지 요소, 즉 보수성, 애향심, 의리, 지조론과 간접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경북 북부지역 학자들이 중심의식을 갖게 된 이유로는 많은 요소가 있겠지만, 우선 사상사 측면에서 살펴보면 퇴계학파(退溪學派)와 깊은 관련 있다. 퇴계학파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영남학파(嶺南學派)를 거론해야 한다.

통상 영남학파란 영남을 지역배경으로 삼는 학문상의 유파로서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 퇴계학파(退溪學派), 남명학파(南冥學派), 한려학파(寒旅學派)를 총칭하는 명칭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퇴계학파남명학파는 경상좌도(경상북도)와 경상우도(경상남도)를 대표하는 학파로서 이후 양 지역의 정신사적 전통에 큰 영향을 끼쳤다. ‘퇴계학파는 퇴계의 학식과 덕행을 존숭하여 이를 추종하던 학파인데, 퇴계의 출신 지역인 안동(安東)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이 지리적 배경이 된다.

광해군 시절까지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협력과 견제의 관계로 상호 발전하는 형국을 띠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이 왕권과 강력하게 결탁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 후로는 광해군과 연계되어 있던 남명학파는 궤멸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영조 때에 일어난 무신난(戊申亂)의 주도층 가운데 경상우도 출신의 정희량(鄭希亮)이 포함됨으로써 경상우도는 반역향(叛逆鄕)으로 지목되고 특히 우도(右道)의 사상적 근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문과 후학들은 순정(純正)하지 못한 것으로 분류되어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영남학파의 중심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이 되었고, 퇴계학파가 곧 영남학파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북 북부지역 학자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이 나라의 정신적 수도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한 결과 비록 이 지역 두메산골에 살고 있는 한미한 집안의 선비라 할지라도 이들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부지역으로 의식하였고 자기 스스로를 중심자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중심부중심자의식은 구한말(舊韓末)과 일제침략기에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특히 이 시기는 민족수난의 시기로서 중심의식은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식으로 표현되어 수많은 애국애족 운동이 일어났다. 유교의 고장 안동 출신 중에 유달리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많다는 점도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권오설(權五卨)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안동지역을 고향으로 하고 있으며 또한 이들 대부분이 안동지역의 유력한 명문가 후손들이라는 점이 외견상 대단히 이색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당시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사회주의 사상을 민족해방의 유일한 출구로 보았고, 또한 중심자 의식과 책임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명문가 후손들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사상으로 사회주의를 손쉽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심의식이 자기 고양과 내적 강화의 동기로서 작용하게 되면 이 지역사람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역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긍정적 힘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식이 타지역에 대한 우월감이나 타지역을 폄하하는 배타적 기질로 표현된다면 지역감정의 원류로 지탄받을 수 있다.

 

2. 비판적 성찰 : 선비정신의 이상적 지향을 꿈꾸며

 

외부문화의 수용에 적극적이지 못한 경북 북부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기질을 의리지조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 기질은 뚝심과 강한 추진력으로 나타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논리성과 합리성이 부족하며, 타협과 협상을 거부하는 독선적 성격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지역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유교문화또한 이중가치를 수반한다. 지조, 꼿꼿함, 점잖음이라는 긍정적 가치가 때로는 권위의식, 형식주의, 허세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심의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자칫하면 시대적 변화를 민감하게 읽지 못하고 주체적 역량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18세기 후반 정조(正祖)시대 이래 만 여 명이 넘는 유생(儒生)들이 참여하는 만인소’(萬人疏)가 경북 북부지역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영남지역에서 작성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이 지역사람들은 줄곧 재야세력이었고 중앙 정계에서 거의 배척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중앙정부의 예민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줄곧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지역인의 정치적 입장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의 하나로서 만인소가 이용되었다. 동서고금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만인소는 비록 이 지역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 지역 학자들을 진정한 주체세력으로 평가받게 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채제공(蔡濟恭)을 필두로 한 기호남인(畿湖南人)과 정조(正祖) 혹은 대원군(大院君)의 필요에 의해 동원된 세력이었으며 결국 시대를 이끌어갈 주체적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화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경북 북부지역 사람들이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자기의식과 기질은 현실로 확인되기도 하지만 미래적 입장에서 해석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자기의식과 기질은 실제를 기술(記述)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 보다는 오히려 지향해가야 할 방향으로 해석하는 이상설정(理想設定)의 의미도 크다. 그러한 면에서 오늘날 경북 북부지역 사람들은 단선적으로 평가된 자기의식과 기질에 너무 함몰될 것이 아니라, 전통과 새로운 문화요소를 주체적으로 재창조하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만 한다.

1927년에 조선총독부가 한국인의 기질을 조사한 자료에서 조선인은 일반적으로 감격이 결핍되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금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기질과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지나치게 감격하고 지나치게 흥분하는 한국인의 모습과 감격이 결핍되었다라고 하는 평가는 그야말로 정반대의 양상이다.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아 생겨난 차이다. 이 사례는 경북지역 사람들의 자기의식과 기질을 언급하는 경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지역의 정신적 지주 퇴계선생의 일화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당시 대학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던 퇴계가 무려 26세나 연하인 호남의 젊은 학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당찬 도전을 받아 겸허한 태도로 포용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퇴계는 이러한 경()의 삶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학문 성취뿐만 아니라 이 지역 유림(儒林)의 전통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한국 성리학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늘날 경북지역 사람들은 이 지역 출신의 자의식(自意識)으로 여겨지는 중심의식주류의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진정한 엘리트의식으로 승화시켜나가야 한다. 또한 이 지역 출신의 기질로 평가되는 의리와 보수적 심리 또한 참된 가치를 지키고 이어가려는 수호자의 모습뿐만 아니라 포용적이고 원만한 인격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퇴계를 위시한 이 지역 선현들이 이룩한 가치를 이 땅에 새롭게 꽃 피울 수 있을 것이고, 후손인 우리들이 미래사회의 존경받는 엘리트로 자리잡아 갈 수 있을 것이다.

 

1.李重煥, 󰡔擇里誌󰡕, ‘慶尙道첫 구절 참조.

2.玄風金宏弼, 河東鄭汝昌, 慶州李彦迪, 安東李滉을 말함.

3.李重煥, 󰡔擇里誌󰡕, ‘慶尙道참조

4.李重煥, 󰡔擇里誌󰡕, ‘慶尙道참조.

5.李重煥, 󰡔擇里誌󰡕, ‘人心참조.

6.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일조각, 1995), 17쪽 참조.

7.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14쪽 참조.

8.‘寒旅學派寒岡 鄭逑旅軒 張顯光의 학식과 덕행을 존숭하여 이를 추종하던 학파를 함께 칭하는 명칭이다. 그런데 寒岡旅軒 학문의 공통성혹은 연속성에 주목할 때 寒岡學派旅軒學派竝稱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兩人의 사상적 경향성과 실제 관계를 고려할 때 적어도 人脈에 있어서 旅學派로 병칭하는 것이 크게 무리이지 않다. 旅軒寒岡의 조카사위(姪壻)이며, 또한 그는 寒岡을 스승 격으로 대접하였다.

9.이러한 신념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안동시는 200674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브랜드를 특허청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안동시는, 안동에 주어진 정신문화적 가치 확산과 국민정신교육 도량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당위성 7가지를 제시하면서 그 첫 번째로 儒敎文化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鄒魯之鄕의 도시를 내세웠다.

10.정진영, “만인소, 영남 유생들의 집단적 정치 참여” (󰡔안동󰡕통권 제 100, 2005), 45-9쪽 참조.

 

 

출처 :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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